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걷는 법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이지혜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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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신앙을 넘어 절망 속에서, 상실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순례길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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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존 캅 지음, 이경호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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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뇌 신앙

존 캅의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를 읽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믿음이 아니고 생각? 한국개신교회가 늘 강조하는 '오직 믿음'의 눈엔 낯설기 그지없다. 보통 한국개신교회는 믿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믿는 신앙을 강조한다. 그러니 의심스러운 점들을 생각해보고 질문하는 것은 미숙함이나 불신앙으로 비춰지기 쉽다. 뭔가 이상해도, 물어보기 어려운 분위기다. 설교에서 뭔가 강조하는 문장에 곧바로 '아멘'이 터져나와야 믿음 좋은 교회로 여겨진다.  "~입니다. 아멘!" 선포와 아멘 사이엔 틈이 없다. 정말 그런지 생각해보고 이해할 수 있는 간격이 없다. 그래서 때론 엉뚱한 말에 아멘을 외쳐 졸음 깨우는 웃음이 터져나오지 않던가. 

물론 선포된 신앙의 내용을 모를리 없다. 왜 그렇게 믿는지 어렴풋이 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이 왜 그렇게 결론나는지, 스스로 생각해보고 이해한 깨달음일까? 성경공부니 제자훈련이니 공부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게 돼도, 그 설명 역시 스스로 생각해보고 얻은 결론은 아니다. 그 논리가 전제한 관점들을 검토하고 다른 관점들과 비교해본 적이 없다. 그 논리 역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일 뿐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니 성도들의 믿음이 실은 목사의 믿음, 교단의 믿음을 맹목적으로 수용한 형국이다. 습관적 믿음, 외운 믿음, 타인의 믿음... 이런 믿음을 진정 자신의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천국 입구에서 천사에게 믿음을 고백했는데, 천사가 그것은 A 목사의 믿음이지 너의 것이 더냐, 반문하면 어찌할까. 기출문제 정답만 외워선 실전문제를 풀 수 없듯이 교리의 정답만 외우는 수준으론 현실을 신앙으로 살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믿음이 남들에게서 빌려온 믿음, 즉 다른 신자들이 관습적으로 믿는 믿음을 자신도 그냥 외우는 믿음이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여 자신이 책임지고 다듬어낸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_책표지글

오래도록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르쳤다. 라틴어로 예배하고 설교해 성도들은 전혀 못알아들었다. 하지만 그 권위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면 그만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런 교회의 믿음을 개인의 믿음으로 되돌려준 혁명이었다. 성경을 번역해 개개인이 직접 읽게 했고, 믿음의 내용을 직접 이해하고 깨달아 받아들일 때 구원이라는 혁명적 전환. 그러나 지금의 개신교회는 어떤가?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믿음이라면서도 오히려 다시 개인의 믿음을 앗아간 것이 아닌가. 유명한 대형교회의 목사가 감동적으로 선포하는 믿음에 아멘하면 충분한 것으로 퇴행한 것이 아닌가. 

스스로 고민하고 경험해보고 깨달은 자기 믿음은 사라져가는 것만 같다. 자신의 믿음이 아닐 때 자기 열매는 가능할까. 개인은 그저 대형교회 유명 목사의 믿음이 맺은 씨없는 열매로 전락한게 아닌지. 씨없는 열매는 심을 땐 쓸모 없고 먹기만 좋다. 누구 먹기 좋으라고 씨를 없애는지... 개신교 방송을 보면 유명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로 가득하다. 가톨릭 방송을 보면, 깊이 있는 신학강의들이 꽤 있다. 이젠 오히려 개신교가 더 가톨릭 같고 가톨릭이 오히려 더 개신교 같아 보이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존 캅은 이처럼 종교개혁이 다시금 절실히 필요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평신도들은 신학을 전문가에게 맡겨버린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재앙이 되어 왔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갱신을 원한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생각하기를 새롭게 해야 한다. ... 눈속임으로 한다거나 단지 감정에만 호소한다면, 교회의 진정한 갱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가 교인들의 성숙한 확신에 의해 살아갈 때 비로소 교회는 강해진다. 성숙한 확신은 생각을 통해서 형성될 수 있을 뿐이다."(19, 20)

생각을 통한 성숙한 확신! 존 캅은 그것이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닌 성도들도 사실은 신학자다. 신학자란 전문적인 지식을 정밀하게 다루는 사람이기 이전에,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생각하는 사람'은 또한 신학자만은 아니다. "진정한 신학은 생각하는 모두를 위한 것"(18)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일반 성도들이 신학적 사유를 익히고 적용할 수 있을까? 

