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코토피아
아스카 후지모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네코는 일본어로 고양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토피아가 붙었다. 그러니까 풀이하면 고양이세계가 될까. 아무튼 독특한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스카는 고양이를 죽이는 게 취미인 열 살짜리 여자아이다. 아스카가 사는 세계는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자문위원회가 다스리는 세계다. 평화적이고 좋은 말들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네 개로 나뉘어 싸움만 하던 세계를 평화롭게 통일한 지도자를 시민들은 찬양했다. 문제는 지도자가 쓴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부터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아스카가 고양이에게 먼저 이름을 붙이고 색다르게 죽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명인들의 이름이 붙은 고양이들의 죽는 방법을 다 알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는 작가의 이력과도 연관성이 있을 듯 하다.


읽다보면 아스카가 고양이를 살해하는 것과 세상이 돌아가는 것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나쁘고 안 좋은 것인지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스카의 고양이처럼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살해당했고 지금도 살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수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세계의 법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돈만 쓰면 되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모은 것이든 간에, 가난한 자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고 이치다. 그런 가운데 아스카에게 당하는 고양이가 무슨 죄냐고 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문이랄 밖에...


아스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만화적 기법을 도입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더 독특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마도 글로 쓴 것과 그림으로 그려진 것을 보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거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달리 생각해보면 좀 공포 분위기가 풍길 것도 같아서 글씨의 변형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고양이를 죽이는 99가지 아스카의 방법보다 더 많이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목숨을 가진 것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 누가 이 작품을 단순히 잔인하고 엽기적이라고 말하겠는가. 이 작품은 아스카를 통해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전혀 달라지지 않고 나아지지 않을 세상을 말이다. 그러니 꿈을 꾸기보다 차라리 달콤한 사탕 하나를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입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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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6-06-0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와 스릴러는 언제 읽으시려고... 최근 님의 리뷰 목록을 함 보세요~! -_-+
안그래도 정통추리는 거의 사라진 마당에... ㅠㅠ

물만두 2006-06-0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제가 가지고 있는 추리와 스릴러물은 품절, 절판된 상태고 정통추리는 안나오고 제가 요즘 안그래도 반성하는 중입니다 ㅠ.ㅠ
별언니 보세요~

토트 2006-06-04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 싶어요. 추천 꾹.^^

물만두 2006-06-0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세요. 아주 독특한 작품입니다^^

느티나무 2006-07-2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애묘인이나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읽기 싫어지는 책이죠.

물만두 2006-07-20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님 그게 이 책의 단점이죠 ㅠ.ㅠ
 

 189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저명한 이론가였던 베른슈타인에 의해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에는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 이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이 글은 바로 그 수정주의를 논박한 대표적인 글이다.
이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관점, 정치적 구상, 사회주의 전망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그 논의의 기초를 허물고자 한다. 그녀는 우선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 발전 전망을 비판한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모순과 위기에 가득 차 있는 체제라고 본다.
다음으로 그녀는 의회와 노동조합 등에 큰 기대를 거는 베른슈타인의 정치 개혁 전략을 비판한다. 의회주의, 민주주의의 역사적인 중요성과 의의를 인정하지만, 의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베른슈타인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는 명백히 반대한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분명히 있지만, 그 활동은 결국 '시지포스의 노동' 같은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늘 혁명을 부르짖으며 몸소 혁명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진정한 혁명가였다. 그는 사회주의를 진전시키고 실현할 주체는 오직 대중뿐이며, 대중이 주도하는 혁명을 통해서만 진정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기조에서 씌어진 이 책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진실한 사회주의를 향한 깊은 열망이 담겨 있다. 과연 우리는 사회주의의 꿈을 여전히 간직해도 되는 것일까. 이 고전적 저작은 이 문제에 대한 일정한 답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유년기에서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적인 면모와 공적인 면모를 따라가면서, 그녀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상세하게 그려낸 전기이다. 간결한 문체, 현재 시제를 구사하면서 저자는 애증이 교차한 연인이며 동지인 레오 요기헤스와의 관계, 여류 동지들인 루이제 카우츠키나 클라라 체트킨과의 우정,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과의 이념 논쟁, 카를 카우츠키와의 친교와 갈등, 레닌과의 교류와 비판 등을 생동감있게 묘사하였다.
저자는 로자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로자가 지하와 주변에만 머무르려는 인간인 레오 요기헤스의 그늘에서 감정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운명을 맞게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또 로자가 당시 모든 식민 국가들처럼 민족 독립과 민주화라는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던 폴란드의 현실을 무시한 채, 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한 국제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이론적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폴란드 사회주의 진영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로 양분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차 대전 직후 '베를린 코뮌'에서 취한 로자의 애매한 선택을 비판한다. 당시 사민당 우파와 결탁한 군부는 사민당 좌파이 혁명으로 붕괴될 위기로까지 내몰린다. 그러나 로자는 명령을 기다리는 수만 명의 군중에게 시민혁명의 길보다는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권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당시 로자가 레닌에 필적할만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개인적인 친분에도 불구하로 로자는 레닌의 관료주의와 공포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레닌주의 대비되는 로자의 사상은 '룩셈부르키즘'이라 부르며 혁명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와 공존, 대중의 의지에 대한 존중으로 요약된다.
이 책은 로자가 경험했던 사랑의 갈등, 그녀의 인간적 고뇌들, 예술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미시적으로 포착해내면서 그녀의 삶은 결코 무자비한 권력 장악이 아닌,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진실과 해방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 책에는 저자의 방대한 시각과 통찰력에 의해 파리 코뮌 이후 1차대전에 이르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역사, 독일의 급속한 제국주의 노선과 저항운동이 펼쳐진다. 그래서 로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유럽 전지역에서 활약했던 걸출한 사회주의 혁명가들과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20세기 최고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누릴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다”

‘자유로운 영혼’, ‘붉은 장미’, ‘혁명의 불꽃’ 등으로 불리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20세기 가장 위대한 혁명가다. 당시 유럽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주의 이론이 퍼져 나가면서 억압받고 차별받던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술렁이고 있었고, 세계 대전이 발발할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무척 혼란스러웠다. 로자는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 국민이었고,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의 여성이었고, 유럽 사회에서도 차별을 받던 유태인이었다. 그리고 평생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주장이 강하고 독립적이며 열정이 넘쳤던 로자는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다. 로자는 평생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등 전 유럽을 오가며 탁월한 글솜씨와 뛰어난 연설로 사회주의 이론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더 살기 좋은 사회, 자유로운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자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혁명을 선동했다.
로자는 평생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는 신념을 붙잡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쓴 강하고 혁명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작은 곤충의 죽음에도 민감하고 감옥 안에 있을 때 오히려 감옥 밖 동지들을 더 챙기는 가슴 따뜻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래서 로자는 자신이 가진 불리한 조건을 비관하지 않고,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이상적인 사회 제도가 아니었고, 사회주의 사회가 유토피아가 아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미 사회주의를 선택해 그 길을 걸어온 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오면서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의 실패가 증명되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 8·사상에 한평생을 바쳤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실패한 이상이나 ?는 실패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가 되새기고 기억해야 하는 인물인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택했지만 자본주의도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빈익빈 부익부, 부의 되물림 등으로 가난하고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서구 선진국에서는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되,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복지 제도를 만들고 강화하는 등 자본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 가고 있지만 그 기본 취지만은 되새길 만하다. 비록 그 이론과 제도 자체는 실패했지만 차별 없는 사회,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도 살아 갈 만한 사회, 그것은 인간이 꿈꾸는 보편적 이상이고, 옳다고 여기는 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 없는 세상,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불꽃같이 열정적으로 산 20세기 진정 위대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신념과 삶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가 본 「영원한 소녀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식민지에서 태어난 똑똑한 소녀 로자 룩셈부르크의 어린 시절, 당시 혼란했던 유럽의 정세,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힘겨웠지만 찬란하게 살았던 로자의 삶,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바친 그녀의 한평생을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글로 실었다. 또한 강철 같은 의지 속에 섬세한 감성을 지닌 휴머니스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인간적인 면모를 사진, 지도 자료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담았다. 그 뒤에는 인명, 용어 풀이를 두어서 실존 인물,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투쟁으로 인해 우리가 꿈꿨던 세상은 현실로 다가왔다. 체 게바라, 말콤 X, 그리고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까지. 책에는 인류를 억누르던 억압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25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남미 정글에서 게릴라 전을 펼쳤던 체 게바라와 세상의 자비를 외치는 달라이 라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저자들은 세상의 억압에 맞서는 혁명가의 모습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역사라는 시계의 추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기울기도 하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 시계 추가 바삐 움직일 때, 그리고 우리가 그 시계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때, 우리는 현기증을 느낀다.
이런 현기증에 부채질을 해대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시계추를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시계추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시계추를 따라 그들의 ‘해석’이 끝없는 부침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진전은 시계추를 보고 해석할 수 없다. 역사가 진전하고 있는지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보지 않은 채 시계추만을 해석하는 게 요즘 무척 유행이다. 시계추를 해석하는 이들이 요즘 만들어낸, 그리고 즐겨 쓰는 말은 ‘노마드’다. 역설적이게도 ‘유목’이나 ‘유랑’을 뜻하는 이 단어만큼 이들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까지, 그리고 엄연히 모나드적이다. 우린 쉽게 유랑하거나 부유할 수 없다. 그만큼 삶과 존재의 무게는 육중하다. 그리고 이런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이렇게 육중한 현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에게 우린 ‘헌사(獻辭)’를 바쳐야 한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지도 모른다. 오직 한길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조롱과 대립, 그리고 폭력적인 반대에 부딪힌 사람들에게 헌사만으로는 웬지 부족하다.
하지만 시계추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헌사에 인색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던졌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준비한 비수를 하나씩 등 뒤에 꽂는다. ‘살인’의 이유는 그들은 결코 ‘유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때로는 상업적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은 시계추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을 시계추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는 건 실례다. 때문에 그들이 ‘해석가’들의 잣대 위에 놓여 마름질 당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리고 우리도 시계추에 고정됐던 눈을 떼고, 역사라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현기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던진 사람들로 인해 역사가 한걸음씩 전진했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Revolutionaries/행복한 시대에는 혁명이 없다
이 책에는 억압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25인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들은 조롱과 대립, 때로는 폭력적인 반대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고, 이러한 정신으로 인해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이들을 온전히 바라보는 방법은 이들을 시계추처럼 보지 말고 시계추를 지렛대로 시침과 분침을 옮겨놓은 이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이념적으로는 좌와 우가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사람도 여럿 있다. 한 시대를 살았지만 부득이하게 총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고 그 수단마저 포기했던 사람도 있다. 민족을 위한다는 똑같은 목표를 가졌지만 그 때문에 독립 포기를 주장했던 사람도 있고 반대로 독립을 지상명령으로 생각했던 사람도 있다.
남미의 정글에서 게랄라전을 펼쳤던 체 게바라와 이국의 땅에서 자비를 말하는 달라이 라마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똑같이 소설을 썼지만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는 인민의 자유라는 이유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열광했으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똑같은 이유로 사회주의에 저항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라는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베트남인들은 사회주의와 자유를 위해 호 치 민이라는 인물을 선택했고, 미얀마인들은 26년간 집권한 사회주의 정부를 끝장내기 위해 아웅 산 수 지를 선택했다.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이지만 공히 그들은 이 ‘영웅’들에게 열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는 일국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똑같이 무력에 호소했다. 양국의 대중은 또 공히 이들의 깃발에 따라 목숨을 걸고 사선에 나섰다.
이들은 과연 시대가 부른 탕아, 혹은 시대가 만들어낸 영웅일 뿐일까? 그렇다면 그 시대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25명 모두 … 행복한 시대에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행복한 시대에는 혁명이 필요 없으니까 … 그리고 혁명가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깐 …
헌사(獻辭)가 모자란 시절/혁명가가 혁명가에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고스란히 25명의 혁명가에게 바치는 헌사다.(단순한 인물의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이 헌사를 쓴 이들은 또 다른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리도 이 혁명가들은 대부분 그들과 친분이 있거나 그들의 전기를 쓰기 위해 혹은 신문기사로 만들어내기 위해 접촉했던 작가나 기자들이다.
말콤 X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그의 전기를 대필하기 위해 여러 차례 말콤 X와 접촉한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방향전환을 경험한다. 말콤 X에게 가졌던 관심은 자연히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로 천착된다. 이를 계기로 알렉스 헤일리는 노예로 처음 잡혀온 쿤타킨테 이래 6대에 걸친 모계(母系)의 내력을 추적한 일생의 역작 『뿌리』를 완성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77년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체 게바라에 대해서 쓴 피델 카스트로는 또 어떤가. 카스트로는 체와 함께 풀켄시오 바티스타 대통령 정권이 점령한 쿠바를 탈환하기 위해 3년간 끈질긴 게릴라전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체와 카스트로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혁명’의 짜릿함을 공유했던 ‘전우’다.
간디에 헌사를 바친 토마스 머튼은 간디만큼 유명한 정치가는 아니다. 하지만 토마스 머튼은 간디보다 더 유명한 종교지도자가 되었다.
에바 페론에 대해 슨 네이폴 역시 에바 페론만큼 유명한 정치인은 아니다. 하지만 제3세계 문학의 기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문학계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그는 200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을 지도했지만 그녀에 대해 헌사를 바친 스티븐 에릭 브로너는 또 다른 세계 혁명을 꿈꾸고 있는 사람이다.
베트남전 종군기자였다가 그곳의 참상을 보고 반전활동가가 된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당시 미국 대통령 케니디로부터 ‘현재 가장 위험한 미국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는 베트남전의 영웅 호 치 민에게 헌사를 바쳤다. 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조이 제임스는 안젤라 데이비스에게, 앙드레 브링크는 넬슨 만델라에게 각각 헌사를 바쳤다. 이들 각자는 모두 ‘혁명가’들이다.
이들 혁명가가 혁명가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들의 투쟁이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었으며 우리는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의 한쪽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헌사의 이유는 충분하다.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지도적 활동가였던 토니 클리프의 저작.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혁명적 천재이자 투사이며 사상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재조명해보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와 함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전통에 있는 핵심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저자는 사회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에 의지해 온 사람들이 범한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줄 명확한 이론적 무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이야기한다. 스탈린주의가 사멸한 지금,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함께 만나보자.

