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돈 큐피트 지음, 박상선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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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상을 해체하라]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돈 큐빗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요즘 이 책을 다시 펼쳐 끝까지 읽었다. 교단, 단체, 조직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려고 분주해 보인다. 그런 와중에 산속의 작은 교회에서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서고에 꽂힌 이 책을 뽑아들게 했다. 종교개혁을 다시 생각해보고 무엇을 어찌할지 방향을 잡아보고 싶은 분이라면 권할만 하다.

신대원 시절, 성경의 거대한 흐름이 시야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창세이후 펼쳐진 만남의 흐름이다. 거칠게 스케치해보자면 직접성과 매개성 사이의 진자운동이랄까.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고 대화하던 인간, 그 친밀한 만남이 깨진다. 그리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자가 등장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메신져 역할을 한다. 그 전통이 이어져 체계화, 조직화되면서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을 대신 만난다. 예수님께 이르러 그 중개자 구조가 해체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성막 휘장이 찢어지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각 사람에게 직접 임한다. 예수께선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신다. 각 사람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만나도록.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피하신게 아닌가.

사랑에 빠진 이라면 누구라도 직접 만나고 함께 살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명확하고 단순한 사실이다. 하나님과 인간도 당연히 중개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만나 함께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회복한 직접성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도들, 교회의 제도가 다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꺼어든게 아닌가. 다시금 중개 구조를 견고히 해나간게 아닌가. 사도들이, 교회가 예수님의 뜻을 정녕 역행한 것인가? 사도의 전통, 교회의 전통을 의심하기엔 너무 순진했던 어린 시절의 난 혼란스러웠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한 95개조의 반박문, 그것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다. 루터가 생각하는 구체적인 개혁안은 1520년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책에 나타난다. 여기에 개신교를 잉태한 종교개혁의 방향, 그 목적이 드러나 있다. 루터는 이 책에서 모든 신앙인이 제사장이라는 만인사제직을 주장하면서 당시 교회 안에 있었던 세 가지 장벽을 비판한다.

베드로전서 2:9에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선언한다. 요한계시록 5:10에도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라고 되어있다. 교황 같은 특별한 누군가만이 아니라 신앙인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 다만 목회자는 목회를 통해서 제사장의 삶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을 통해서 제사장의 삶을 사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터는 이에 근거해서 세 가지 담을 비판한다. 첫 번째는 영적 계급과 세속 계급의 담이다. 교황, 주교, 사제를 영적계급으로, 군주, 영주, 직공, 농부는 세속 계급으로 나눴던 당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한다. 이 둘을 나누는 담은 완전히 조작이라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직무상의 차이만 있을 뿐 영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을 분리해선 안 된다고 봤다. 두 번째는 성서해석의 담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교황만이 성서해석에 있어서 무오한 유일한 권위자라고 봤다. 하지만 루터는 이를 비판하며 모든 신앙인이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길을 연다. 세 번재는 교황의 권위라는 담입니다. 교황의 권위가 교회회의보다 더 위에 있었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

성과 속의 담을 허물고 성경을 신앙인 개인에게 돌려주며 교황의 권위를 절대화하지 못하게 한 종교개혁! 이렇게 세 가지 담을 허물려 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루터 스스로 진정 그 안에 담긴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 방향성을 분명하다. 그 거대하고 급진적인 흐름이 보이는가?

예레미야 31:31~33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요엘서 2:26,27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종교개혁의 거대한 흐름은 구약 예레미야서, 요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비춰준다. 모든 사람에게, 종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교황, 주교, 사제, 목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직접 만나시고 직접 말씀하시고 직접 동행하시려는 사랑이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우리 사이엔 그 누구도 끼어들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중매자는 필요없다. 이런 종교개혁의 뜻을 세우고 개신교회가 생겨나고 500년이 흘렀다. 루터가 뜻한 바 그 세 가지 담은 허물어졌는가? 주님과 신앙인의 직접적인 사귐은 충만해졌는가?

여전히 목회자는 영적인 계급이고 일반 신자는 세속적인 계급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는 거룩한 일이고 직장의 일은 세속적인 일일 뿐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목회자는 강단 위에 올라와도 되지만 성도는 안 되는 건가? 목회자는 설교해도 되지만 성도는 안 되는가? 성경의 해석은 유명한 대형교회의 목사, 신학교의 교수의 몫이고 일반 성도는 그저 그들의 해석을 받아 먹을 뿐이지 않은가. 예배의 형식만을 봐도 분명하다. 예배는 수많은 전문 중개자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성가대와 반주팀이 멋진 연주를 해야 더 멋진 예배다. 무엇보다 중심엔 명연설가가 감동적이고 재미난 설교를 성공적으로 해내야 은혜로운 예배다. 성도들은 관람객으로 수동적인 자리에 갇혀있다. 더 멋진 감동을 전해받을수록 은혜로운 예배다. 어느 유명한 목사, 어느 대형교회, 어느 새롭고 혁신적인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려 한다. 교황이 없고, 주교나 사제는 없지만, 그 자리들을 다시 목사와 찬양사역자와 성가대가 대체한 건 아닌가? 물론 종교개혁 당시의 교황이나 사제의 역할과 오늘날 목회자의 역할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과 자신의 직접성을 가로막는 담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를 찾기 어렵다.

예배의 형식을 바꾸고 새로운 개혁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려는 모든 활동은 이를 기억해야 한다.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남과 동행을 위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직접성은 즉각성을 불러온다. 직접적이기 때문에 즉각적이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 지금 여기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다. 즉각적이라는 것은 내세의 일이 아니라 현세의 일이라는 뜻이다. 언젠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간다. 주님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

저자 돈 큐빗은 이 책에서 여기에서 지금 누리고 이뤄갈 하나님 나라를 강조한다. 그것을 가로막는 교회의 조직, 교리, 신학 그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려 한다. 그는 교회가 자신의 잠정성을 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지연시키는 우상이 되었다고 날선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그 어떤 중개자, 중매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음 세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연기해버리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있다. 몰락해가는 교회 기독교의 알몸을 까밝히고 하나님 나라의 기독교를, 역사적 예수의 가장 강렬했던 선포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는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 그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포스트모던 좌파라고 평할 만한 그의 급진적 주장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귀 기울여 듣고 스스로를 돌아볼 만한 통찰만은 분명하다. 종교개혁의 자식들인 개신교회가 스스로를 기만해온 건 아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하고 천국은 내세에나 갈 곳으로 지연시키고 있는건 아닌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정직하게 묻고 답하게 한다. 개신교회의 퇴행을 protest하고 중개상을 해체하게 한다. 자신의 신앙, 신학, 예배,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여기에서 살게 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내일로 미루게 하는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는가, 아니면 누군가, 무엇인가를 통해서만 만나게 하는가? 화두 하나 선명하게 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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