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의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수 없다. - P136
‘변화란 무조건 나쁜 것이다‘, 수용소의 격언 중 하나였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경험은 우리에게 모든 예측이 헛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그 어떤 행동도, 그 어떤 말도 미래에 눈곱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데 뭐하러 고통스럽게 앞일을 예측하려 하겠는가? ....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는 게 우리의 지혜였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 P178
우리는 어땠는가 하면, 너무나 지쳐 있어서 진짜 두려움을 느끼지도 못했다. ...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위험과 새로운 불편을 평소와 다름없는무관심으로 참아냈다. 의식적으로 체념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들처럼 감각이 마비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콘크리트 방공호로 들어가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주변을 짙게 에워싼 포연을 뚫고 놀라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부나의 울타리 안에 포함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더러운 불모의 황야까지 몸을 끌고 갔다. 그곳에 도착하고 나면 기운 없이, 마치죽은 사람들처럼, 그러나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일시적으로나마 기쁨을느끼며 몸을 포갠 채 땅에 엎드렸다. 우리는 주변에서 타오르는 불기둥과 연기를 무기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P182
옆으로 바짝 다가온 종말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전율하며 흔들리는 이 세계에서, 새로운 공포와 희망 속에서, 그리고 그 중간중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광포한 노예 생활 속에서, 나는 로렌초를 만났다. 나와 로렌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길면서도 짧고, 평범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이야기다. 그것은 이미 현재의 모든 현실에 의해 지워져버린시간과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로렌초의 이야기가 전설 속이나 먼태곳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건들처럼 그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간단한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민간인 노동자가 여섯달 동안 매일 내게 빵 한 쪽과 자기가 먹고 남은 배급을 갖다주었다. 누덕누덕 기운 자기 스웨터를 선물로 주었다. 나를 위해 이탈리아로 엽서를 보내주었고 내게 답장을 전해주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착하고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보답을 받을 만한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 P184
나와 로렌초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내가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분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 P187
다음 선발 때는 자기 차례가 올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 오늘 벌어졌다는 것을 쿤은 모른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면 쿤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 P1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