 

 『여성 철학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현재까지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여성 철학자들이 철학사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소개한 철학 입문서이다. 시대 구분에 따라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도입부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철학 사조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활동한 여성 철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연대순으로 소개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지만, 철학사이 중요한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 철학자들의 활약이 다양한 자료와 문헌 연구를 통해 복원되었다. 남성 위주의 철학과 그 밑바닥에 깔린 가부장적 가치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철학사를 제시한다.
1. 개요 및 특징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이 되살아난다.
철학하면 뭔가 딱딱한 강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마리트 룰만의 이 책은 정반대다. 룰만은 이 책에서고대 이래로 정치, 과학, 철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상당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그에 어울리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여성들을 그려내고 있다. 막연하게 그러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여성들이 철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브리기테 Brigitte>
중요한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이 다시 되살아난다. ‘여성 철학자들’이라는 제목은 다소 소박하지만, 이 책은 불손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쥐트 도이체차이퉁 Su?ddeutsche Zeitung>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재까지 철학사의 뒤편에 머물러 있던 여성 철학자들을 발굴해내어, 그들이 철학사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를‘의식적으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소개한 철학 인문서이다. 이를 통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여성적인 철학함에도 오랜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테아노와 히파티아, 레온티온과 라이스, 하케보른의 메히트힐트와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 이소타 노가롤라와 라우라 체레타, 안나 마리아 폰 슈르만과 마리 르 자르 드 구르네, 올림프 드 구주와 해리엇 테일러­밀, 클레르 데마와 메리 아스텔 등등. 왜 우리는 이들의 이름과 작품을 철학사에서 보지 못하는가? 최근 몇 십 년간 많은 변화와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철학사의 대부분의 시대에 여성은 철학의 주체로서도, 철학의 대상으로서도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다. 여러 저명한 철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종류의 철학사가 집필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말해지고, 쓰이지 않은 역사는 정녕 역사가 아닌가? 여성 철학자들의 활약과 업적은 지금껏 역사가 되지 못한 채 시간 속에 흩어져 있었다. 마리트 룰만 등 8명의 저자는 이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그들이 본래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찾아주고 있다.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의 철학적 성취와 잘못된 서술들의 목록을 열거하자면 한참 이어질 것이다. 그 목록은 아스파시아가 기초를 만든 ‘소크라테스적’인 대화법에서 시작해 라이프니츠가 발표한 단자론의 진정한 뿌리인 앤 콘웨이를 거쳐, 몽테뉴의 『수상록』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최초의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에세이를 쓴 아빌라의 테레사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처럼 이 책은 남성 중심의 철학사에서 배제되고 왜곡되어온 여성 철학자들을 찾아내어 여성적인 주제의 추가라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는 철학과 그 바탕에 깔린 가부장적인 가치와 규범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들어가는 말〉과 함께 시대 구분에 따라 총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도입부에서는 시대별 사회상과 그 위에서 발전한 철학 사조들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지고, 이어 그 사조들과 더불어 혹은 그 안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성 철학자들의 삶과 업적이 연대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철학사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 철학자들의 활약이 다양한 자료 조사와 문헌 연구를 통해 치밀하게 복원되었다. 이로써 철학사의 이음매가 보다 촘촘하고, 단단해진 것이다.
2. 출간 의의
철학사의 잃어버린 성취들에 대한 치밀한 복원
철학(philosophy)의 어원은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이다. 고대의 문헌 속에서 전쟁과 지식, 기술을 관장하던 지혜의 덕목은 여신(女神)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고고학의 다양한 발굴 성과들은 모계 혹은 모권 사회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결여체(缺如體)이자 “훼손된 남성”이라 여기며 그들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은 글을 읽고, 쓰고, 토론하는 등의 일에는 적합하지 않은 존재이고, 여성적인 것은 모두 무질서하고, 본능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재능 있는 여성들이 그 재능을 억누르거나 안락하고 평온한 삶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했다.
『여성 철학자』는 철학사의 전개에서 뚜렷한 기여를 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망각되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진 이들을 발굴해 내고, 복권시켜 주려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철학사를 읽다보면 여성 철학자들은 마치 20세기 이후에나 등장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우리가 철학이라는 말과 더불어 떠올릴 수 있는 여성이라고는 고작 한나 아렌트, 줄리아 크리스테바, 시몬 드 보부아르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묶여 나오고도 한참이나 모자랄 만큼 역사 속에는 수많은 여성 철학자들이 존재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반쪽짜리 철학사를 읽어왔던 것이다. 이 책은 그 숨겨진 반쪽에서 역사의 두꺼운 먼지를 털어내고, 하나의 철학사를 향해 가는 길목으로서의 ‘또 하나의 철학사’를 제시한다. 온갖 차별과 모욕을 감수하며, 철학적 사유와 함께 정체성의 고민도 놓지 않아야 했던 이 잊혀진 이름들을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불러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의 철학을 하는 여성들은 이미 역사를 쓸 수 있는 펜을 쥐고 있다. 학문의 세계에도 여전히 성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행스럽게도 펜조차 빼앗아버리는 시대는 지나갔다. 여성들도 이제 그들의 역사를 쓸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을 포함하는 ‘역사(History)'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 여성 철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이 책이 담지 못한 철학사의 또 다른 일면이 우리의 철학계와 여성학계에, 나아가 학문 전반에 미뤄오기만 했던 어떤 의무를 상기시켜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3. 왜 ‘여성 철학사’가 아니고 ‘여성 철학자’인가?
왜 저자들은 이 책의 제목을 ‘여성 철학사’라고 하지 않고 ‘여성 철학자들(Philosophinnen)’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사실 이 질문은 번역을 끝낸 뒤에 억지로 만들어낸 물음이 아니다. 1996년 가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취재하러 갔다가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에서 철학 코너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처음 본 순간 무의식중에 들었던 느낌이 그것이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랄까, 혹은 딱딱한 오만과 편견의 껍질이 깨지는 느낌이 이럴까? ……
이 책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또 하나의 철학사’가 있다, 혹은 있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여성 철학자들’이라는 제목 하나만으로 이미 강력하게 일깨워주었다. 정체성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그때까지 내 머리(아니 가슴) 속에 ‘여성’은 전혀 없었고 정체성 정립의 차원에서 여성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물론 처음에는 호기심도 있었고, 여성 철학사가 되지 못하고 그저 한 덩어리로 모아놓았을 뿐이라는 인상을 주는 ‘여성 철학자들’이라는 말에서 안쓰러움, 아니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물론 ‘여성 철학사’란 제목의 책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용 자체에서 본다면 ‘여성 철학사’보다는 ‘여성 철학자들’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좀더 적나라하게 실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철학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가족이 1874년에 이사를 간...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로자 룩셈부르크는 탁월한 언변을 가진 여성... 무참하게 살해된다. 감옥에 있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민당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신체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부 파시즘의 시대는 끝났는가? 감히 그렇다. 그렇다면 1990년대의 민주화와 군부 파시즘의 역사적 종말은, 파시즘의 역사적 청산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지난 해 『우리 안의 파시즘』을 통해 도발적으로 제기된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입론을 좀더 심화ㆍ발전시킨 글들을 주축으로, 권력의 합리화란 또 다른 이면을 가진 민주화라는 부분과,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민족주의 억압성, 해방의 역사학에 내장된 수많은 억압기제 등 역사학자로서의 오랜 고민과 성찰들을 논문을 비롯 자유로운 형식의 에세이와 작은 칼럼들로 엮었다.
저자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우리안의 파시즘』 등으로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교수.
거대담론들에 가려 쉽게 묻혀 버렸던 우리안의 파시즘적 요소와 일상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폭력적 규범들을 오히려 인간을 해방시켜야 할 이념들이 그 근거가 되어주고 있음을 여전히 날카로운 시각으로 짚어냈다.
일상적 파시즘과 합의 독재, 민족 해방과 민중 동원, 인간의 이념 이념의 인간 등 총 4부로 구성해 이념의 속살을 드러내며, 제도나 체제로서의 파시즘은 정치 무대에서 종말을 고했지만, 은폐된 억압 구조로서의 파시즘은 일상 속에 살아 있으며, 따라서 "파시즘의 억압 기제를 청산하는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권력의 음산한 힘 앞에 선 이념의 찬연한 빛은 불 앞의 얼음이다. 해방의 이념을 굳게 견지하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법과 제도, 경제 체제를 바꾸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순진한 것이었다. 끝난줄 알았던 구체제는 밑바닥에서 '혁명 후 사회'를 움직이는 결이었다. 이제 근대의 담 밖에서 근대를 성찰하는 계기를 가질 때, 근대적 과제를 수행해 나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탈근대의 문제의식을 급진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근대의 해방 이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하자는 것이다 '이념의 속살'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이 주는 인상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인간 로자 룩셈부르크를 드러낸다. 그리고 여기 한국어로 번역된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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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6-03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반갑네요.

물만두 2006-06-0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저는 처음 듣는 분이라 찾아보고 알았어요...

건우와 연우 2006-06-0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못 읽은 책은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감사. 잘 읽을께요.