존 캅은 이 책에서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길을 보여준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성도들의 눈높이에서 길을 보여주고, 직접 연습할 수 있는 방법도 하나하나 안내해주고 있다. 비극, 페미니즘, 기도, 동성애, 경제학과 기독교의 관계, 교육제도의 문제 등 일상의 구체적인 일들에 적용하는 예도 들고 있다. 그것도 친절하게 대화의 상황으로 설정해서. 신학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책임 있는 성숙한 신앙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내용을 전하려하기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익힐 수 있게 안내한다. 이를 통해 다양한 다른 현실의 문제들에대해서도 기독교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목회자는 신학적 접근에 대해서 성도들보다 분명 익숙하다. 하지만 신학적 사유란 무엇이고, 그것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떨까? 성도들에게 신학적 사유로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을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구체적인 현실에 잘 적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게 맞을 것이다. 사실 신학의 영역도 잘 모를 뿐더러 신학 외의 급변하는 현실의 영역은 더 더욱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학은 현실에 맞지 않는 영역이자 전문학자들의 영역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존캅은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할 수 있는 신학의 영역을 제시한다.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자기 신학의 삶을 누리고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정말 일반 성도들도 신학적 사유로서 성숙한 신앙의 삶을 누릴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직접 확인해보기를 추천한다. '카더라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책임 있는 자기 신앙의 풍성함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 첫걸음으로 추천하고 싶다. 성도들을 계속 유아로 고착시키곤 젖먹이고 기저귀 갈다가 끝나는게 싫다면, 목회자들에게도 추천한다. 성도들에게 감춰온 신학함의 풍성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완벽한 방법으로 동의하기 어렵더라도 그 길을 시작하는 첫걸음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물론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분명 '생각하는 기독교인어야 산다'지 '생각하는 기독교인이어야만 구원받는다'는 아니다. 생각을 통해 의식화한 자기 신앙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을까? 이 책은 구원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충분히 감당하는 성숙한 신앙의 길을 다룬다. 또 이 존 캅도 권하고 적용하고 있지만 목회자, 신학자 등과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방법이 바람직하다. 혼자서 혼란의 늪에 빠지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대부분이 믿음이 남들에게서 빌려온 믿음, 즉 다른 신자들이 관습적으로 믿는 믿음을 자신도 그냥 외우는 믿음이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여 자신이 책임지고 다듬어낸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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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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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강상중 저)을 이틀만에 다 읽었다. 내 안에도 늘 끊임없이 고민이 출렁이기 때문이었을까? 도서관에서 이 책에 시선이 가 빌려왔다. 중학교 1학년, 삶에 대한 절박한 첫 물음에서부터 나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물음들은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마흔이 불혹이라 했건만, 사십대 중반에 이르러도 온전히 매듭지어진 고민이 얼마나 있나 싶다.

그러나 저자 강상중은 말한다.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고민하는 힘이 살아가는 힘˝이라고. 지난 시간을 돌아 보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정답, 해답 때문에 살아간 시간보다 고민 때문에 물음 때문에 살아가고 참구한 시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고민의 갈증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게 했다. 얼마나 많은 정답을 알고 있느냐, 보다 얼마나 진실하고 의미 있는 고민에 붙들렸느냐가 더 중요한게 아닐까! 어차피 삶의 신비 앞에 유일한, 완결된 정답이란 우상일 뿐이 아닌가. 결국 정답을, 정답으로인한 굳어짐을 허무는 물음과 고민이 새로운 지평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가.

고민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묻는다. 유영모 선생님 말씀처럼 젊음은 `절 물음`이고 젊은 이는 `절 묻는 이`이다. 저자도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한 청춘을 이야기한다. 그 스스로 자신과 시대를 향한 고민에 끊임없이 답을 찾는 청춘을 보여준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청춘의 생명력으로 유목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그 물음이 인간다움의 깊이를 향해야 한다. 표피적, 표면적 고민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존재의 깊이에 대한 고민일 때, 참된 의미 속에 머물 수 있다. 참된 삶의 의미는 답이 아니라 고민의 과정 그 자체가 아닌가.

