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권
아침부터 줄곧 비가 세차게 퍼붓는다.
지금은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었다.
저리 퍼붓는 비를 보노라면 과연 봄비 맞나? 싶다.
아이들은 어제 원복(목요일은 항상 유치원 체육복을 입는날이다.)을 입었으니 오늘은 꼭 치마를 입혀달라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성화를 부린다.
비가 와서 안된다고 했지만 결국 둥이들의 요구에 항복했다.
(왜 항상 아들에겐 안돼! 완강하게 물리칠 수 있는데, 둘째딸들에겐 마음이 약해질까?^^)
치마를 입혀 우산을 쓰고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니 문득 비가 오는 날엔 시를 한 편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꺼내든 시집 한 권,김기택의 <껌>이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시를 옮겨본다.
그와 눈이 마추쳤다.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직립이 몸에 배었는지
네발로 걷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쓰레기 뒤지는 일을 방해한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야오옹,하고 감정을 실어 울더니
뜻밖에 아기 울음소리가 터지는 제목소리가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서둘러 달아나지 않았다.
슬픈 동작을 들킨 제모습에 화가 난 듯
고개를 숙이더니
굽은 등으로 천천히 돌아서서 한참 동안 멀어져갔다.
고양이 죽이기
그림자처럼 검고 발걸음 소리 없는 물체 하나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다.
급히 차를 잡아당겼지만
속도는 강제로 브레이크를 밀고 나아갔다.
차는 작은 돌멩이 하나 밟는 것만큼도 덜컹거리지 않았으나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타이어에 스며든 것 같았다.
얼른 싸이드미러를 보니 도로 한가운데에
털목도리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이미 오래전부터,
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
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
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나지 않게 삼켜버린 것이다.
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
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
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몸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
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
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
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
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속도를 더 내었다.
갑자기 아는 지인이 밤에 운전하다 고속도로에서 고양이를 친적이 있었다고 했다.
지인은 너무나도 놀라고,죄책감에 시달리다 다음날 가까이 있는 통도사절에 올라가 고양이의 명복(?)을 빌고 왔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러면서 지인의 교통사고 현장에서의 타이어의 느낌이,
시인의 너무도 친절한 묘사에 의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같아 내내 소름이 돋는다.
고양이에 대한 시인데도
고양이들이 처한 상황은 너무나도 상반적이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