물만두 2006-06-0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연우님 이 분 좋아하시는군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문학이 가능한가. 대량 학살을 예술화하는 것은 정당한가. 문학 연구는 역사와 이데올로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수용소 문제를 두고 다시금 서구에서 역사적, 미학적, 문학적 논쟁들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 인류를 충격에 빠뜨린 유대인 학살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미학적 형식화를 시도하려는 입장과 그것을 사실 차원으로 보존하려는 기존의 입장이 그 어느 때보다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예술은 존재한다고 보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다방면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유대인 학살 문제는 우리와는 동떨어진 듯한 문제로 보이지만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예술 전반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와도 멀지 않은 문제임을 인식시키는 것도 이 책의 목적이다.제1장 "글쓰기를 통한 역사에의 질문"에서 저자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어떤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쓸 수 있을까를 묻는다. 바로 여기에서 생존자들이 들려주는 '체험담'의 고전적 문제와, 전례 없는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술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이 대두된다고 본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이 대학살이라는 소재를 결코 다루어본 적이 없었던 까닭에, 아우슈비츠는 인간, 그리고 역사를 재현함에 있어 유례없는 단절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쇼아(Shoah,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말)는 예술 형식에 대해서 매우 본질적인 의혹을 제기하고, 과거 역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예술계의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제2장에서는 수용소 문학의 연구 현황과,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엘리 위젤, 프리모 레비, 로맹 가리, 솔제니친 등, '수용소의 증인들'이라 할 만한 작가와 수용소를 문학의 허구적 소재로 다루는 작가들을 대별하여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수용소에 대한 문학적 해석을 둘러싼 텍스트 내외적인 문제들도 살펴보며, 결론적으로 수용소 문학에 대한 모든 관심은 전례 없는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와 어조를 찾아내고, 미래를 향한 전망을 시도하는 문학 자체의 성실한 노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영화 분석을 통해 증언을 현재화하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를 심도 있게 논한다. 이 영화는 한국에도 인권사랑방 등을 통해 소개되어 여러 분야 예술인들의 호응을 끌어낸 바 있는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실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당시의 학살 현장을 증언하는 형식을 담고 있다. 현재 이 영화는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가 보여주는 미학적 상상력과는 달리, 실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감독과 유대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미학적 또는 문학적 입장을 중시하는 입장에 매우 불편한 작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역사, 이데올로기, 정치와 예술 사이의 관계가 제기하는 근본적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란츠만의 시도는 두고두고 높이 평가받는다.
제4장에서는 유대인, 유대교, 유대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나치로 하여금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 학살을 가능하게 한 배경과 인종주의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이해를 시도하는 까닭은 유대인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수용되고 거론되는 유대 문제에 대한 관점들을 교차 비교해봄으로써 총체적 조망이 가능해지리라 기대한다. - 엘리 위젤, 프리모 레비, 로맹 가리, 솔제니친 등, '수용소의 증인들'이라 할 만한 작가와 수용소를 문학의 허구적...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
런던·광주·카셀·브뤼셀·오스나브뤼크·잘츠부르크·파리에서
뿌리 없는 자들의 흔적을 만나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 분할과 식민지 쟁탈전 이후, 전 세계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은 채 태어나 자란 땅을 뒤로 했을까. 더욱이 그들 디아스포라들은 옮겨간 땅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다. (……) 이 글은 ‘나’라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려 한 시도다. 디아스포라라는 존재가 근대 특유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아스포라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대문자로 쓰면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 민족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 노예해방 이후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등장한 중국인 노동자들(쿨리),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이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 등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와 땅을 떠나도록 강요당한 사람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이들 디아스포라 탄생의 배경에는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대전,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등의 근대 역사가 놓여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국민국가라는 견고한 틀 안에 갇혀 이러한 역사의 총체를 사유하지 못하고 현상의 단편만을 본다면 근대의 억압적 정치체제를 강화해 계속해서 뿌리 없는 인간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어떤 종류의 지배와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소수자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 진정한 모습을 보기 위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가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바라본 예술·인간·시대
서경식은 일제시대 철도건설 노동자로 일본에 건너간 할아버지 대부터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이다. 본명을 사용하며 교토의 조선인 밀집지역에서 자라난 그는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차별과 억압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저항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력에 눈을 떴고, 저항적 민족의식을 키웠다. 하지만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에 참여하고자 염원하며 한국으로 유학을 온 그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은 ‘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19년, 17년의 옥고를 치렀다. 서경식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던 꿈이 좌절된 그 순간부터 형들의 옥바라지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오랜 세월을 방황하며 흘려보내야 했다.
그의 글이 소수자만이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진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들 때문이다. 한 사회에서 소수자로 산다는 것, 과거에 자기 민족을 지배한 자의 언어를 모어로 삼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은 왜 남들과 다른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런 불안하고 예민한 정체성을 그는 ‘디아스포라’적이라고 부른다. 그가 여행길에서 만난 다양한 예술작품들, 사람들, 장소들은 이렇듯 불안하지만 예리한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인 윤이상,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 슈테판 츠바이크뿐 아니라 조양규, 니키 리, 데이비드 강, 시린 네샤트, 자리나 빔지 등 낯선 디아스포라들의 일화는 예술과 인간과 시대에 대한 가려진 진실들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 미국 아카데미에서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이 수입되면서부터다. 그 사이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등 다양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논의가 소개되기는 했지만,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흡수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그렇게 수입된 언어들은 우리의 경험을 담아내고 성찰하기에는 너무 아카데믹했다.
하지만 서경식의 글은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시작해 결코 난해하거나 현란하지 않은 언어로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의의를 근대의 정치체제와 연관해 해명한다. 이는 민족분단으로 인한 이산이나 해외입양의 문제를 근대의 억압적 정치체제와 연관해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우리 사회에서 시사점이 크다.
재일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스탈린 시대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구소련의 고려인(카레이스키), 오늘날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코리언 아메리칸, 1960년대 당시의 서독 정부가 받아들인 이주노동자의 자손으로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수만 명의 코리언,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추진해온 국제 입양의 결과 현재 20만 명이 넘는 코리언 입양자들. 이 전부를 합한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수는 대략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코리언 디아스포라들을 ‘우리’라는 틀 바깥으로 밀어내며 이루어지는 민족의 역사는 그것이 아무 저항적인 것이라 해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를 사유한다는 것은 근대가 낳은 전 세계 디아스포라들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그러한 이해를 전제로 민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편적 해방을 향한 열망으로 계승하면서,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방향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공허한 상호 비판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힌 대로 이 글은 정치·사회·사상·문학·예술 등 종래의 장르 구분을 넘어선다. ‘디아스포라’라는 주제 자체가 종래의 사고나 담론의 틀에 고분고분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소수자의 경험과 보편적 언어 사이, 또 다양한 장르들 사이, 또 암울한 현실인식과 강렬한 희망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욕망에 기대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인 윤이상,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 슈테판 츠바이크뿐 아니라 조양규, 니키 리, 데이비드 강,...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1990년대의 일본 사회를 회고할 때 이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까?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가 증인으로 출현한 이 시대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라는 마이너스의 역사를 청산하고 동아시아의 각 민족과 진정한 화해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일본에 있어 '증언의 시대'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동시에 '반동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도록 일본 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 배타적인 국가주의의 흐름이 지금처럼 노골화 되지 않았고, 반동적인 강한 상황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신 가이드라인 관련법(1999)은 매우 큰 전환점이었고, 미국의 9.11 사건이 있은 직후 곧 만들어진 '테러대책특별조치법'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현재 악화 일로에 있다. '괴선박' 격침사건에 대해 거의 어처구니없게 현실로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현실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일본 자본주의가 '번영'을 구가한 1980년대, 일본에서는 무르익은 소비 문화 속에서 현실 긍정 기분이 만연하였고, 사회적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낡아빠진 것이며 촌스럽고 볼품없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안락한 생활에 의문을 제기하는 불쾌하고 '시끄러운' 것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일본 사회에 대한 서로 바라본 관점이 다른 두 사람의 대담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고, 이것이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어떻게 부추기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 서경식씨가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에게 이끌렸던 이유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으나, 그 “참담한 기억의 망각”에...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문학에 반영된 망각을 조명하고 그 의미를 문화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책. 저자 하랄트 바인리히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망각이라는 현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여러 작가의 작품들이다. 이 책에 따르면, 문명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망각의 대가였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역사에 반영된 ‘망각’에 관한 방대한 문화사
“그 일은 깨끗이 잊어버려” “그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거 잊어버리지 마”, 우리가 평상시에 자주 주고받는 말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망각과 일상적으로 마주치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망각이 삶에 얼마나 큰 힘을 미치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망각론이란 있을 수 없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에 자극을 받아 이 책을 쓰기 시작한 바인리히는 기억술, 기억론이 있다면 망각론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특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망각이라는 현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에 주목한다. 호메로스, 단테, 괴테, 프루스트 등은 문학작품에서 망각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플라톤, 니체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반영된 망각은 어떤 의미로 읽을 수 있을까? 문명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인물들이 전하는, 망각에 얽힌 일화와 망각의 기술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 책에서는 망각을 다루는 기술은 물론, 그에 대한 비판의 문제를 문학작품과 역사 속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논의함으로써, 망각의 강 레테에 관한 총체적인 문화적 지형도를 완성시켰다.
국내에는 최초로 소개되는 저자 하랄트 바인리히는 오늘날 독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명망 높은 인문학자로 독문학, 불문학, 언어학뿐만 아니라 학제간 연구,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연구의 깊이와 관심의 폭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 해결할 수 없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화학적 주제를 폭넓은 시각으로 아우르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책은 1997년 독일에서 출간되었을 당시부터 크게 주목받았으며, 이미 미국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헝가리 등에서도 번역을 서두르고 있다.
왜 망각인가?
21세기 정보홍수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책이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각종 매체에서 시시각각 쏟아내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도서관이나 컴퓨터를 통한 기억?저장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정보와 지식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정보를 섭렵하고 기억해야 하는가. 여기서 바인리히는 “이성에 근거한 정보 거부 능력”을 갖춘 ‘망각의 기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지금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훌륭한 기억력이라기보다는 정당한 망각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망각의 대가들과 그들의 문학작품이나 철학사상 혹은 삶 자체에서 발견해낸 망각의 사례들은 흥미로움과 성찰의 계기를 동시에 제공할 것이다. - 망각과 벌이는 투쟁 -프리모 레비