우리 시대가 희망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어둡기 그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삶의 의미, 존재의 깊이를 묻는 고민이 철없는 낭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의미와 존재의 깊이에 대한 물음과 추구를 거세한 어떤 해결도 결국 공허함 그 자체다. 어둠이 깊을수록 더 깊고 넓은 고민의 불을 내면 깊이 밝혀야 한다. 그의 고민이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답이 아니라 그 물음이 등불이 되어 답을 향한 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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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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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간절한 시대, 간절한 만큼 정말스런 시대, 인문학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찾았다는 이야기들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몇몇 다큐에서 인문학 독서를 통한 변화의 가능성을 접했다. 우연히 티비에서 이지성씨의 강연을 접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인문학 독서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다니, 반가운 소식이고 호기심 나는 소식이었다. 그러다 대학도서관 e북으로 만나 빌리게 되었다. 인문학 독서가 어떻게 희망이 되었고 또 될 수 있는지 궁금했고 혹 내 주변에서 그 희망의 씨앗을 뿌려보고 싶기도 했다.

 

스마트폰으로 짜투리 시간에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 동양과 서양, 고대로부터 근, 현대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천재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인문학에 몰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둔재였는데, 인문학 독서에 빠져든 후에 천재적 두뇌를 가지게 된 여러 예를 든다. 그랬구나 싶기도 하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다 인문학 독서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너무 갖다 붙이는건 아닌가 갸우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문학 독서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읽어나갈수록 분명해졌다.

 

다만 저자가 인문학을 통해 천재적 두뇌를 갖게 된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스스로도 천재가 되기 위한 인문학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인문학이 천재가 되거나 성공의 도구이기 이전에 사람됨을 위한 것임을 저자도 분명히 알고 있다. 다만 그런 인문학이 현실적인 삶에도 충분한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천재가 되고 두뇌가 바뀌고 깨달음에 이르러 머리가 열리는 등의 절정에 대한 강조가 많아 보인다. 저자 스스로 그런 경지에 경탄하고 동경하고 그러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는 듯 느껴진다.

 

물론 오해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면서 인문학 공부의 본질이 희미해지는 듯이 보였다. 인문학이 또다른 성공학, 자기계발의 도구로 비춰지는 느낌 때문이다. 인문학은 말그대로 사람의 사람됨을 추구하여 그것을 통해 행복을 함께 나누는데 그 본질이 있다. 그렇다면 천재가 되느냐 아니냐, 황홀한 깨달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닌가. 사람됨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그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충분한 게 아닌가. 리드하기 위한 리딩이 리딩을 도구화하고, 사람됨을 도구화하려는 욕망의 덫에 걸리기 쉬워 보였다.

 

인문학 독서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 가능성과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또 깨달을 때까지, 마음에, 삶에 새겨질 때까지 수백번 읽고 외우는 공부의 중요성도 보여주었다. 마음을 울리는 구절들만을 엮어서 보는 공부법도 기억에 남는다. 서양의 인문학공부보다 동양의, 특히 우리 선조들의 인문학 공부에서 깨달음과 섬김의 실천이 궁극적 목적이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측면에서는 리딩의 리드가 분명 우리 삶에 되살아나야할 것이다. 인문학이 보여주는 사람됨의 뜻을 따라 자신과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독서! 저자도 분명 이것을 의도했으리라. 특히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인문학, 사람된의 공부는 거세당하고 노예됨의 공부만 남은 현실에서는 더욱 간절하다. 사람됨을 추구하고 스스로 생각해서 깨닫는 공부는 거세당하고, 지시를 알아듣고 그것을 단순히 암기하며 따르는 노예적 공부만 남은 우리 현실에는 더 더욱 되살아나야 한다.

 

이 책을 다 읽고난 후 독서와 공부에 대한 바람이 깊어졌다. 책을 읽고 감동만으로 스쳐가는 공부보다 감동들을 모아두고 마음과 삶에 늘 새겨나가는 공부를 그리게 되었다. 이 책에서 예로 든 누군가는 마흔 살에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 이후 큰 업적을 남겼단다. 큰 업적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읽고 되새기며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기쁨을 누리고 나누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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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깨어나기 - 길들여진 삶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로
타라 브랙 지음, 윤서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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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잠가놓지 않았습니다.˝ 활짝 열린 감방 안에서 후디니는 자신이 갇혀 있다고 믿었고, 자물쇠를 풀어 벗어나려는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단단히 가둔 셈이었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후디니처럼 삶이 반드시 풀어야 할 자물쇠라고, 해결책이 필요한 문제라고 믿고 있는가? 우리의 문제는 생각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삶 자체를 통제하려는 노력이다. 쉼 없는 자기 대화가 침묵할 때, 오직 그때에야 우리는 감방문이 이미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175,176)

행복하려할 때 불행해지고,
고치려할 때 고착되고,
안전하려할 때 불안하며,
조정하려할 때 끌려간다.

행복하려는, 고치려는,
안전하려는, 조정하려는
이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늪...

삶은 풀어야할 문제가 아니라
환영해야할 선물이며
끌어안아야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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