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 북유럽 사회가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
아누 파르타넨 지음, 노태복 옮김 / 원더박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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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특별해야만 행복한가라는 반문을 다룬 글에서 이 책을 만났다. 곧바로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추석연휴기간에 틈틈이 다 읽었다. 반납기간 채우려 정신없이 읽어내려간 부분이 적지 않아 아쉽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몇 가지 통찰과 화두를 얻었다.

<1. 생은 다른곳에?> 핀란드인인 저자가 미국인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온다. 바로 그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자신이 떠나온 핀란드라는 기사를 접한다. 태어나 자란 나라, 핀란드가 그렇게 행복한 나라였나?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고 국민들 자신은 국가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단다.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노르딕 국가 국민들 자신은 의아해한단다. 우리 나라가 그렇게 행복한 나라야였어? 하지만 떠나보면 안다. 저자 역시 떠나온 그곳이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미국 국민으로 살아가면서 절절히 느낀다. 파랑새는 '여기 아닌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었다. 생은 다른 곳에, 행복은 다른 곳에 있겠거니 하는 곁눈질이 놓친 행복을 다시 생각케 한다.

<2. 철저한 개인주의가 낳은 복지> 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는 사회주의가 중심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는 오히려 개인주의의 산물이라고 역설한다. 이를 "사랑에 관한 노르딕 이론"이라며 강조한다. 노르딕 국가들은 한 개인이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추구한다. 혼자일지라도, 돈이 없어도, 몸이 아파도 걱정 없이, 걸림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한 삶이라 보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가족 중 누군가가 아파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거나, 늙고 병들어서 자식에게 짐이 되어야 한다거나 하면, 독립된 개인으로 자유롭게 마음껏 사랑하기 어렵다. 그래서 개인의 독립된 삶과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는 국가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철저한 개인주의, 자립한 개인의 행복을 위한 복지, 복지에 대한 안목을 선사한다.

<3.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회구조> 복지혜택을 폭넓게 제공하고 그것을 위해 세금을 많이 거두면, 사람은 게을러질 것이고 창의성이 사라질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수많은 반증의 예를 제시한다. 노르딕 국가의 기업 가운데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기업들의 예를 봐도 오히려 더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다. 사업 아이템이 실패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 창의적이고 실험적일 수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에서도 사회적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에 더 몰입해서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교육에서 마찬가지다. 경쟁과 평가를 통해 인간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믿어주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 때문에 굳이 악해질 이유가 없다. 순수한 즐거움과 자기 성취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달라진다.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인간을 선하게 하는 구조인가 악하게 하는 사회구조인가가 중요해진다. 

<4. 긍정심리학과 자기계발의 역설> 노르딕 국가들엔 자기계발분야의 유명한 선생이 없다고 한다. 자기계발, 동기부여 프로그램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자유롭게 자신을 발전시키고 성취해나갈 수 있는 충분한 제도적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선 동기 부여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간다. 자기계발과 동기부여의 열풍은 오히려 아무리 노력해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구조악의 반증이 아닐까. /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의 대비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인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적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노르딕 국가의 국민들은 오히려 부정적이고 불평이 많단다. 그 불평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뜯어 고치기 때문에 더 발전적이고 안정적인 사회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5. 모세가 필요없는 나라, 하나님 나라> 특별해야 행복할까? 특별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하지 않으면 불행해지기 쉬운 사회인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평가받고 경쟁한다. 정말 뛰어나고 특출나도 살아남기 어려운 현실이다. 미국은 특별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로, 상대적으로 노르딕 국가들은 평범해도 충분한 구조로 보인다. 특별한 소수가 특별한 일을 성취해 1%의 부자가 되는 구조가 나머지 99%가 희생양이 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노르딕 사회에서는 굳이 특별해져야할 이유가 없다. 누구를 이길 이유도 없다. 다만 자신이 되면 된다. 그래도 충분히 행복하다. 특별한 사람은 그저 특이한 사람일 뿐이다. 특별한 게 가치 있는게 아니라 특별해야 살아남는 구조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만 행복하다고 쇄뇌한 것일 뿐이다. 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도 특별한 은총을 강조한다. 신유와 기적을 강조하고 대형교회의 특별함을 높이 산다. 모세 같은 능력자가 떠받들어진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모세가 필요없는 곳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만인이 사제가 되는 나라, 그것이 종교개혁이 선포한 세계다. 평범한 모두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범한 일 모두를 기적으로 누리는 하나님 나라다. 모세 역시 그런 나라를 바랐다. "모세에게 내린 영을 장로들 일흔 명에게 내리셨다. 그 영이 그들 위에 내려와 머물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에서 예언하였다고 알렸다. 그러자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곁에서 모셔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나서서,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민수기 11장)