 탄광 속 카나리아의 노래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으로 잘 알려진 재일조선지식인 서경식이 90년대 중반부터 발표한 시론·시평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기존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글들이 모두 예술비평, 기행문, 성장기 등 에세이로 분류될 수 있는 글들이었던 데 반해 이번에 소개되는 글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재일조선인의 역사, 민족주의와 국민주의, 일본 우경화 문제 등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정리한 글들이다. 지난 10년 동안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정치적·역사적·철학적 사유와 성찰의 궤적을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1부는 본격적인 시론과 시평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의 정치적 관점·윤리적 감수성의 뿌리를 보여주는 짤막하고 강렬한 에세이들을 모았다. 2부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과 역사,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다루는 글들로 구성된다. 이는 일본 우경화 문제, 근대 정치 체제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 3부는 국민국가·근대 정치의 폭력에 희생당하거나 그에 맞서 싸우다 간 사람들에 대한 추도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탄광 속 카나리아’와도 같은 절실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근대 국민국가 너머의 진정한 ‘조국’을 노래한다. 저자에게 조국이란 국경이나 혈통, 문화에 의해 특정한 집단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별과 지배를 함께 극복해낸 자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뜻한다. 따라서 이는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냉전체제에 희생된 채 오늘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성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경험과 사유를 일치시키려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몸부림
저자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이다. 본명을 사용하며 교토의 조선인 밀집 지역에서 자라난 그는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그의 형제들은 저항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식민주의의 폭력에 눈을 떴고, 저항적 민족의식을 키웠다. 60년대 말 와세다 대학의 프랑스문학과에 입학해서도 정통 문학보다는 폴 니장이나 프란츠 파농과 같은 반제국주의 사상가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배우고 익힌 것으로 조국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열망했다. 하지만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를 염원하며 한국으로 유학 온 그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은 ‘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19년, 17년의 옥고를 치렀다. 서경식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던 꿈이 좌절된 그 순간부터 형들의 옥바라지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오랜 세월을 방황해야 했다.
그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포스트 식민주의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였다. 사이드는 지식을 전문화하고 상품화하는 학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에 맞서 건강한 지성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이드의 말을 거울삼아, 서경식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는 글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의 활동은 단순히 저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의 강의, 대중 강연, 대담, NGO 활동 등으로 폭넓게 이어져왔다.
재일 지식인 중에서도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한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에세이스트로서 그가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들은 모두 재일조선인들의 질곡에 찬 역사와 불가분의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식민지배, 고향상실과 이산, 민족분단, 차별과 소외 등 근대 역사를 관통해 이들에게 가해진 고난의 경험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의 고민은 항상 삶과 밀착해 있고 또 그의 분노와 고통과 슬픔은 더 날카로운 역사적 인식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기에, 그의 글은 전문적 용어를 남용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의 사유는 결코 난해한 추상적 논리의 미로에서 헤매지 않고, 거꾸로 그의 슬픔은 결코 개인적 감상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다소 낯선 소수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그의 글이 많은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사라져가는 시대, 역사적 책임과 소명을 망각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려는 다수자들이 지식의 영역을 장악해버린 시대에, 서경식이라는 이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사유와 성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수자들의 시선이 놓칠 수밖에 없는 맹점들을 추방당한 자의 눈은 지극히 예리하게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 그 역사와 정체성
저자의 정의를 따르자면 재일조선인이란,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결과, 구(舊)식민종주국인 일본의 영역에 남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들”이다. 스스로 선택한 이민이 아니라 식민지배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바로 자기 민족을 억압하고 지배했던 구종주국에 살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요건이 중요하다. 저자가 굳이 ‘조선인’이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이유는 “부모님이 그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하셨기 때문이고 또 일본인들이 그 말을 가장 차별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1910년 일본의 조선 ‘병합’과 그후 계속된 가혹한 식민지배 정책,1945년의 8·15해방,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3년 이후 한반도의 분단체제,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이어진 ‘북조선 귀국운동’,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협정과 협정반대운동, 1980년대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외국인등록증 안의) 지문날인 반대운동, 1980년대 중반 일본이 유엔난민조약을 비준하면서 개정된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등의 상황과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이들 재일조선인들은 제멋대로 국적을 부여하기도 하고 박탈하기도 했던 일본이라는 국가의 횡포에 농락당했을 뿐 아니라 그와 공모해 식민지배의 책임을 모호하게 처리한 한국 정권들에 의해서도 고통받았다. 가령 1970년대에는 모국으로 유학을 온 많은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민주화투쟁이나 통일운동에 관여했다가 군사정권에 의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저자의 형들인 서준식과 서승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저자가 재일조선인이 일본의 것이든 조국의 것이든 모든 국가주의의 폭력에 대해 가장 예민할 수 있는 존재라고 단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2부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새로운 민족관을 찾아서」, 「반난민의 위치에서 보이는 것들」 참조)
재일동포들 중 가장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조선인들조차도 아직까지 일본으로 ‘귀국’하는 데 일본당국의 재입국허가가 필요하다. 이때까지 한번도 선거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들은 국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국민이 아니라 차라리 난민이다. 이들이 불만을 제기하면 일본 사회에서는 ‘싫으면 나가라’고 대꾸하고 조국인 한국에서는 이들에게 ‘외국분인데도 우리말을 잘하시네요’라고 칭찬한다. 처음으로 조국에서 생활하게 되어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한국에서는, 주민등록번호가 없고 호적등본을 뗄 수 없다는 이유로 신용카드나 핸드폰을 만들 수도 없고 일본에서 부친 짐조차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얼마 전 혼혈 출신 수퍼볼 스타 하인즈 워드가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을 찾아 온 사회가 떠들썩했다. 국회의원들까지 여야가 힘을 합해 ‘혼혈인차별방지법’안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워드에게는 ‘서울 명예시민증’이라는 것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인종차별과 순혈주의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이 나라가 추방한 모든 난민들, 반난민들을 다시 국민으로 시민으로 편입시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오히려 이들 난민들의 존재양태 자체를 이해하고 긍정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정치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렇듯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우리 역사의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을 이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너무도 부족하다. 가령 ‘이진우’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1959년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강간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한 재일조선인이다. 조선인부락의 허름한 판잣집 출신으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일과 공부를 병행했던 이 청년은 별다른 물증과 증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절도 경력 2회(자전거를 팔아 책을 샀다고 한다), 여섯 군데 도서관에서 수십 권의 책을 훔친 전과 경력 때문에 유죄를 확정받았다. 또 정신감정 등의 조사에서 유난히 높은 지능지수가 나와 책임능력에 결함이 없다며 정상 참작도 되지 않았다. 체격이 좋았던 조건도 성인 기준의 엄격한 형 집행을 하는 빌미가 되었다. 몇 차례 졸속 심리를 거쳐 사형이 확정된 후에는 이례적인 속도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진우라는 이 이름은 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 식민주의가 해방 이후의 일본에서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이미지이자 표상이다.(2부 「괴물의 그림자」 참조)
끝나지 않은 식민주의, 일본 사회의 우경화 비판
최근 일본이 테러 예방을 빌미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의 지문 채취 및 사진 촬영을 의무화하기로 해 우려를 낳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지난 10년간 일본 사회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이런 우려할 만한 상황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의 우경화는 예상을뛰어넘어 진전되었다. 1990년대의 일본은 전 ‘위안부’를 비롯한 아시아의 전쟁피해자들과 대면했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이를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민족들과의 진정한 화해로 접어들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1996년 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된 후 일본은 교육기본법을 개정해 국가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헌법 제9조를 개정해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변모하고 있다.
이 위험한 움직임에 대해서, 일본사회의 아카데미즘, 매스미디어, 시민운동 등은 이렇다 할 제동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대응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우경화의 견제 세력으로 일정한 기능을 담당했던 시민파 자유주의 세력은 내셔널리즘적 정서, 자기중심주의, 냉소주의의 경향이 강해졌다. 그 배경에는 냉전구조가 붕괴되고 시장경제의 전지구화가 진행됨으로써 그들 다수가 이념의 좌표축을 상실해 버렸다고 하는 현실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한편으로 확실히 최근 들어 재일동포들에 대한 직접적인 차별의 기제들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고, 재일동포들 중에서도 일본 귀화자가 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다문화 공생론’(혈통에 얽매이지 않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자는 논의)이나 ‘시민사회적 재일론’(일본인이나 재일동포나 모두 시민사회의 일원이라는 입장에서 공생을 호소하는 입장)이라는 논의가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대두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무시하고 생활감각으로부터 떨어진 ‘관념적인 조국지향’이 재일조선인 사회의 미래상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일본 사회와의 공생을 방해해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저자는 재일조선인 해방의 문제가 다른 이문화 집단 사이의 ‘공생’의 문제이기 이전에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문제임을 명확히 한다.
일본 사회는 여전히 정치인들이 전 위안부들의 소송에 대해 ‘돈 때문이다’, ‘나가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일본 학생들은 식민지시기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잃어버린 채 ‘더이상 조선인, 중국인들에게 사과하는 건 넌덜머리가 난다’고 말한다. 또 조선인들에 대한 직접적 차별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무섭다’, ‘감정적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일본의 과거를 추궁하는 것은 사실 돈이 목적이다’ 등 새로운 형태의 편견이 자라고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아직 식민주의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진정한 ‘공생’이란 기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부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희망에 대하여」, 「역사와 시」, 2부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저울질하지 말라」참조)
민족주의·국민주의에 대한 동시대 담론들을 넘어서
저자는 1990년대 일본 사회에서 동시에 나타난 두 가지 경향을 주목한다. 한편으로 ‘국가’·‘국민’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려는 전형적 내셔널리즘이 복권되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상상된 것,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국가주의·국민주의 비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원칙적으로는 ‘국가’·‘국민’의 자명성을 해체하려는 후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이런 논의가 갖는 문제점은 그것이 다음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전혀 고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국가, 국민의 책임을 고민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잘못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편적 해방을 향한 열망으로 계승하면서,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넘어서야 한다는 방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방향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공허한 상호 비판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디아스포라들
『디아스포라 기행』에 이어 이 책에서도 수많은 디아스포라의 삶과 죽음이 기억되고 애도된다. 특히 이 책의 3부는 윤이상, 프리모 레비, 펠릭스 누스바움, 파울 첼란, 카임 수틴,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가주의의 폭력과 싸우다 스러져간 이들에대한 추도로 구성되어 있다. 또 이 책의 1부 「방황하는 노파」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난민성을 살려 세상을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즐거운 상상과 함께 펼쳐지기도 한다.
그가 규정하는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정착할 땅을 잃고 방황하는 유대인을 의미하지 않고, 또 모든 이산 민족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가 보장하는 안락함, 그것이 아무리 기만적이고 허황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약속에서 배제된 모든 자들이 디아스포라라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허구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내부의 추방당한 자들이야말로 디아스포라다.
그런 점에서 그가 우크라이나의 봄즈(노숙자들)를 찍은 미하일로프의 사진에서, 또 총살당하기 직전 시신이 가득히 쌓인 구덩이 위에서 옷이 벗겨진 채 사진 찍힌 유대인 일가의 모습에서 디아스포라의 원형을 보는 것은 우연이나 오류가 아니다.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그려 보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온몸이 불타는 듯한 수치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렬한 수치의 감각이 바로 소수자, 추방당한 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윤리적 감수성의 원천임을 보여준다.
- 삶과 죽음이 기억되고 애도된다. 특히 이 책의 3부는 윤이상, 프리모 레비, 펠릭스 누스바움, 파울 첼란, 카임 수틴,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가주의의 폭력과...

