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발자크의 소설을 찍먹한 게 많다. 일단 <나나>는 표지에 이끌려 펼쳤는데, 읽다가 너무 지루해서 덮었다. <골짜기의 백합>은 재미가 없진 않았고 나폴레옹이 또 망친 것 같은 소년의 이야기가 나와 궁금하기도 했는데, 책 정리 하다가 없어졌고 다시 찾았을 때는 선뜻 읽어지지가 않았다. <어둠 속의 사건>도 몇 장 읽다가 꽂아두고, <나귀 가죽>도, <미지의 걸작>도 <13인당 이야기>도 모두 고이 모셔두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웠다. 만약 모든 것이 금지되고, 읽는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마저 불투명해진다면, 페터 한트케나 알랭 로브그리예나 조셉 콘래드의 책이라도 얼마나 재미있을까...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인간군상과 인간성을 볼 수 있을테니까. 그런데 심지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게다가 중국어는 뜻글자이다 보니 번역하면 책 쪽수가 그닥 많지 않은가 보다. 이 책에 나온 책들 중 <장 크리스토프>를 검색했는데, 1권만 900쪽이던데... 


1966년 어느 날, 마오쩌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대혁명이란 사건을 일으킨다. 뭐, 나라를 대변혁하는 운동이라고 하는데, 대약진 운동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어갔기에 환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권력도 지켜야 했고. 그리하여 학교가 문을 닫았고 책들이 불탔고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쫓겨났다. 젊은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보내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교육을 받도록 하게 하는 하방운동 또는 재교육으로 불리는 이 일은 현재의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이 책의 두 주인공에게도 일어난 일이었다.


나와 뤄는 겨우 열 일곱, 열 여덟이었고 부모님이 의사라는 이유로 완전 시골깡촌으로 재교육 받기 위해 내려오게 된다. 그 곳에는 시계조차 없는, 현대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었고 둘은 촌장 등 농민들의 감시를 받으며 매일 밭을 간다. 그들이 유일하게 해방되는 시간은 도시로 가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때이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돌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영화를 이야기로 들려줘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들은 마치 세헤라자드가 된 것마냥 이야기를 보고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같이 농촌으로 쫓겨 온 시인의 아들인 '안경잡이'에게 서양고전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 처녀가 등장한다. 어째서 그녀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았을까? 바느질 처녀는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인데 말이다.  


'안경잡이'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민요를 수집해야 하고, 뤄와 나는 그를 도와주는 대가로 소설책 한 권을 빌리기로 한다. 그들이 받은 책은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이다. 이 책을 읽고 전율하는 두 사람... 나는 이 책의 일부를 겉옷 안감에 필사하고, 뤄는 바느질 처녀를 훌륭한 숙녀로 만들기 위해 책을 읽어주려고 한다.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들은 그들의 삶에 겉도는 부유물일지도 모른다. 녹아들지 못하고 그저 겉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런 것 말이다. 뤄가 말라리아에 걸리자 바느질 처녀는 약초를 붙여주고 네 명의 무당을 불렀다. 20세기 분서갱유라 불리는 이런 사건 자체도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젋은 지식인들을 재교육하려고 농촌에 보냈는데, 현실은 무당이 병을 치료하고, 금서인 문학책들이 인간 세상을 알려준다니... 


이야기는 빠르고 재미있게 전개되어 순식간에 다 읽었다. 재미있었고, 웃겼다. 바느질 처녀 덕분에 발자크의 책들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그녀를 그렇게 변모시킨 그 이야기들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죽지 않고 돌고 도는 모양이다. 


읽다보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뤄와 내가 민요를 수집하기 위해 재봉사의 옷과 모자를 빌렸는데, 그 때 모자의 색깔이 녹색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녹색 모자나 녹색 머리 장신구는 배우자의 바람을 뜻하는 게 아닌가? 특히 남자가 녹색을 착용하면 오쟁이진 남편이란 말을 듣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가 재봉사에게 밤마다 들려주던 <몬테크리스토>의 이야기 중에, 마을 촌장에게 들키기 직전 '백작이 검사의 딸과 막 사랑에 빠지려는 순간'이란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빌포르의 딸인 발렌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모렐의 아들인 막시밀리앙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이야기는 조금씩 비틀려서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금 중국은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보낸다고 하는데 이제는 농촌에도 현대문물이 가득할테니 이렇게 책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일은 드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일일테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3-09-18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색 모자가 그런 뜻이 있었군요?
이 책 제목은 참 많이 들어본 것 같아요.
근데 첫 단원에 열거하신 작가들은 좀 지루한 작가들이에요? 저 작가들의 책도 읽어본 게 없네요?^^;;
요정 님은 늘 느끼지만 정말 다양한 분야의 다독가세요.

꼬마요정 2023-09-21 15:54   좋아요 1 | URL
책 제목 유명하죠? 저도 이제 읽었네요. (근데 전 옌롄커가 더 좋아요^^)
중국 갈 때 녹색 모자는 안 쓰는 게 좋거든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페터 한트케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로 노벨학상을 받았어요. 저는 이 작가의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었는데 음... 무슨 말일까? 그랬죠 ㅋㅋㅋㅋ
알랭 로브그리예 책은 <질투> 하나 읽고 있는데요, 아마 몇 년째 읽고 있기만 해요 ㅋㅋ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가서 절반 정도 읽고 그냥 그 페이지입니다. ㅋㅋㅋㅋ
조셉 콘래드는 단편은 좀 나았는데요, <암흑의 핵심>은... 음.. 아실 것 같아요. ㅋㅋㅋ

저는 그냥 이것 저것 궁금한 게 많아서 시도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9-21 17:08   좋아요 1 | URL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전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네요.^^;;
저도 궁금해지는데 언젠간 시도해 볼 시간이 오겠죠.ㅋㅋㅋ
열심히 시도해 봅시다.^^

꼬마요정 2023-09-21 17:50   좋아요 1 | URL
책나무 님이 더 대단하신걸요. 요리도 잘 하시고 ㅎㅎㅎ
우리 함께 열심히 시도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