 

<6. 사랑에 관한 노르딕 이론과 종교개혁> 개신교 Protestant는 말 그대로 항의자다. 불평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긍정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묻고 이의를 제기하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불순종이라고 낙인을 찍고 있는 한국개신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분노하고 저항하고 비판할 때 개혁과 발전이 가능하다. / 원죄를 타고난 인간? 사랑에 관한 노르딕 이론, 선한 사람이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라는 관점에서 재고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바라시는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나라, 그게 하나님 나라 아닌가. 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제도와 구조를 통해서도 이뤄가야 하는게 아닌가. 원죄는 한 개인이 아니라 제도와 구조에서 봐야 한다. 예수님도 세리, 창녀... 당시에 죄인으로 낙인 찍힌 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당시에 선하다는 이들의 위선을 까밝히지 않으셨던가. / 교회는 자기계발의 신화처럼 긍정적인 믿음이면 다 해결될 것처럼 성도들을 부축이고 있는게 아닌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믿음, 신앙, 열심에 다 지운게 아닌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선하게 마음껏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는 너무 무심하게 아닌가. 오직 은총! 은총은 교회 안에, 그것도 대형교회 안에, 유명 목사님을 통해, 부자가 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가? 전적으로 은총이라면 어떤 조건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특정 교회, 특정 목사라는 틀에 절대 갇힐 수 없다. 교회 안에도 갇힐 수 없다. 종교개혁의 오직 은총은 이제 교회 안팍에 모든 사람들이 일상의 현장 모든 곳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자라나고 열매맺을 옥토로 온세상을 갈아엎는 것이 신앙의 삶이다. / 생은 다른 곳에? 천국은 다른 곳, 내세에? 여기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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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 북유럽 사회가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
아누 파르타넨 지음, 노태복 옮김 / 원더박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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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이 가능하게 할 사회구조와 인간론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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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돈 큐피트 지음, 박상선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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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상을 해체하라]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돈 큐빗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요즘 이 책을 다시 펼쳐 끝까지 읽었다. 교단, 단체, 조직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려고 분주해 보인다. 그런 와중에 산속의 작은 교회에서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서고에 꽂힌 이 책을 뽑아들게 했다. 종교개혁을 다시 생각해보고 무엇을 어찌할지 방향을 잡아보고 싶은 분이라면 권할만 하다.

신대원 시절, 성경의 거대한 흐름이 시야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창세이후 펼쳐진 만남의 흐름이다. 거칠게 스케치해보자면 직접성과 매개성 사이의 진자운동이랄까.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고 대화하던 인간, 그 친밀한 만남이 깨진다. 그리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자가 등장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메신져 역할을 한다. 그 전통이 이어져 체계화, 조직화되면서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을 대신 만난다. 예수님께 이르러 그 중개자 구조가 해체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성막 휘장이 찢어지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각 사람에게 직접 임한다. 예수께선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신다. 각 사람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만나도록.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피하신게 아닌가.

사랑에 빠진 이라면 누구라도 직접 만나고 함께 살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명확하고 단순한 사실이다. 하나님과 인간도 당연히 중개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만나 함께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회복한 직접성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도들, 교회의 제도가 다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꺼어든게 아닌가. 다시금 중개 구조를 견고히 해나간게 아닌가. 사도들이, 교회가 예수님의 뜻을 정녕 역행한 것인가? 사도의 전통, 교회의 전통을 의심하기엔 너무 순진했던 어린 시절의 난 혼란스러웠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한 95개조의 반박문, 그것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다. 루터가 생각하는 구체적인 개혁안은 1520년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책에 나타난다. 여기에 개신교를 잉태한 종교개혁의 방향, 그 목적이 드러나 있다. 루터는 이 책에서 모든 신앙인이 제사장이라는 만인사제직을 주장하면서 당시 교회 안에 있었던 세 가지 장벽을 비판한다.