 『해바라기』는 저자 시몬 비젠탈이 자신이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사건을 서술하며 책의 뒷부분에서 독자들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하며 묻는 회고록이다. 1976년에 출간되었으며, 토론거리가 많은 작품이라 널리 교재로 사용되었다.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나치스 친위대원을 '용서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하는 저자의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은 다양했다.
이 책은 원작 『해바라기』와 비젠탈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엮은 것이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1부는 1997년에 개정 출판된 원작의 번역본이 수록되어 있다. 2부에서는 저자의 질문에 대해 달라이 라마를 비롯, 전세계 각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저명인사들의 답변을 싣고 있다.
남민전 사건으로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홍세화,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윤미향, 광주민중항쟁 당시 한 쪽 눈을 잃고 지금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김태헌 등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의 비극 속에서 고통 받았거나, 고통의 연장선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함께 다루고 있다.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에 따른 전 세계 각계 저명인사들의 답변은, 지은이가 던지는 질문이 단지 과거사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0년 전 저자가 던진 화두는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해바라기>의 출간 의의
광복 60주년의 화두 ‘용서’와 ‘화해’를 담아낸 책!
정부는 2005년 2월 2일, 총리실 산하에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범국민 축제분위기 조성과 국민 대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50여 가지 국제교류 및 문화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만든 위원회다.
1995년의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이 ‘역사 바로세우기’였다면, 60주년 기념사업은 미래에 초점을 둔 것으로, 지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 속에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용서와 화해’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명확히 한 조치다.
이 책 <해바라기>는 바로 이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삼아, 역사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에 대해 우리들에게 ‘용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역사 속 사건에 대한 현재 우리의 태도를 되새겨 보도록 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2.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 속 사실들에 대해 우리의 자세를 묻는 책!
<해바라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갇혀 있던 지은이(유대인)가 겪었던 경험(SS대원이 자기에게 용서를 구한 일)을 적고 있다. 또 2부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비롯, 전세계 각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저명인사들에게 지은이의 경험(1부)을 보여주면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물어, 그들이 답한 내용을 싣고 있다.
책에는 나치의 폭력에 희생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아래에서 희생을 강요당했던 일은 물론이려니와, 60~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희생, 그리고 가깝게는 지금 드라마로 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는 5공화국의 탄생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종족말살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유대인들 못지않은 큰 희생을 강요당했음에도 우리는 아직 그 어느 가해자로부터도 정직한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사과는커녕 일본의 경우 오히려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침략과 침탈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해바라기>는 정부가 발전적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광복 60주년의 화두로 내세운 ‘용서’와 ‘화해’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3. ‘홍세화’ 등 우리 역사의 피해자들이 직접 의견을 피력한 책!
<해바라기>는 미국을 비롯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도 출간되었는데, 모두 조금씩 다른 것이 특징이다. 책을 펴내면서 각 나라의 유명 인사들로부터 새로운 글(용서와 화해에 대한 의견)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치의 탄압으로 인한 유대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 보스니아 인종 학살 사건 등에 대한 유명 인사들의 ‘용서’에 대한 견해를 싣고 있다.
국내 판에서는 남민전 사건으로 오랫동안 프랑스 망명생활을 했던 홍세화,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며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사무총장, 광주민중항쟁 당시 총에 맞아 한쪽 눈을 잃고 지금도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김태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 등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고난을 겪었거나, 지금도 고난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은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 그들의 현재의 생각을 함께 담아냈다.
직,간접적인 피해를 당한 이들이 ‘우리 역사 속 가해자들을 용서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피력한 각자의 생각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원천적인 ‘용서’와 ‘화해’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4. 미국에서 30여 년간 논술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책!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에 따른 전 세계 각계 저명인사들의 답변은, 지은이가 던지는 질문이 단지 과거사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는 이 책은 정의와 동정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지난 76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논술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중,고교는 물론 대학에서까지 토론 수업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해바라기>는 미국에서 97년에 개정출판된 것을 번역본으로 삼았다.
5. <해바라기>의 내용
■ 1부의 내용
제2차 세계대전 중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 시몬 비젠탈은 어느 날 나치 군인들이 부상을 당해 후송되는 이동병원으로 강제노동을 나가는 도중 나치 군인 묘지 위에 한 그루씩 피어난 해바라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밝은 해바라기 꽃 위를 옮겨 다니는 나비는 무덤 속에 있는 나치 군인들에게 세상의 소식을 전해 주는 전령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막한 자신의 무덤 위에는 해바라기도 없고, 나비도 날아들지 않아 세상과 단절될 것이라며 죽은 군인들을 부러워하는 지은이는 언젠가 다시 한 번 해바라기를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해바라기는 지은이의 마음속에 이미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동병원에 도착한 비젠탈은 한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죽어가는 어느 SS(나치스 친위대)대원의 병상 앞에 서게 된다. 젊은 SS대원은 난생 처음 보는 유대인에게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참회한다. 부상을 당해 하루하루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범한 그 끔찍한 범죄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이 사실을 유대인에게 털어놓음으로써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용서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를 동정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지은이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지은이의 마음속에서는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한 것일까?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비젠탈은 책을 읽는 독자에게 자기 마음속 질문, 즉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며 우리에게 질문을 넘긴다.
■ 2부의 내용
<해바라기>의 2부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계 저명인사들이 비젠탈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는 달라이 라마, 해럴드 S. 커슈너 등 세계적인 종교인, 고도산업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이른바 신좌파에 지대한 영향력을 준 허버트 마르쿠제 등 저명한 철학자들의 의견이 실려 있다.
또 영화 ‘킬링 필드’의 실제 주인공인 디트 프란,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19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해리 우 등,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캄보디아 등지에서 벌어진 또 다른 대학살의 생존자들의 ‘용서’에 대한 의견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홍세화, 김태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 등 우리 시대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피력한 우리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함께 실었다.
- 프리모 레비(Priomo Levi) [작가, 이탈리아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후 500여 년 간 인류가 축적해온 근대적 지식의 발견의 순간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책. 익히 들어 익숙한 뉴튼, 갈릴레이, 아인슈타인, 퀴리 부부의 연구기록 뿐 아니라 리처드 파인만, 칼 세이건 등 총 102개 인간 근원의 지식 발견의 순간들이 담겼다. 천재 과학자들이 그네들의 지식 발견의 첫 순간을 직접 기록한, 말 그대로 ‘원전(原典)’ 모음집이다. 이미 알려진 세상의 지식들이 어떤 동기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결과로 이어져 왔는지, 그 최초 발견자의 직접 기록을 통해 왜곡 없이 독자들에게 전달해준다.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향해 때로는 정신나간 얼간이로 치부당하면서도 목표를 향해 끝까지 나간 이들의 연구는 르네상스 이후 세상을 뒤바꿔버린 것들이다. 개인적 생활사 속에서 라듐의 발견 순간을 풀어간 퀴리부인 이야기, 문명의 우열론을 가리며 진화를 설명해가는 다윈의 기록, 도킨스의 유전자 에세이, 소금 한 알갱이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논하는 칼 세이건의 기록 등 세기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지적 유희를 책 한 권을 통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일반 독자들도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문헌을 골라 과학을 우리 바로 옆에 끌어앉혔다.
르네상스 이후 500년의 지성사에서 건져 올린 102개의 황금 원전들
세상에는 ‘지식’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어지는 수많은 ‘사실’들이 존재한다. 살아가면서 당연하다고 일컬어지는 상식도 있지만,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지식들도 무한히 널려있다. 전깃불로 세상이 밝아지고, 작은 물질을 크게 확대해서 보고,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지구와 태양을 벗어나 더 멀리 무엇이 있는지도 알아내고야 만 세상의 모든 지식들!
그러나 이렇게 상식화된 지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파편화되거나 결과화된 지식만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무슨 원리로, 어떤 과정들을 거쳐 이 당연한 지식이 발견되었는지는 대충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지만, ‘이것은 요렇게 된다’는 결과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지식화된 사람이라 생각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A의 원리와 B의 원리를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만 C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있음에도, 많은 이들은 A와 B와 C를 각기 상관이 없는 지식들로 인식하고 만다. 제각기 조각나버린 파편화된 지식의 범람 속에서 진정한 ‘앎의 희열’을 느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무려 820페이지에 달하는 지식교양서 『지식의 원전』이 출간되었다. 책 표지에 제목과 함께 씌어져 있는 ‘다 빈치에서 파인만까지’라는 수식어처럼, 르네상스 이후 지금까지 500여 년간의 지식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초의 原기록’들을 한데 모으고, 이를 옥스퍼드대 영문과 존 캐리 교수가 해설을 붙여놓은 책이다.
육중한 책이라 하더라도 한 권의 도서 안에서 여러 지식을 근본부터 설명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파편화된, 혹은 결과만을 들추어내는 위의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해소해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로 이 책의 메인 컨셉이자 장점인, 지식 발견의 주체자들이 직접 쓴 최초의 원전 기록을 그대로 독자에게 소개한다는 점이다. 후대 과학자들이 대신 설명하고 있지도 않고, 과학저술가들의 재해석도 전혀 끼어들 수가 없다. 최초 발견자들의 원 기록들은 그 원리를 궁금해하던 애초의 상황에서부터 중간 시행착오 과정, 그때마다의 정신적 단상, 그리고 마침내 발견의 순간을 이룬 희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담담히 풀어가는 명석한 이론 설명을 포함해, 독자들에게 최대한의 정확성을 발휘해 지식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너무나 광범위한 단어에 의문이 들 것이다. 물론 이 책 속에 실린 각 원전들의 기록자, 혹은 각 원전이 담고 있는 내용은 거의 지식 중에서도 ‘과학 지식’이 기본 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과학이 어찌 ‘자연과학’이라는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곧 인류 사회와 연계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 육중한 책 속에는 과학을 중심으로 삼되, 기술의 발명과 인류 미래 제시, 과학자가 지닌 휴머니즘 세계관, ‘생물’ 범주가 아닌 생명체에 대한 단상에 이르기까지 과학을 뛰어넘는 다양한 각도의 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파편화된 지식, 결과만을 논하는 지식은 가라
인간의 신체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내는 다 빈치의 간단한 기록에서부터 이 책의 1장은 시작되어, 지나친 문명 발달로 인해 인류가 위협받는 현 세태를 개탄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기고문을 102장으로 하여 책은 끝마치게 된다. 500년이란 시공간을 두루 거치는 동안 세상을 놀래키고 발견의 주인공이었던 한 학자의 마음을 울렸던 102개의 지식 이야기, 곧 102개의 원전 기록을 한 권의 책에 담아, 과연 독자들은 무엇을 얻고 어떤 의미를 남겨둘 수 있을까.
태산 같이 쌓인 500여 년간의 지성사 원전을 읽으며 그 중 추리고 또 추려 102개의 꼭지를 엮게 된, 옥스포드대 영문학 교수인 이 책의 편저자는 그 의의에 대해서 말한다.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쉽게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기 바란다’는 간단한 이유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지식교양서들이 모두 이 단순한 목표를 의도로 삼아 책을 내고 있지만, 필자 한 사람의 주장과 정리 개념으로써 씌어진 한계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책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과학자도 아닌 한 영문학자가 특별한 ‘주의’나 ‘주장’은 배제한 채 지식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최초의 발견 기록들, 그 순수한 최초의 원전을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원전 속에서 몰랐던 원리들을 배워가고 이해해가는 과정을 일반 독자들이 직접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마치 중간의 강사를 거치지 않고, 최초의 발견자(학자)가 직접 독자에게 설명해주는 것처럼). 편저자가 서문에서 설명하고 있듯, 그는 이곳에 소개한 원전을 고른 기본 조건으로 ‘흥미롭고 잘 씌어져 있는지’와 더불어 ‘깊이 있는 지적교육을 받지 않은 독자들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인지’를 중요시하였다.
과학자들은 상대편의 지적능력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 자신이 전문가이며, 주로 동료 전문가들과의 대화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지난 5년 간 나는 과학자들이 쓴, 겉보기에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나 글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일반 독자층이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시작하긴 하지만, 곧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수학공식이나 골치 아픈 기술적 내용으로 가득 차버려 독자들을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서문’에 있는 글처럼 편저자는 지식 책이라는 명목으로 출판된 기존의 책들이 대중을 은근히 외면하며 전문가끼리의 담론에 머물렀다고 비판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적 수준이 높은 몇몇 소수를 위한 지식교양서가 아니라 철저히 대중교양서를 지향하고 있으며, 일부 전문가들의 향유물이 아닌 수많은 독자가 공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원전 기록에 의한 최초의 발견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 어느 탄소원자 이야기 - 프리모 레비

 우울은 인간 역사와 함께했지만 우울증 환자의 증가는 분명 현대성의 결과다
프로작이라는 녹색 알약은 우울증을 경험한 수백만 미국인들의 삶 속에 들어와 이제 아스피린만큼이나 흔한 약이 되었다. 아티반에서 졸로프트까지 시장에 기분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약이 널린 사회. 우울증의 추적은 바로 현대인의 정신세계로의 여행이다. 현대인의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소외감은 더욱 커지고 수면 시간은 짧아지고 있다. 현대인의 점증하는 스트레스는 우울증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미국인의 3퍼센트(약 1900만 명)가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고, 이 중에서 어린이가 200만 명이 넘으며 조울증 환자는 230만을 헤아린다. 우울증은 또한 젊은 여성의 경우 두 번째, 젊은 남성의 경우 세 번째 사망 원인이다. 질병부담률로는 우울증이 심장병 다음인 2위다. 우울증은 알코올 중독에서 심장 질환에 이르는 여러 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제1의 사망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신 장애 가운데 우울증의 비율이 가장 높다. 2003년 10월 대한우울조울병학회가 서울에 거주하는 20-60세 주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5퍼센트가 경증 이상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사회적인 심각성은 우울증의 발병률이 특히 어린이들 사이에서 증가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우울증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는 경우는 전체 우울증 인구의 6퍼센트에 불과하며, 자신의 우울증을 인지하는 경우는 4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반면 슈퍼모델의 등장이 비현실적인 기대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한 것처럼, 즉각적인 이미지와 반응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복잡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적인 슈퍼모델처럼 자신의 정신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관리하려는 경향을 띠면서 증상이 가벼운 우울이나 격한 슬픔을 못 견디고 쉽게 프로작을 쓰기도 한다. 인간의 자의식과 우울증은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우울증 환자의 증가는 분명 현대성의 결과다. 삶의 속도, 기술 혁신이 초래한 혼돈, 소외와 고독, 전통적인 가족 구조의 붕괴, 믿음 체계의 와해가 불러오는 파국의 결과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밀로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살아간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해방의 공간을 마련한다
자신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저자 앤드류 솔로몬은 1998년 '뉴요커'에 “멜랑콜리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후 천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 솔로몬은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할 말이 많은 주제는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저술 동기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인터뷰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과학, 철학, 역사, 정치, 문화 전 분야에서 “멜랑콜리”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우울함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졌으나 결국 빠진 것은 종합이다. 그 결과 혼돈의 영역이 되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공감이며, 두 번째 목적은 질서다.” 단순한 일반화가 아닌 경험론에 기초한 질서. 솔로몬이 이 방대하고도 난해한 작업을 독자에게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려줄 수 있었던 힘은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나온다. 우울증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작업이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또 다른 가치가 있다. ?한낮의 우울?은 먼저 저자 자신의 우울증에서 시작하여 타인의 유사한 우울증, 타인의 색다른 우울증, 그 다음에 전혀 다른 환경의 우울증의 순서를 따라 접근한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족할 것이 없던 저자에게 우울증은 모든 논리를 거부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 그 다음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 찾아오는 차분한 절망감.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탄생한 ?한낮의 우울?이 전하는 희망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고통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책은 없지만 나는 그 고통의 범위를 보임으로써 우울함으로 시달리는 이들의 해방을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 나치 수용소에 대한 글을 남긴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석방의 시간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프리모 레비의 자살에 대해 여러 억측들이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인가? 시민들은 국가의 폭력, 사회의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있는가?
법률은 시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제함으로써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법률가들이 시민의 이익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길 때 사회의 정의는 무너진다.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검찰과 법원의 권력, 변호사 사무실의 높은 문턱 앞에서 헌법은 분노하고 있다. 헌법 정신의 수호자여야 할 법률가,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권과 평등의 버팀목인 법률을 팔아 특권계급이 된 판?검사, 변호사들. 검사 출신 법학자가 통렬하게 고발하는 법률 귀족들의 일그러진 초상.
<검사 출신 법학자가 용기 있게 써내려간 한국 법조계의 반헌법적 현실!>
군사독재 정권들이 머물고 간 상처 위에서, 폭력의 지배를 대체할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법(法)뿐이었다. 법을 알아야만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법은 여전히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저 멀리 ‘전문가들의 세상’에 존재하는 ‘그림의 떡’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헌법과 민주주의, 절차적 정당성 등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법을 우리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탄핵 소추 이후 넘쳐났던 방송 토론에서 자주 나오던 말이 있다. “이제는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고 좀 기다리자.”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법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놓고 시민들은 그저 생업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에는 전문가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뛰어난 존재라는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편해지는 것은 법률가들이다. 전문가의 탈을 쓴 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모르면 조용히 하라.”라는 한마디로 모든 비판을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전문가들의 그 한마디에 주눅 들어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시민들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이 쌓여 법에 대한 엄청난 불신의 벽을 만들어냈다. 그게 우리가 처한 오늘의 법 현실이다.
이 책은 그 벽을 허물어보려는 야심찬 시도이다. 이 책은 먼저 정의(正義)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동안 승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까닭에 표면상 평온해 보이는 사회를 ‘법의 지배’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탈을 쓴 폭력의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란 결국 올바른 절차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에 시민이 당당한 주체로서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국가, 법, 법률가, 인권의 문제이다. 헌법과 법률의 목적은 흔히 오해하듯 국민을 통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 권력의 괴물화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리고 헌법과 법률이 권력 통제라는 제 기능을 다하도록 돕는 일차적 책임은 변호사, 판사, 검사를 비롯한 법률가에게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률가들은 청지기라는 본래의 소명을 저버린 채 자기 집단과 권력자를 옹호하는 데 지식과 능력을 악용해온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법률가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왜곡된 법조 문화와 그 결과로 주인을 잃고 길바닥에 나뒹굴게 된 시민의 기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이란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편안하지만 깊이 있는 법학 교양서>
이 책은 법은 어려운 것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반 시민들을 위해 쓰여진 법학 교양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헌법 정신, 결코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기본적 인권의 문제, 피의자?피고인이 유일하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인 말하지 않을 권리, 앞으로 법률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차별받지 않을 권리인 평등권 등 일반 시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헌법과 법률의 내용들을 딱딱하고 권위적인 법률 전문가의 말이 아닌 친절한 친구의 목소리로 흥미롭고도 구체적으로 전달해준다.
-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의 말처럼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 적어서 큰 위협이 되지 못하며, 정말로 위험한 존재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관료들"인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발견과 멜라니 클라인, 도널드 위니콧의 이론을 통해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인 승화를 소개하며, "남성들이 만든 정치적·사회적 구조가 소녀의 승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손상시킨다"는 저명한 페미니즘 정신분석가 크리스티앙 올리비에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여성에게는 승화의 능력이 없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비판한다. 아울러 인류는 승화라는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수많은 문화와 문명을 창조해 왔으며,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된 승화가 대학살 같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 사이코 시리즈 4차분 발간
사이코 시리즈는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엄밀하고도 간략한 이론적 설명이면서,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심리 상태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타고난 본능과 어린 시절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처리하는 방식이 성인이 되었을 때 특정한 증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특정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단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감정이 수행하는 기능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다양한 감정적 경험들을 견디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사유, 정서, 행동은 인간의 본능과 유아기의 감정적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무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무의식의 정체와 그 작용을 밝혀내려는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본능이 발현되는 방식, 인간의 감정적 경험이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그러한 본능과 경험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이 시리즈는 프로이트나 클라인 같은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각각의 저자들이 상담치료 과정에서 마주친 다양한 사례,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예술 작품과 영화까지 사례에 포함시켜 무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사이코 시리즈 4차분에서는 승화, 자유 연상, 거세 콤플렉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유년기의 정동과 감정에 대해 다룬다. 『승화 Sublimation』에서는 인간의 성적인 본능을 예술적인 창조 행위의 동력으로 치환하여 충족하는 "승화"의 작용 기제와 그것이 인간의 창조성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며, 『자유 연상 Free Association』에서는 환자의 증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정신병적 징후의 근원을 발견하는 정신분석가와 환자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 살핀다. 『거세 Castration』에서는 유명 운동선수와 영화, 미술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거세 콤플렉스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의 실체와 그 영향을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감정 Affect and Emotion』에서는 유년기의 감정 상태를 조절하는 능력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피며,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부모의 역할을 강조한다. -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은, 그것이 대량 학살이든 모성이든 우정이든, 우리의 인간성을 손상시킨다. 프리모 레비의 시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의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135라는 구절이 생각 없는 독자들에게...

