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 어린애들은요. 어른이 한 말을 다 진짜로 믿고 받아들여요. 평생 동안 그 말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야. 덩치만 큰 계집애.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몸이 커졌습니다. 웅크리면 조금이라도 작게 보일까 해서 구부정하게 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먼 곳에서 온 노래」(소설집 『쇼코의 미소』 중) p.192.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묶인 삶은 특별하게 바라봐주는 듯한 존재에게 묶이기 쉽다. 러시아로 유학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미진을 도와주면서 율랴는 자기존재를 확인한다. 자기 도움 없이는 무력하기만 한 존재가 필요했고, 그런 존재로만 있기를 바라게 된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 p. 193.
최은영의 단편소설 「먼 곳에서 온 노래」(소설집 『쇼코의 미소』)는 결국 다른 말을 건넨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더 잘해야지, 넌 틀렸어 같은 날카로운 말들 사이로, 그 소나기 같은 말들을 피해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다른 말을 건넨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당신이 고치려고, 감추려고 애써온 약점을 사랑합니다. 그것 때문에 웃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특별하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고 있어서 너무 가슴이 아파요.’
“율랴 당신이 특별하다고 했어요. 당신이 미진을 도와줘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라, 그냥 특별했대요. 당신 같은 사람 본 적없대요. 그녀는 그리고… 그리고 율랴는 그 사실을 모른다고. 그게 마음 아프다고 했어요.”p.207.
빛이 있으라, 말씀으로 창조가 시작되듯, 어떤 말은 내면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지배한다. 언제였는지, 왜인지 기억하지 못해도, 그 말만은 삶의 배경음악이 되고 리듬이 된다. 창밖에 어떤 하늘이 펼쳐지던, 어떤 경이로운 일을 만나던 상관이 없다. 그 모든 장면의 분위기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지휘한다.
그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그 무엇 때문에 특별하게 보는 시선은 잔인한 유혹의 덫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약점까지도 특별하게 보이는 시선만이 구원의 길이다. 빛이 있으라, 창조의 말은 다른 언어로 끊임없이 번역되어 메아리치고 있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당신이 감추려 하는 그 모습까지도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수줍어 건네지 못한 그 말이 바로 흑암과 공허 속에 빛나는 신의 언어다. 이 땅덩어리가 거대한 어둠 속을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듯, 너무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끔 곁에 있는 한 영혼을 통해 수줍게 속삭이고 사라질 뿐이다.
그 영혼이 돌아가고 세월이 흘러 목소리마저 희미해질 때, 길은 하나다. 그 목소리를 되살리는 길은 하나뿐이다. 내 목소리로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길 하나뿐이다. 그 음성이 계시와 부르심의 변주가 아닐까.
“미진, 네가 보고 싶어.” 율랴는 선배 사진을 가슴에 품고 조용히 말했다. “너를 자꾸만 잊어가. 이제 네 모습, 잘 기억나지 않아. 미진.” 나는 선배의 이름을 부르는 율랴를 안았다. 율랴의 몸은 크고 따뜻했다. 그 품에서 나는 율랴를 안아주는 선배를 느꼈다. 율랴, 율랴. 그렇게 가버려서 미안해, 라고 내 몸속에서 율랴를 위로하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p.208.
최은영, 「먼 곳에서 온 노래」(소설집 『쇼코의 미소』 중)를 읽고
Hazy Black Watercolor Paintings of Children with Anim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