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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뜻밖의 친밀함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에 파수꾼』
아무날도 아닌 어느 날이었다. 생일도 기념일도 아닌 어떤 날, 이 책이 도착했다. 그 책에서 맛 본 그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머금고 왔다. 소포 발신인에 적힌 어릴 적 친구의 이름이 어릴 적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날도 아닌 그날은 특별한 날이 되고 말았다. 그 고마움과 호기심을 책꽂이에 꽂아두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년 만에 펼쳐 읽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어디선가 들어본 제목, 알고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낯선 숲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들어서듯 읽어나갔다. 직전에 읽은 도스트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서머싯 몸의 『면도날』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두 소설도 스타일이 다르다. 그러나 둘 다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호밀밭에 파수꾼』에는 특별한 사건의 전개도, 유혹도 없다. 읽고 싶으면 읽고 아니면 말라는 식의 독백이 주를 이룬다.
16세 소년인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또다시 퇴학을 당해 집으로 돌아오는 이틀간의 이야기다. 기숙사에서 호텔로, 호텔에서 영화관, 술집 등을 헤매며 쏟아내는 불평, 불만의 주된 내용이다. 콜필드의 눈에 세상은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한 역겨운 대상이다. 무엇에 구역질이 나는지 투덜대는 십대 소년의 독백이 이어지고 이어진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왜 그렇게도 냉소적이고 삐딱한 성격인 것인지 따위는 설명하지 않는다.
홀든은 “행운을 비네!”라는 인사말을 생각만 해도 끔찍해 한다.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에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라고 하는 인사말도 환장할 노릇으로 느낀다. 인사말조차 진심이 담기지 않은 빈말이면 역겹다. 그 만큼 예민하게 순수에 집착하는 소년의 냉소적 독백이 가득하다. 홀든은 피아노 연주를 듣고 박수치는 청중의 반응에 역겨워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만약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배우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바보 같은 사람들이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더 끔찍한 일일 것 같다. 저들이 내게 박수 갈채를 보내오는 것조차 싫을 것이다. 사람들이란 늘 별것도 아닌 일에 박수를 치곤 하니 말이다. 내가 피아노 연주자라면, 난 옷장 속에 들어가 연주할 것이다.” p.116.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포크너가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고 극찬한 작품, 출간 50주년, 아직도 전 세계 젊은이들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는 문제작, 출간 직후 청소년 금지 도서였으나 지금은 최우수 권장 도서가 된 소설. 붉은 띠지에 자랑스럽게 두른 이 내용이 쉬 와 닿지 않았다. 사실 주인공 콜필드가 이렇게 치켜세우는 내용을 봤다면, 구역질을 하지 않았을지.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는 그 목소리에서도 위선과 허영을 찾아내고 말았을 듯싶다.
콜필드는 자신을 진정 황홀하게 만드는 책을 제시한다.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p.32) 100페이지 가까이 읽었을 때 콜필드도, 저자도 편한 친구로 다가오긴 어렵겠다 싶었다. 위선과 가식에 강박적으로 역겨워하는 삐딱한 시선에 나 역시 구토의 대상이지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사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목사들에 대해서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다. 내가 다녔던 학교마다 목사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틀에 박힌 거룩한 목소리를 만들어 설교를 하곤 하는 것이다. 난 그게 싫었다. 왜 좀 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목사들의 이야기가 순 거짓말처럼 들리는데도 말이다.” p. 137.
어디 가서 처음 본 사람이 목사 아니냐고 말하면, 편치 않다. 이 시대 목사가 보여준 전형적인 이미지가 배버렸나 싶어서다. 가수나 목사가 틀에 박힌 상투적인 태도를 보일 때, 진심이기보다 닳고 닳은 습관의 껍질처럼 보이기 쉽다. 신앙인, 목사로 얼마나 진실한 말, 마음 담긴 태도를 살아왔을까? 오랜 습관으로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 껍질만 두꺼워진 건 아닐까? 피하기 어렵겠지만, 내 눈에도 그런 모습이 그리 좋지 않았던가 보다. 그런 모습일까봐 신경 쓰이는 것을 보니.
책을 읽는 과정이 등산 같이 느껴지곤 한다. 어떤 산은 초입부터 풍경이 마음에 끌린다. 그러나 어떤 산은 자갈 투성이에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나 불편했던 산도 한참을 걷다보면 그만의 멋과 맛이 드러난다. 결국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면 다정한 이별이 되고 만다. 이 책도 100페이지를 넘기고 어느 순간, 주인공의 투털거림이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가 없어도 그 나름의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내 마음이 되고 말았다.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p.279.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불평했던 친구까지도 보고 싶다는 콜필드의 마지막 고백이다. 빈 말을 그리도 역겨워 하는 그이기에 진심 가득한 말로 다가온다.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콜필드가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강박적으로 순수함과 진실함에 집착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마지막 줄을 읽고 난 순간, 콜필드를, 저자를 친구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문명 속에서 예의 바르고 세련된 문화를 영위한다는 사람들이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폭력성, 그것을 목도한 전후세대는 콜필드의 모습에 더욱 깊이 공감했으리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쁨과 감동을 준 책이라는 친구의 메모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통과한 십대시절 우리의 모습을 닮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랬다. 콜필드는 나였다. 자신을 너무 닮은 이는 괜히 싫어지기도 한다. 불편했던 주인공의 태도, 책장이 넘어가면서 그 모습이 언젠가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임을 발견한다. 세상과 자신에게 진실하고 진정하려 했던 마음이 분명 있었다. 너무도 여리고 아팠던 그 마음이 어디쯤에서 잘려나갔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아팠던가. 오랜만에 만난 나였던 그를 만나 인사를 나눈다, 말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너무 오래 잊고 지낸 미안함으로.
Hazy Black Watercolor Paintings of Children with Animal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