 타자를 통해 자아에 이르는 길
‘타자성’의 문제는 현대 서구 철학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 스캔들 중의 하나이다. 근대 서구 사상사와 주류 문화를 이끌어왔던 합리적 ‘이성’의 신화, 즉 타자를 자기 안으로 흡수시키고 동화시켜온 동일자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늘 이성의 그늘로 황급히 모습을 감추어야 했던 ‘타자’가 해명해 내야 할 수수께끼로 당대 사상사의 무대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커니는 타자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정상성(normality)을 구성하고 그 범주 안에 ‘나’와 ‘우리’를 포함시키기 위해 어떻게 ‘그들’, 즉 타자를 만들어내고 배제시켜왔는가를 추적해 들어감은 물론, 현대 주요 사상가들의 타자성에 대한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서구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신화 및 종교, 인류학, 문학, 철학의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비나스 · 데리다 · 리오타르 · 크리스테바 · 지젝 · 하이데거 등이 수행한 타자성 연구의 성과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들 사상가들의 선배 격인 칸트와 프로이트도 등장한다. 커니는 타자성 연구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이들 독창적이며 이질적인 사상가들을 매우 능숙하고 노련하게 다룬다. 현대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와, 우리로 하여금 타자가 재현되는 방식을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몸소 체험하게 해줬다고 할 만한 미국 뉴욕에서의 9 · 11 테러 사건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벗어나지 못함은 물론이다.
서사적 이해의 필요성
저자는 우리가 제대로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사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서사, 즉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 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자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존재이자 선과 악, 신성과 악마성의 경계에 선 자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계에 서 있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재구성하고 설명함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저자는 특히 타자성의 주요 키워드로 이방인 · 신 · 괴물을 드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 인간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모습들의 투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방인 · 신 · 괴물의 모습을 서사적 이해의 방식으로 접근하여 그 이면에 감추어져온 타자성의 ‘진실’을 해석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타자성의 수수께끼를 풀어 바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사적 이해는 서로 적대적인 양극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사닥다리를 얻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고자 저자는 고대 신화와 종교에서부터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셰익스피어의[햄릿]과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등 고대와 현대의 희생양 서사들을 망라하며 자신의 논의를 이어간다. 이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도의 길로서의 ‘판별의 해석학’
타자 혹은 타자성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크게 레비나스 등으로 대표되는 절대적 외재성과 크리스테바 등의 접근방식인 완전한 내재성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 극단적인 양자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길을 통해 타자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중도의 길로 제안하는 것이 바로 판별의 해석학이다. 저자는 고대 미노타우로스에서 중세의 괴물, 그리고 포스트모던한 이방인들까지 흥미로운 예들을 통해 인간의 자아 그 자체가 자주 기괴한 요소들을 담고 있음을 논의한다. 책 전체를 통해 저자는 이방인과 신, 괴물이 단지 신화나 판타지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문화의 무의식의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타자가 어떻게 깊이 반향하는지 더 잘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공포와 욕망이 외부 세계에 어떻게 명백하게 드러나는지 이해할 수 없고, 또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배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열쇠는 우리의 괴물들을 죽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괴물들이 결국 스스로와 화해하고 타인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멈추게 만들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누구라도, 그 싸움의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아포리즘에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괴물을 포용한다는 것이 그들을 우리의 평온한 저녁식사에 초대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환대’할 필요가 있는 괴물들도 있지만, 그 괴물들은 다른 이들의 투쟁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할 대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부해야만 하는 악은 분명 존재하며 따라서 그러한 악을 판별해 내는 것은 타자성을 다루는 모든 연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차이’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만약 프리모 레비(Primo Levi)*나 엘리 비젤(Elie Wiesel) 같은... 아우슈비츠의 극악무도함을 또 다시 이야기하는 의무야말로 프리모 레비의 말마따나,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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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0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추천하고 퍼갑니다...^^;;

물만두 2006-06-0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테러에 필요한 무기들을 사기 위한 '자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저자는 그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역사를 추적, 테러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안는 돈줄을 밝혀낸다. 그에 따르면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제3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대리전을 치르게 하면서 아낌없는 투자를 해왔다. 그 결과, 냉전은 끝났으나, 테러 조직은 살아남았고 테러 역시 살아 남았다. 그들이 오늘날 '흉악한' 테러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테러를 키운 것은 미국과 소련으로 대비되던 강대국들이었던 셈이다. 이 조직들은 크게는 PLO 처럼 거대한 의사국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저자가 '테러의 신경제'라 이름 붙인 사항을 살펴보면, 특히 허약한 나라들이 테러의 온상이 된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도 돈으로 테러를 키우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현재 테러 경제의 규모는 1조 5천억 달러, 영국 GOP의 2배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한다.
정치, 사회, 종교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본 독특하고도 신랄한 보고서. 테러의 정치사회적 신비함 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경제를 들춰내다!
우리는 ‘테러’에 대해서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랍, 아랍인들, 이슬람교, 성전, 반미주의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연상되는 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정치, 사회, 종교적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미국의 석유 욕심 때문에 무고한 이라크 인들이 죽어간다는 비난이 높아지고 있고 서방의 경제적 욕심이 이슬람 테러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테러’ 자체에 대해서는 테러가 어떤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한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테러의 신경제’다. 여기서 말하는 신경제는 기존의 정보통신기술 혁명이 만들어낸 경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 생겨난 지정학적 대변동에 따르는 경제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근 50년에 걸쳐 오늘날처럼 발전해버린 테러와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경제적 개념들을 아울러서 테러의 신경제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테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테러의 주도권이 어떻게 해서 제3세계에 주어졌는지 테러를 둘러싼 엄청난 자금의 흐름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설명하면서 테러의 신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테러를 둘러싸고 미국과 영국 등의 서방과 중동, 남미 등의 제3세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부분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테러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부시가 ‘테러 근절’을 외치며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하는 현재도 이슬람의 테러와 서방은 한 통속이기도 하다.
미소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대리전을 자신의 국경 바깥 제3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테러라는 형태로 사주했고, 필요한 경우 기술과 자금을 아낌없이 대주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 사회, 종교적인 대립이 교묘하게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자 많은 테러 조직은 생존을 위하여 무기를 들어야 했다. 이것이 테러의 민영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조직은 PLO처럼 거대한 의사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럴 수 없었던 조직은 사라져갔다. 이제 PLO와 하마스 같은 테러 단체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조직을 ‘경영’하기 위하여 수많은 합법적?불법적 경제 수단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발전한 테러 경제의 규모는 1조 5천억 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영국 GDP의 2배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테러리스트들과 서방은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거래를 하기도 한다. 이 일관성 없는 작태가 결국은 경제적 이득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유대가 세계적인 원수지간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들을 뛰어넘어 테러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저자는 합의의 여지가 매우 적은 정치적, 종교적 틀을 벗어나 경제적 틀로 테러를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물론 서구인의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가기도 한다. 테러를 오직 경제적 틀로만 분석한다는 것은 테러의 동기, 서방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감의 원인 등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희석시킬 우려가 있는데 실제로 이 책에서는 그런 저자의 관점이 간혹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테러에 대해 부정확한 추론과 근거 없는 억측으로 독자들을 혼란과 오해로 빠트리는 그런 책은 아니다. 저자는 수천 건의 문서와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서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서방과 이슬람의 과두 체제들이 돈과 권력과 지역에서의 패권 유지를 위해 얼마나 잔인 하게 폭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교묘하게 은페할 수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테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거나 남의 일이려니 하며 관심을 끊어버리는 태도를 버리고, 보다 균형적인 관점을 가지고 테러를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 1960년대 독일의 학생시위 운동에서 태어난 단체다. 창설자는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군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이다. 계급 투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그는 전쟁에 도취된 군인이기 이전에 생을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가망 없는 전투를 기적적인 승리로 이끈 롬멜의 용기와 지략
히틀러의 추종자에서 히틀러 저항세력에 가담한 롬멜의 분노와 거짓으로 위장된 죽음

