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를 키우며 ; 자기만의 자리


새로 이사온 집에 처음으로 사온 화분이 있다. 잎이 풍성한 아름들이 나무를 축소해 놓은 분재 같은 녀석이 반구형 토분에 자리잡고 있다. 아내가 마음에 들어 사오면서 이름을 묻지 않아 이름은 모른다. 신혼 첫 집에서 키웠던 파키라를 죽이고 나서는 한동안 그 아팠던 마음때문에 사지 못했었다. 그 녀석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죽었다. 나중에 누군가의 말을 들어보니, 나무는 오히려 물을 주지 않아야 잘 산단다. 꽃을 피우고 싶으면 물을 주지말라고 한다. 그러면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꽃을 피운다나. 물을 자주 줘야하는 나무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너무 관심을 두고 물을 많이 줘서 죽이게 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깊이 와닿는 얘기였다.


이번에 사온 녀석이 마음에는 들었지만, 그렇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좀 독특했다. 삼, 사일 정도 물을 주지 않으면, 잎이 눈에 띄게 시들어버리고, 놀라서 물을 흠뻑주면 몇 시간 안에 다시 싱싱해져 있는 것이다. 신경초나 식충식물만은 못해도 그렇게 빠르게 반응을 보이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시들었다가 싱싱했다를 반복하면서 그게 힘들었는지 잎이 시들기 시작해서 가을을 맞은 듯이 많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시들었다가 싱싱했다가를 하면서 새잎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엇그제는 정말 죽을 듯이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놀란 마음에 물을 줬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러다가 또 죽이나하는 두려움에 마른 잎을 떼어내고 욕실에 가져가 정말 흡벅 물을 주곤 좋은 자리에 뒀다. 정성 때문인지, 하루가 지나고 나니 조금씩 살아나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가만히 둬도 잘 살아가는 녀석보다는 이렇게 애를 먹이는 녀석에게 정이 많이 든다. 이 녀석과의 경험을 통해서 생명의 신비함과 각각의 생명이 어울려 살아가는 자리에 대한 생각들이 스쳐갔다.


죽어가는 나무는 그냥 땅에 묻어만 줘도 살아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땅과 바람과 하늘이 깊은 병을 치유해주고 살려내는가보다. 자연은 모든 생명을 받아주고 키워주며, 그 생명이 다할 때는 쉼의 자리도 마련해준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긴 녀석이 그냥 땅에서 자라났다면, 분명 아무 문제없이 잘 자라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화분에 심어서 자리를 옮겨놓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이동은 거리 상으로는 별 차이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가 생명을 주검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렇게 거리 상의 작은 차이가 생명의 깊이와 질의 차원에서는 삶과 죽음의 절대적 차이가 되기도 한다.


제각기 다 다른 생명들에게 꼭 알맞는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동물의 똥이나, 어린 아이들이 숲에서 자유롭게 자리잡아 배설할 때는 그 냄새가 퍼지지 않는단다. 이처럼 배설물까지도 자기 자리가 있는 것 같다. 온우주의 만물들이 차지하는 자기만의 자리, 그것이 지켜지고 함께 어울어져 조화를 이루고 , 모두가 한 생명되어 영원을 이뤄가는 것이 아닐까? 이제 다시 살아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풍성한 잎을 돋워낼 모습을 꿈꾸며 설레이는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선 자리가 나의 자리인지, 또 내가 선 자리에 어울리는 나는 누구인지 물어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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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겸허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화초와 나무.
'내가 선 자리에 지금의 나는 어울리는 무엇인지' 자문해보아야겠어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때론 붕붕 떠다니는 건 아닌지 습관처럼 불안이 스칩니다.

물무늬 2004-04-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에 대한 상상, 나무와의 대화는 제게 참 소중한 의미들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요. 저의 사소한 상념들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너무도 소중한 기쁨이 됩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