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에 필요한 무기들을 사기 위한 '자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저자는 그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역사를 추적, 테러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안는 돈줄을 밝혀낸다. 그에 따르면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제3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대리전을 치르게 하면서 아낌없는 투자를 해왔다. 그 결과, 냉전은 끝났으나, 테러 조직은 살아남았고 테러 역시 살아 남았다. 그들이 오늘날 '흉악한' 테러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테러를 키운 것은 미국과 소련으로 대비되던 강대국들이었던 셈이다. 이 조직들은 크게는 PLO 처럼 거대한 의사국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저자가 '테러의 신경제'라 이름 붙인 사항을 살펴보면, 특히 허약한 나라들이 테러의 온상이 된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도 돈으로 테러를 키우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현재 테러 경제의 규모는 1조 5천억 달러, 영국 GOP의 2배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한다.
정치, 사회, 종교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본 독특하고도 신랄한 보고서. 테러의 정치사회적 신비함 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경제를 들춰내다!
우리는 ‘테러’에 대해서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랍, 아랍인들, 이슬람교, 성전, 반미주의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연상되는 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정치, 사회, 종교적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미국의 석유 욕심 때문에 무고한 이라크 인들이 죽어간다는 비난이 높아지고 있고 서방의 경제적 욕심이 이슬람 테러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테러’ 자체에 대해서는 테러가 어떤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한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테러의 신경제’다. 여기서 말하는 신경제는 기존의 정보통신기술 혁명이 만들어낸 경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 생겨난 지정학적 대변동에 따르는 경제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근 50년에 걸쳐 오늘날처럼 발전해버린 테러와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경제적 개념들을 아울러서 테러의 신경제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테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테러의 주도권이 어떻게 해서 제3세계에 주어졌는지 테러를 둘러싼 엄청난 자금의 흐름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설명하면서 테러의 신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테러를 둘러싸고 미국과 영국 등의 서방과 중동, 남미 등의 제3세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부분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테러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부시가 ‘테러 근절’을 외치며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하는 현재도 이슬람의 테러와 서방은 한 통속이기도 하다.
미소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대리전을 자신의 국경 바깥 제3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테러라는 형태로 사주했고, 필요한 경우 기술과 자금을 아낌없이 대주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 사회, 종교적인 대립이 교묘하게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자 많은 테러 조직은 생존을 위하여 무기를 들어야 했다. 이것이 테러의 민영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조직은 PLO처럼 거대한 의사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럴 수 없었던 조직은 사라져갔다. 이제 PLO와 하마스 같은 테러 단체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조직을 ‘경영’하기 위하여 수많은 합법적?불법적 경제 수단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발전한 테러 경제의 규모는 1조 5천억 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영국 GDP의 2배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테러리스트들과 서방은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거래를 하기도 한다. 이 일관성 없는 작태가 결국은 경제적 이득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유대가 세계적인 원수지간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들을 뛰어넘어 테러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저자는 합의의 여지가 매우 적은 정치적, 종교적 틀을 벗어나 경제적 틀로 테러를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물론 서구인의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가기도 한다. 테러를 오직 경제적 틀로만 분석한다는 것은 테러의 동기, 서방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감의 원인 등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희석시킬 우려가 있는데 실제로 이 책에서는 그런 저자의 관점이 간혹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테러에 대해 부정확한 추론과 근거 없는 억측으로 독자들을 혼란과 오해로 빠트리는 그런 책은 아니다. 저자는 수천 건의 문서와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서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서방과 이슬람의 과두 체제들이 돈과 권력과 지역에서의 패권 유지를 위해 얼마나 잔인 하게 폭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교묘하게 은페할 수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테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거나 남의 일이려니 하며 관심을 끊어버리는 태도를 버리고, 보다 균형적인 관점을 가지고 테러를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 1960년대 독일의 학생시위 운동에서 태어난 단체다. 창설자는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군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이다. 계급 투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그는 전쟁에 도취된 군인이기 이전에 생을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가망 없는 전투를 기적적인 승리로 이끈 롬멜의 용기와 지략
히틀러의 추종자에서 히틀러 저항세력에 가담한 롬멜의 분노와 거짓으로 위장된 죽음