제2차 세계대전의 유명한 독일 장군 에르빈 롬멜의 신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롬멜 신화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있어 ‘사막의 여우’이자 영웅이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군인을 혹사시켰던 장본인이며 나치에 협력한 범죄자였다. 그 ‘롬멜 신화’의 주인공이 언제 히틀러 시스템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는 정확하게 언제 나치에 가담했으며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전쟁 범죄에 관해서 정확하게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 또한 범죄자인가? 히틀러의 어떤 점이 순수한 군인정신을 지닌 그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롬멜은 무의미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히틀러의 추종자로, 생의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한 군인이었다. 그가 히틀러 저항세력에 가담한 당시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롬멜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 하였고, 다가오고 있는 파멸의 늪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부 연합군과 단독강화조약을 계획했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의문 속에 남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충분한 자료조사를 통해 인간 롬멜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그는 육군원수인 롬멜이 단지 히틀러의 단호한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독재자에 대항해 저항세력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은 기존에 다루어졌던 이야기들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새롭고 흥미로운 롬멜의 내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원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편지들은 완전하게 남아있고, 직접 손으로 쓴 일기, 명령기록들과 메모는 군인으로서의 그의 인생을 빈틈없이 자세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롬멜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이 기록들을 뒷받침하고 덧붙이는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이렇듯이, 일기, 편지, 회고록들은 이 유명한 2차 세계대전의 독일 장군의 모든 삶의 단면마다 뚜렷한 상을 전해줄 것이다. 그 모습은 전후시대의 추악한 변명뿐만 아니라, 히틀러 시대를 향한 혹독한 비판과도 틀린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 속에 내재된 모순과 악에 맞서 변화하는 내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 슈투트가르트의 시장으로서 과거 독일연방공화국의 중요한 지방 정치가가 되었다. 1977년 10월 18일 밤, 적군파(RAF) 테러리스트였던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구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 장 칼 라스페(Jean Carl Raspe)가 슈투트가르트 수용소에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이후, 1999)의 후속편이다. 1968년 이후 80∼90년대에 걸친 신좌파의 정치적 진로를 평가하고, 신좌파를 계승하는 동시에 그와 단절하는 새로운 운동의 흐름으로서 자율적 사회운동들(Autonomous social movements)을 면밀히 분석한다. 1968혁명에 참여했던 이른바 ||^68년 세대||^는 최근 유럽 각국의 선거에서 좌파 물결을 일으켰다. 또한 이른바 ||^68년 이데올로기||^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자에 반대하는 ||^제3의 길||^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신좌파는 자신이 비판했던 구좌파의 권위주의, 관료화, 운동과의 단절 등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으며, 그에 따라 끊임없이 도덕적 추문만을 정치적 쟁점으로 생산해내고 있는 실정이다. 구좌파를 비판했던 신좌파가 구좌파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역설적 상황. 자율운동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운동의 자율성이란 형이상학적인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렴되어 나타난 구체적인 쟁점이다. 첫째 정당과 노동조합으로부터 사회운동의 독립성이다.유럽의 경우 정당-노동조합의 ||^동맹||^은 통상적인 정치 현상이다. 자율운동은 정당 내지 노동조합이 지향하는 선거 정치, 위계적인 조직화, 민족국가 중심의 의사결정구조 등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소수 민족의 분리주의 운동은 정당 내지 노동조합의 권위주의 질서를 용인하는 한 자율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같은 자율운동의 한 사례는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지역적 자율성이다. 둘째 전통적인 지도―피지도 관계에 대한 거부이다. 지도―피지도 관계가 결국 지배―피지배 관계로 변형되었다는 것은 이미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의 자율성||^을 주장했을 때 드러났던 바와 같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내용은 페미니스트운동의 ||^일인칭의 정치학||^으로부터 발전한다. 페미니스트운동은 민족만이 아니라 계급까지도 비판하면서, 어떤 명령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동했다. ||^노동의 자율성||^이 여전히 계급 우위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일인칭의 정치학||^은 자주관리, 자기규율을 보다 근본적으로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세 번째 의미는 반핵운동, 점거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반핵운동은 당 지향적정치를 강조하는 맑스레닌주의 집단으로부터 자율성을 주장했고, 점거운동은 집단적인 삶 속에서 대항문화를 창출해냈다. 직접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형태란 결코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었으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전복을 겨냥하는 대항문화운동은 권력장악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화가 공동체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핵심임을 드러냈다. 물론 여러 자율운동들은 자신들을 결코 물신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의 진정한 자율성 형태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찬성하지 않는다. 이상의 자율성의 의미는 수많은 자율성 형태들을 관통하는 몇가지 일관성일 뿐이다.
이 책은 훌륭한 사례 연구의 전범을 보여준다. 까다로운 이론적 논의에만 매몰되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사례만을 열거하는 데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관찰하고 면담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사건들을 재구성할 뿐만, 그로부터 출발하여 난해한 이론적 논의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 때문에, 안토니오 네그리의 노동자 자율성, 셀라 벤하비브의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또다른 이론적 권위에 기대지 않고, 난해한 논리를 구사하지 않으면서, 강한 설득력을 보여준다.이것은 ||^논쟁 없는 논쟁||^으로 희화화할 수 있는 한국의 이론적 풍토에 귀중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 일련의 과감한 행동에서 한 적군파 팀은 슐레이어를 납치하여 비밀 장소에 붙잡아 놓고는 적군파의 창시자인 안드레아스 바더 Andreas Baader를 포함해서 적군파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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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1614

+ 처녀의 피로 목욕한 여인
+ 마녀, 혹은 흡혈귀라 불리는 실존인물
+ 1560년 Transylvania[현 루마니아 서북부 고원지방]의 명문가
+ Bathory가는 유럽제일의 합스 부르크가와 비견될 정도의 명문가로 사촌은 헝가리 왕국의 수상

+ 배경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실존하는 마녀, 혹은 흡혈귀로 불리운다. 트란실바니아 왕이나 폴란드 왕등을 배출한 굴지의 명문이었으나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잃지 않기 위해 근친 결혼을 많이 했고 때문에 집안에 미친 사람이나 정신이상자가 많았다.

바토리 여백작이 이 비극적인 삶에 빠지기 전 그녀는 페렌츠 나다스디 백작의 아내였지만 용맹하기로 이름난 남편은 아내에게는 소홀했다고 한다. 항상 전쟁에 나가있는 남편 대신에 그녀는 항상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었는데 시어머니는 전통적인 장군 집안의 큰어른답게 매사 엄격하고 절도있는 매너를 <바토리>에게 세뇌 주입시켰다.

말만 결혼 생활이지 감옥이나 다름없는 규제속에서 그녀는 점차 말이 없고, 냉담하고, 음습한 여인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바토리가>의 유전병인 간질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돌아버리게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바토리가는 근친상간에 의한 유전병으로 유명해 숙부는 간질로 죽었고, 숙모는 황음에 빠져 남편 세명을 먼저 보낸 가문이었다.


+ 처녀의 피로 목욕하는 여인

그러한 그녀에게 사악한 마법에 심취해 있던 시녀들이 접근해 왔는데 그녀는 시녀의 말을 듣고 마법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녀는 하인과 시녀들의 꾀임에 빠져 농부의 딸들을 유인하여 마법의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녀의 영지에 살고 있는 농부의 딸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뒤에 살해하는 것이었다.

그뒤 1600년, 그녀의 남편 페렌츠 나다스디 백작이 죽고나자.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자신의 성으로 끌어들여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또한 자신의 젊음을 위해서 엽기적인 행각을 저지르게 된다.

어느날 머리를 빗겨주던 하녀가 실수를 하여 머리가 심하게 땡겨지자, 바토리는 하녀의 따귀를 때렸고, 좀 심하게 때렸는지 하녀의 뺨이 손톱에 긁혀서 피가 났다. 그런데 그 피가 바토리의 손에 떨어졌고, 바토리는 순간적으로 손의 피부가 탱탱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젊은 처녀의 피가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비밀이라 생각한 그녀는 그 이후 수시로 처녀를 잡아다 죽여서, 그 피로 목욕을 했다.

<바토리>는 농가의 처녀들을 성안의 하녀로 사들였다. 그뒤 처녀들을 일단 잘 먹여 사육시킨 뒤 때가 되면 한명 한명, 또는 단체로 살해하여 그 피로 맛사지겸 목욕을 하는 엽기적 행각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점점 피부를 젊게 만드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처녀들이 고통 속에 죽어 갈 때, 처녀들의 피를 받아 마실 때, 피를 욕조 가득 채우고 목욕 할 때 묘한 희열과 쾌감을 그녀는 느끼게 된다.

+ 잔혹한 성품

그녀의 잔혹한 성품을 말해주는 것 중에 배나무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영지에 사는 농부의 딸 하나가 배가 고픈 나머지 배를 하나 훔쳐먹는 사건이 발생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에게 아첨을 하는 하인들이 이 소녀를 밀고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소녀를 잡아다가 고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소녀는 고문을 하기도 전에 배를 따먹은 일을 자백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소녀를 용서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많은 농부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면서 배나무에 하룻동안 묶어놓록 했다.

그 대신 그녀는 하녀에게 시켜 이 소녀의 전신에 꿀을 발라놓도록 했다. 꿀 냄새를 맡은 벌들이 사방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소녀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수천, 수만 마리의 벌들에게 쏘인 소녀는 온몸이 퉁퉁 부어서 죽었다. 그래도 벌들은 그치지 않고 날아와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꿀을 먹으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녀가 죽자 이번에는 개미와 구더기가 달려들어 그녀의 시체를 파먹었다. 농부들은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잔인한 행동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그녀는 헝가리의 왕녀였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은 감히 불평을 말할 수도 없었다.

바토리가 즐겨 사용했다던 대표적인 고문도구

> 철의 인형 또는 철의 여인

<바토리>가 독일의 유명한 기술자에게 특별 주문 제작한 것으로 실제 사람처럼 아주 정교하게 만든 철제 인형였다고 한다. 등신대의 벌거벗은 인형으로 피부는 사람과 똑같은 색이고, 기계장치로 눈과 입도 열리고 머리카락도 있었다. 여자를 벌거벗겨 인형 앞에 놓으면 톱니바퀴가 움직여 인형은 두 팔을 올려 여자를 감싸 안는다. 다음에 인형의 가슴이 열리는데 그 안은 비어있다.
좌우로 펼처진 문에 다섯 개의 칼날이 있다. 인형의 몸안에 갇힌 여자는 필사적이지만 칼로 전신을 찔려 뼈가 부서지고 처녀의 온몸을 사정없이 찌르면서 피를 뽑아낸다. 그 피는 인형안의 홈 을 따라 흘러 <바토리>의 욕조로 쏟아 지는 것이다.

> 철의 새장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새장에 여자들 무리하게 집어넣고 도르레를 사용해 허공에 매단다. 다음에 시녀들이 벽의 스위치를 누르면 몇 십개의 가시가 일제히 새장의 창살에서 안쪽으로 튀어나온다.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들은 몸을 움직여 가시를 피하려고 하지만 새장은 허공에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자의 육체는 새장안에서 잘게 잘라지고 부수어져 그 피는 밑에 뚫린 많은 구멍에서 아래에 있는 큰 그릇 안으로 흘러내리게 된다. 새장 아래에 있던 <바토리>는 그 쏟아지는 피를 맞으며 샤워를 했다.

+ 바토리의 최후

<바토리>가 사는 체이터성에 들어간 처녀들은 두번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음에도 성밖의 가난한 백성들은 거금의 돈을 탐내 자신의 딸들을 성으로 들여보냈다.
처녀사냥에 나선 모집책은 하녀 ˝토로코˝와 간호사 ˝일로나˝가 맡았고 피를 짜내는 데는 시종과 마법사들도 동원됐다고 한다.

이 엄청난 사건이 들통나게 된 것은 농부들의 딸로도 피가 부족해진 나머지 귀족의 딸에게 까지 손대다 꼬투리를 잡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체이테성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어 체이테성에 악녀들이 산다는 소문에서부터 흡혈귀가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게 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체이테성에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되고 교구의 한 사제도 이와 같은 소문을 듣게되어 들통이 났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일로 인해서 <바토리>의 끔찍한 취미생활이 들어나게 되었고 1610년 12월 30일, 바토리의 사촌인 기오르기 투르소 백작이 일단의 군인과 기병대를 이끌고 그 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피의 의식이 진행되는 참이었다. 성에 들어간 백작은 지하 감옥에서 수십 구의 시체와 함께 온몸에 바늘로 찔린 자국이 수없이 난 채 아직 살아있는 희생자를 숱하게 발견했다.
그 정도로 여백작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많은 수의 소녀들이 아직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바토리˝는 죽인 처녀들의 수를 일일이 일기에 적어둬서 그걸 근거로 해서 보면 죽인 여자들의 수는 612명 이나 되었다고 한다』

왕가의 친척이었던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지만, 여백작은 모든 창문과 문이 폐쇄된 방에서 3년 반을 살다가 1614년 8월 21일에 54살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동조자들은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자른 뒤 화형에처해졌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여백작 사건은 그 지역에 온갖 소문과 전설이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 많은 전설은 여백작이 죽어서도 피의 쾌락을 찾아 계속 나타났고, 결국 진정한 의미의 흡혈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 etc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엄청나게 미인이었으며, 천사처럼 선해보이는 용모였고, 특히 피부가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우유빛이었다고 전한다.