베드로전서 2:9에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선언한다. 요한계시록 5:10에도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라고 되어있다. 교황 같은 특별한 누군가만이 아니라 신앙인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 다만 목회자는 목회를 통해서 제사장의 삶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을 통해서 제사장의 삶을 사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터는 이에 근거해서 세 가지 담을 비판한다. 첫 번째는 영적 계급과 세속 계급의 담이다. 교황, 주교, 사제를 영적계급으로, 군주, 영주, 직공, 농부는 세속 계급으로 나눴던 당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한다. 이 둘을 나누는 담은 완전히 조작이라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직무상의 차이만 있을 뿐 영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을 분리해선 안 된다고 봤다. 두 번째는 성서해석의 담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교황만이 성서해석에 있어서 무오한 유일한 권위자라고 봤다. 하지만 루터는 이를 비판하며 모든 신앙인이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길을 연다. 세 번재는 교황의 권위라는 담입니다. 교황의 권위가 교회회의보다 더 위에 있었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

성과 속의 담을 허물고 성경을 신앙인 개인에게 돌려주며 교황의 권위를 절대화하지 못하게 한 종교개혁! 이렇게 세 가지 담을 허물려 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루터 스스로 진정 그 안에 담긴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 방향성을 분명하다. 그 거대하고 급진적인 흐름이 보이는가?

예레미야 31:31~33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요엘서 2:26,27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종교개혁의 거대한 흐름은 구약 예레미야서, 요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비춰준다. 모든 사람에게, 종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교황, 주교, 사제, 목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직접 만나시고 직접 말씀하시고 직접 동행하시려는 사랑이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우리 사이엔 그 누구도 끼어들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중매자는 필요없다. 이런 종교개혁의 뜻을 세우고 개신교회가 생겨나고 500년이 흘렀다. 루터가 뜻한 바 그 세 가지 담은 허물어졌는가? 주님과 신앙인의 직접적인 사귐은 충만해졌는가?

여전히 목회자는 영적인 계급이고 일반 신자는 세속적인 계급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는 거룩한 일이고 직장의 일은 세속적인 일일 뿐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목회자는 강단 위에 올라와도 되지만 성도는 안 되는 건가? 목회자는 설교해도 되지만 성도는 안 되는가? 성경의 해석은 유명한 대형교회의 목사, 신학교의 교수의 몫이고 일반 성도는 그저 그들의 해석을 받아 먹을 뿐이지 않은가. 예배의 형식만을 봐도 분명하다. 예배는 수많은 전문 중개자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성가대와 반주팀이 멋진 연주를 해야 더 멋진 예배다. 무엇보다 중심엔 명연설가가 감동적이고 재미난 설교를 성공적으로 해내야 은혜로운 예배다. 성도들은 관람객으로 수동적인 자리에 갇혀있다. 더 멋진 감동을 전해받을수록 은혜로운 예배다. 어느 유명한 목사, 어느 대형교회, 어느 새롭고 혁신적인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려 한다. 교황이 없고, 주교나 사제는 없지만, 그 자리들을 다시 목사와 찬양사역자와 성가대가 대체한 건 아닌가? 물론 종교개혁 당시의 교황이나 사제의 역할과 오늘날 목회자의 역할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과 자신의 직접성을 가로막는 담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를 찾기 어렵다.

예배의 형식을 바꾸고 새로운 개혁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려는 모든 활동은 이를 기억해야 한다.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남과 동행을 위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직접성은 즉각성을 불러온다. 직접적이기 때문에 즉각적이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 지금 여기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다. 즉각적이라는 것은 내세의 일이 아니라 현세의 일이라는 뜻이다. 언젠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간다. 주님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

저자 돈 큐빗은 이 책에서 여기에서 지금 누리고 이뤄갈 하나님 나라를 강조한다. 그것을 가로막는 교회의 조직, 교리, 신학 그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려 한다. 그는 교회가 자신의 잠정성을 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지연시키는 우상이 되었다고 날선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그 어떤 중개자, 중매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음 세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연기해버리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있다. 몰락해가는 교회 기독교의 알몸을 까밝히고 하나님 나라의 기독교를, 역사적 예수의 가장 강렬했던 선포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는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 그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포스트모던 좌파라고 평할 만한 그의 급진적 주장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귀 기울여 듣고 스스로를 돌아볼 만한 통찰만은 분명하다. 종교개혁의 자식들인 개신교회가 스스로를 기만해온 건 아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하고 천국은 내세에나 갈 곳으로 지연시키고 있는건 아닌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정직하게 묻고 답하게 한다. 개신교회의 퇴행을 protest하고 중개상을 해체하게 한다. 자신의 신앙, 신학, 예배,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여기에서 살게 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내일로 미루게 하는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는가, 아니면 누군가, 무엇인가를 통해서만 만나게 하는가? 화두 하나 선명하게 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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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명상 레슨 - 누구나 쉽게 따라하는 15분 명상
잭 콘필드 지음, 추선희 옮김 / 불광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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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간단하게 그러나 결코 얕지 않게 명상의 길을 인도해주는 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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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대해 무닌드라에게 물어보라
미르카 크네스터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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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아름다운 수행과 자비의 삶이 순풍이 되다. 사랑과 자유와 평정의 삶을 향한 순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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