제2차 세계대전의 유명한 독일 장군 에르빈 롬멜의 신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롬멜 신화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있어 ‘사막의 여우’이자 영웅이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군인을 혹사시켰던 장본인이며 나치에 협력한 범죄자였다. 그 ‘롬멜 신화’의 주인공이 언제 히틀러 시스템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는 정확하게 언제 나치에 가담했으며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전쟁 범죄에 관해서 정확하게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 또한 범죄자인가? 히틀러의 어떤 점이 순수한 군인정신을 지닌 그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롬멜은 무의미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히틀러의 추종자로, 생의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한 군인이었다. 그가 히틀러 저항세력에 가담한 당시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롬멜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 하였고, 다가오고 있는 파멸의 늪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부 연합군과 단독강화조약을 계획했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의문 속에 남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충분한 자료조사를 통해 인간 롬멜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그는 육군원수인 롬멜이 단지 히틀러의 단호한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독재자에 대항해 저항세력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은 기존에 다루어졌던 이야기들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새롭고 흥미로운 롬멜의 내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원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편지들은 완전하게 남아있고, 직접 손으로 쓴 일기, 명령기록들과 메모는 군인으로서의 그의 인생을 빈틈없이 자세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롬멜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이 기록들을 뒷받침하고 덧붙이는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이렇듯이, 일기, 편지, 회고록들은 이 유명한 2차 세계대전의 독일 장군의 모든 삶의 단면마다 뚜렷한 상을 전해줄 것이다. 그 모습은 전후시대의 추악한 변명뿐만 아니라, 히틀러 시대를 향한 혹독한 비판과도 틀린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 속에 내재된 모순과 악에 맞서 변화하는 내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 슈투트가르트의 시장으로서 과거 독일연방공화국의 중요한 지방 정치가가 되었다. 1977년 10월 18일 밤, 적군파(RAF) 테러리스트였던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구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 장 칼 라스페(Jean Carl Raspe)가 슈투트가르트 수용소에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이후, 1999)의 후속편이다. 1968년 이후 80∼90년대에 걸친 신좌파의 정치적 진로를 평가하고, 신좌파를 계승하는 동시에 그와 단절하는 새로운 운동의 흐름으로서 자율적 사회운동들(Autonomous social movements)을 면밀히 분석한다. 1968혁명에 참여했던 이른바 ||^68년 세대||^는 최근 유럽 각국의 선거에서 좌파 물결을 일으켰다. 또한 이른바 ||^68년 이데올로기||^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자에 반대하는 ||^제3의 길||^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신좌파는 자신이 비판했던 구좌파의 권위주의, 관료화, 운동과의 단절 등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으며, 그에 따라 끊임없이 도덕적 추문만을 정치적 쟁점으로 생산해내고 있는 실정이다. 구좌파를 비판했던 신좌파가 구좌파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역설적 상황. 자율운동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운동의 자율성이란 형이상학적인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렴되어 나타난 구체적인 쟁점이다. 첫째 정당과 노동조합으로부터 사회운동의 독립성이다.유럽의 경우 정당-노동조합의 ||^동맹||^은 통상적인 정치 현상이다. 자율운동은 정당 내지 노동조합이 지향하는 선거 정치, 위계적인 조직화, 민족국가 중심의 의사결정구조 등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소수 민족의 분리주의 운동은 정당 내지 노동조합의 권위주의 질서를 용인하는 한 자율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같은 자율운동의 한 사례는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지역적 자율성이다. 둘째 전통적인 지도―피지도 관계에 대한 거부이다. 지도―피지도 관계가 결국 지배―피지배 관계로 변형되었다는 것은 이미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의 자율성||^을 주장했을 때 드러났던 바와 같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내용은 페미니스트운동의 ||^일인칭의 정치학||^으로부터 발전한다. 페미니스트운동은 민족만이 아니라 계급까지도 비판하면서, 어떤 명령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동했다. ||^노동의 자율성||^이 여전히 계급 우위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일인칭의 정치학||^은 자주관리, 자기규율을 보다 근본적으로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세 번째 의미는 반핵운동, 점거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반핵운동은 당 지향적정치를 강조하는 맑스레닌주의 집단으로부터 자율성을 주장했고, 점거운동은 집단적인 삶 속에서 대항문화를 창출해냈다. 직접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형태란 결코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었으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전복을 겨냥하는 대항문화운동은 권력장악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화가 공동체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핵심임을 드러냈다. 물론 여러 자율운동들은 자신들을 결코 물신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의 진정한 자율성 형태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찬성하지 않는다. 이상의 자율성의 의미는 수많은 자율성 형태들을 관통하는 몇가지 일관성일 뿐이다.
이 책은 훌륭한 사례 연구의 전범을 보여준다. 까다로운 이론적 논의에만 매몰되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사례만을 열거하는 데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관찰하고 면담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사건들을 재구성할 뿐만, 그로부터 출발하여 난해한 이론적 논의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 때문에, 안토니오 네그리의 노동자 자율성, 셀라 벤하비브의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또다른 이론적 권위에 기대지 않고, 난해한 논리를 구사하지 않으면서, 강한 설득력을 보여준다.이것은 ||^논쟁 없는 논쟁||^으로 희화화할 수 있는 한국의 이론적 풍토에 귀중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 일련의 과감한 행동에서 한 적군파 팀은 슐레이어를 납치하여 비밀 장소에 붙잡아 놓고는 적군파의 창시자인 안드레아스 바더 Andreas Baader를 포함해서 적군파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