바토리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여자였을 뿐 아니라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똑똑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군주들이 거의 글을 읽지 못했던 반면, 바토리는 헝가리어는 물론 라틴어, 로마어에도 능통했으며 지적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100년 이상 바토리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었을 만큼, 악명이 하늘을 찔렀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군주 블라드 테페스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실은 바로 이 여자 엘리자베스 바토리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여럿 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 부인의 재판 기록은 아직도 헝가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 사건이 일어났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으며, 주로 슬로바키아 출신 하녀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름 대신 The Hungarian Whore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이 지역의 인종 분포가 주로 헝가리 인과 슬라브 적이어서 직역하자면 헝가리 창X쯤 된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

 <행복한 명작 읽기> 시리즈는 기초가 약한 영어 초급자나 초, 중, 고 학생들이 보다 즐겁고 효과적으로 명작들을 읽으며 독해력을 키울 수 있도록 개발된 독해력 증강 프로그램입니다.
본 시리즈에 실린 명작들은 누구나 한번쯤 접해본 것들이라 영어로 읽어도 어렵지 않습니다. 다수의 원어민 전문 필진이 독자들의 수준에 맞게 단계별로 리라이팅해서, 자기 실력에 맞는 책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육부 선정 어휘를 가지고 표준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정규 교과 학습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 수준에 따라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초보자를 위한 350단어 수준에서 중고급자를 위한 1,000단어 수준까지 5단계 구성.
- 영어의 맛과 멋을 읽는다. 이 프로그램은 단계별로 효과적인 영어 읽기 요령과 영문 고유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장치가 곳곳에 포진.
- 읽기만 해도 영어의 키가 쑥쑥 -- 해석을 돕는 돼지꼬리, 영어표현 및 문법에 대한 친절한 설명, 어휘 학습과 내용의 이해를 돕는 퀴즈들, 그리고 매 페이지 펼쳐지는 멋진 그림들까지 어디 한군데도 소홀함 없다.
- 체계적인 듣기 학습까지. 여기에다 권말 특별부록 ‘리스닝 도우미’를 곁들여 읽기에서 그치지 않고 체계적인 듣기 학습까지 아우른다.
- 전문 미국 성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원음을 담은 오디오 CD 포함.
작품 소개

이 작품은 조나단 하커라는 영국인이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오래된 성에 사는 드라큘라 백작을 만나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런던에 있는 고성을 매입한다는 명목하에 하커를 유인한 드라큘라 백작의 실체는 죽은 뒤에도 사람의 피를 빨아 연명하는 흡혈귀. 성에 머무는 내내 알 수 없는 공포와 의문 속에 휩싸여 있던 하커는 흡혈귀의 포로가 되엇음을 깨닫고 묵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한편 조나단의 약혼녀 미나는 함께 지내는 친구 루시가 밤마다 집 바R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갈수록 창백해지는 것을 걱정하는데… - 현실에서는 헝가리의 귀족 여자가 이 묘사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바토리. 그녀는 1560년에 헝가리의 매우 부유하고 세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구와 우주의 비밀을 탐구해온 과정과 그 성과를 기록한 지리 교양서.
‘최초의 지도는 누가 만들었는가?’와 같은 순수한 지리적 의문부터 ‘적도는 왜 그리 더운가?’ ‘열대우림과 정글의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지구과학, 천문학 내용까지 아우른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지리학자와 탐험가들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지리적 발언’이나 인류의 세계관과 세계자체를 변화시킨 발견 발명을 기록한 ‘지리학의 이정표’도 눈길을 끈다.
작은 삼각형을 이용해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얼음으로 덮인 땅에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인 바이킹 전사 에리크, 최초로 세게 일주에 성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면한 마젤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처럼 기발한 지리적 호기심과 탐험에 의해 끊임없이 넓어졌다. 이 책은 "왜 나는 지금 여기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지구와 우주의 비밀을 탐구해온 과정과 그 성과를 기록한 흥미진진한 지리 교양서이다.
저자는 ‘지리적 사고’를 강조한다. 지리적 사고란 ‘세심한 관찰과 사유를 통해 이미 주어진 그럴싸한 전제를 의심해 보는 태도’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지리적 사고에 입각해 상대주의적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보면서, 근대 이후 세계사와 지리를 장악해 온 서구를 비판하고 서구에 의해 각색된 역사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 이미지는 다시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에 의해서 확실히 굳어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뱀파이어는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한 존재로서 매혹과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현재 영화와 게임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 뱀파이어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왜 인간이 뱀파이어 이야기를 그토록 갈구하였는지를 밝히는 책.
두렵지만 매혹적인 뱀파이어 이야기
뱀파이어가 21세가에 깨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많은 젊은이들이 뱀파이어가 나오는 영화를 보기위해 멀티플랙스 극장으로 달려가고, 인터넷상에 뱀파이어에 관한 정보들이 쏟아지는 모습에 적잖이 놀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예전 같았으면 ‘드라큘라’라는 이름만 들어도 혼비백산했을 유치원생들이 ‘악마성 드라큘라’란 게임을 하면서 신나게 칼과 도끼를 휘두르는 광경을 목격할 때쯤이면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뱀파이어를 스크린과 게임 등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부활시키려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걸으면서 인간과 역사 속에 늘 함께 해 온 뱀파이어, 우리들이 그토록 그들의 이야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궁금증 속에서 [뱀파이어 연대기]는 씌어졌다.소설과 영화는 물론 애니메이션, 게임에도 넘쳐나는 이야기들, 즉 끊임없이 반복되는 네버 엔딩 스토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저자에게 뱀파이어는 최적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 [뱀파이어 연대기]에서도 저자는 영화와 문학,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뱀파이어들을 추적하고 있는데, 그 중 ‘영화’ 속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의 묘사는 참으로 흥미롭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표자인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투?를 시작으로 ?드랴큐라?, 뱀파이어와 헌터의 대결을 그린 ?블레이드?까지의 영화들을 쫓아가다보면, 뱀파이어라는 하나의 소재로 어떻게 이처럼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라는 놀라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고 수많은 매체에서 원용하는 뱀파이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저자는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는 사회학적인 접근으로 당시 교회가 자신들의 종교적 힘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악의 존재를 강조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악을 부정해야 할 교회에 의해 악이 규정화되고 체계화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고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역사적인 접근으로 사람의 피를 빨아먹었다는 ‘블라드 쩨뻬쉬’, 젊어지려는 욕구로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즐겼던 ‘에르체베트 바토리 백작 부인’, 소년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질 드 레’ 등의 사례를 통해 지금의 뱀파이어의 형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뱀파이어는 영생의 주제에 있어서 가장 두렵고도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뱀파이어는 그 자체로 ‘공포’이기 때문에 단죄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영원한 경계인’이자 ‘타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뱀파이어는 단순히 하나의 전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것은 아닐까? 뱀파이어가 늘 시대의 입맛에 맞게 변주되듯이, [뱀파이어 연대기]는 삶과 죽음이라는, 그리고 그 경계선이라는 상당히 묵직한 주제를 맛깔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 바토리는 단순히 피를 원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그녀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바토리는 '철의 처녀(Iron Maiden)'와 같은 고문... 양의 피가 아래로 떨어지는데, 바토리는 그 피를 받아서 목욕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동서양 신화상상동물을 총망라한 국내 최초의 백과사전!!
국내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의 신화상상동물을 총망라하여, 일러스트 중심의 보는 즐거움을 더한 백과사전은 처음이다. 130종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일러스트는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형태로 신화상상동물을 만날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림, 조각, 또는 기타 조형물의 형태로 남아 있는 귀중한 사진 자료들이 함께 소개되고 있어서 박물학적 사전, 교육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인간의 꿈을 담은 기기묘묘한 신화상상동물들의 세계에서 잃어버렸던 꿈과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리포터를 태우고 날아오르던 히포그리프, 외뿔이 달린 신비한 숲 속의 유니콘과 켄타우로스, 엘프 홉고블린 등 작은 동물에서부터 흉측한 괴물에 이르는 사람들 닮을 괴물과 파충류, 양서류, 어류, 조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등 기묘한 신화상상동물들을 총망라하였다.
제1권에는 사람이 속한 포유류, 사람과 동물의 혼합체, 사람과 비슷한 동물이 64종 등장합니다. 포유류에는 외뿔이 달린 유니콘, 기린, 해태와 함께 베히모스, 페가수스, 하늘 사슴 등 신비스러운 동물이 소개됩니다. 사람과 다른 동물, 예컨대 개, 황소, 물고기, 뱀 따위와의 혼합체로는 메두사, 미노타우로스, 스핑크스, 하르피아 등이 있습니다. 신화상상동물 중에서 가장 종류가 많은 것은 사람을 닮은 괴물들입니다. 요정, 엘프, 홉고블린 등 작은 동물에서부터 구울, 좀비, 흡혈귀 등 흉측한 괴물에 이르기까지 34종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제2권에서는 파충류, 양서류, 어류, 조류, 잡종동물,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로 나누어 66종을 살펴봅니다. 파충류를 대표하는 뱀과 용은 동서양의 신화와 전설에 가장 자주 출몰하는 신화상상동물입니다. 그러나 뭍과 물의 양쪽에서 사는 양서류는 자연세계에서처럼 신화 속에서도 그 종류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고기의 경우 가미, 바하무트, 자라탄처럼 활동 무대인 바다만큼 거대한 존재들이 많습니다. 조류는 흉측한 괴물보다는 인간의 꿈을 상징하는 동물로 곧잘 묘사됩니다. 가루다, 봉황, 피닉스 등 불사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상이한 동물들끼리 기묘하게 결합된 잡종동물은 오늘날 유전공학의 발달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그 종류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리핀, 미르메콜레온, 페리톤처럼 두 가지 동물끼리 합쳐진 것에서부터 아메마이트, 백두동물, 키마이라처럼 세 종류 이상의 동물이 한 몸으로 얽힌 것까지 기상천외한 신화상상동물이 많습니다. 끝으로 소개된 세 종류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은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 <에르체베트 바토리>, 19세기 17세기 초 헝가리의 여자 백작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600명 이상의 소녀를 잔혹하게 고문했다.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유지하려는 헛된 욕망 때문에 소녀들의 피로 목욕을 했던 것이다.

 인간에게서 이성, 노동, 문명이라는 얼굴에 가려진 광기, 폭력, 야만이라는 또 하나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 이런 까닭에 그의 야심 찬 기획은 시대의 스캔들이 되었고, 그 스캔들은 시대의 논쟁을 낳았다. 바타이유에 대한 비난이 찬사로 바뀐 것은 기성 질서와 고정관념을 뒤엎은 1968년 학생혁명을 계기로 해서였다. 푸코, 라캉, 데리다 등 68세대의 주요 사상가들이 이성의 절대적 힘에 의문을 제기하고 광기에 건 저주의 주문(呪文)을 풀면서 바타이유의 저술은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필독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독서열은 ‘아웃사이더 지식인’ 바타이유의 저술을 영원한 고전의 반열에 올렸다.
『조르주 바타이유-저주의 몫·에로티즘』의 저자는 바타이유의 대표 저서인 『저주의 몫』(1949)과 『에로티즘』(1957)에 담겨 있는 바타이유 사유의 결정들과 그것의 현대적 의의 및 한계를 고찰했다. 지구의 운행 원리로서의 소비를 탐구하는 『저주의 몫』은 모스의 『증여론』에서 출발하여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소비 이론 계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바타이유 스스로 자신의 저작 중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의미 있는 책이다. 『에로티즘』은 성과 죽음에 대한 바타이유의 사유를 집대성하고 있는 책으로, 독자는 『저주의 몫』을 소비 이론의 총론으로, 이 책을 핵심 각론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킨제이의 통계학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성을 탐구하고 있다. 결론은 성과 죽음과 종교의 일치이다.
‘악’에서 ‘꽃’을 본 인류학자 조르주 바타이유, 사르트르가 광인이라고 부른 바타이유, 스스로 정상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바타이유, 그러나 푸코가 20세기 최고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 바타이유. 그는 우리에게 이성, 노동, 문명이라는 얼굴에 가려진 광기, 폭력, 야만이라는 또 하나의 얼굴을 볼 것을 요구한다. -
문득 질 드 레(Gilles de Rais, 1404~1440)와 엘리자벳 바토리(Erzsebet Bathory, 1560~1614)를 언급한다면, 그것은 사드의... 의해 수백 명의 어린이를 죽였다. 폴란드 왕녀 엘리자벳 바토리 역시 잔혹성에서 질 드 레에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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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6-06-0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비극이군요. 부디 후세인들의 과장으로 덧칠된 이야기이기만을 바랍니다. 끔찍하네요. ㅋㅎ

물만두 2006-06-0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그렇죠. 아무래도 좀 과장이 있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