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필요에서 인류학 관련서들을 읽고 있는데, 가령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읽는다고 하면 그리 머쓱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획 아이템'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하지만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1) 같으면 어떨까. 강의와 원고에 치여 지내느라 진득하게 붙들지 못하고 해를 넘기게 된 책인데, 장정일의 서평을 읽으며 한번 더 눈길을 주어본다. 김정일 사망으로 어수선한 남북관계를 고려하면(그는 죽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수호천사 노릇을 하는군), 다시금 '규율권력'과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사유에 차분히 귀를 열어도 좋겠다(이건 강의록이니까). 물론 바쁘신 분들은 아래 서평만 일독하셔도 된다... 

 

 

 

시사IN(11.12. 24) 당신은 왜 새벽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나?

 

1970년에 발표된 강용준의 중편소설 <광인일기>의 말미에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도덕 사디즘의 창시자’로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배운 작가는 광복 뒤에도 일본 서적을 입수해서 읽었고, 그런 경로를 통해 푸코를 실시간으로 접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푸코의 기본 개념 가운데 하나인 ‘규율 권력’을 ‘도덕 사디즘’으로 번안한 것이다. 저 용어가 일본을 경유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푸코의 규율 권력은 ‘일망감시(판옵티콘)’ 체계와 짝을 지워 설명하면 한결 이해하기 쉽다. 일망감시 체계란 감시자(간수)가 피감시자(죄수)의 밖에 있는 게 아니라 피감시자의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형국을 일컫는다. 위·간·허파처럼 감시자가 피감시자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상태란 예컨대, 자동차 운전자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정차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추고 서 있는 일과 같다. 교통질서라는 명분의 도덕 확립을 통해 이와 같은 일망감시 체계가 완성되고 나면 권력은, 경찰의 수와 CCTV 설치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일망감시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내부에 감시자를 모신 우리는, 권력이 다루기 좋은 균질한 시민이 된다.

 

강제나 무력이 아니라 피통치자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규율을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근대적 권력의 특징에, 푸코는 규율 권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와 같은 규율 권력을 통해, 아무도 보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고 있는 운전자들은 모범 시민으로 훈육된다. 하지만 그처럼 규범을 잘 체화한 시민들이, 푸코를 읽은 바 있는 한 눈썰미 있는 소설가의 눈에는, 갈 데 없는 도덕 사디즘의 희생자로 보였던 것이다.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때는, 문학평론과 문화 이론에 수시로 인용되던 1990년대부터다. 그는 당시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과 연계되면서, 대표적인 해체주의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스의 수덕주의(修德主義)에서 현대의 최종 해결책을 찾은 그를 해체주의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론이 중심·위계·기원을 의심하고 전복하는 두 사조와 흡사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가 애용한 ‘계보학적 방법론’이 그랬다. 그의 계보학은 권력과 한 몸인 지식 권력이 옹호하는 기원과 단일성(전체성·통일성)에 저항하면서, 지식 권력이 배제하거나 무시했던 주변 현상에 주목한다. 학술원에 의해 부적격 처리된 ‘뒷담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온 계보학은 신성한 기원과 역사의 단일성에 균열을 냈다.

 

 

계보학의 위력은 푸코가 차례대로 행했던 광기·정신병원·감옥·성·비정상인에 대한 일련의 연구들로 입증됐다. 푸코는 기존 인문학이나 역사가 다루지 않았던 위와 같은 연구를 통해, 권력이란 왕과 같은 개인 인격체나 그가 불시에 행사할 수 있는 비축된 폭력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성(정상인)과 광기(비정상인)를 구획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는 미시적이고 편재적인 지식 효과라는 것을 밝혔다. 지식을 권력의 합목적성에 딸린 시녀로 보는 이런 생각은 지식을 신의 선물이자 인간의 위대성으로 여겨온 서구 지성사의 면면한 흐름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며, 서양의 근세를 만든 계몽주의 역사관(앎을 통해, 무지로부터 깨어남!)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에서 <데리다와 푸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인간사랑 펴냄, 1991년)을 쓴 마단 사럽은 푸코의 계보학을 일종의 역사 투쟁이고 지식 비판이라고 평한다.

 

어렵고 낯선 온갖 사상과 철학은 매스컴과 시간이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한번 녹기 시작한 것은 어느덧 사라지기 마련이다. 규율 권력·일망감시·계보학 같은 도발적인 용어를 일반 상식으로 헌납한 푸코는(수능시험에도 나온다!), 한동안 ‘노틀’ 취급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대처리즘(Thatcherism)의 나라에서 쏘아올린 신호탄에 따라 ‘푸코 르네상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귀환한 배경은 이렇다. 첫째, 1984년에 푸코가 죽기 전에 했던 몇 년간의 강의록이 2003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다. 둘째, 푸코가 말년에 제시한 ‘통치성’이라는 개념이 1990대 초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를 해명하는 데 요긴했다.

 

왕의 귀환에 결정적 구실을 한 책이 바로, 이만큼 장황했던 서두를 필요로 했던 <안전, 영토, 인구>이다. 이 책의 모태가 된 것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한 강의이다. 푸코는 대학에 미리 제출한 강의 제목을 ‘안전, 영토, 인구’로 했으나, 넷째 주 강의에서는 이 제목보다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고, 실제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통치성’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초점을 명료히 했다. 역사 이성 밖에서 늘 기존 역사 이성과 대결했던 푸코는 이 책에서도, 권력 담지자로서의 국가나 국가 권력에 의해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한다.


‘죽이기’ 대신 ‘죽게 내버려두기’

우리나라 사전에서 ‘통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지역이나 주민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18세기에 발견된 통치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푸코가 가리키는 그것은 정치경제학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동시에 뜻한다. 이전의 권력이 ‘죽게 하거나(적극적), 살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었다면 18세기에 생겨난 새로운 권력은, ‘살게 하고(적극적), 죽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다. 18세기 이전의 권력과 새로운 권력은 전자의 권력이 칼에서 나오고, 후자의 통치성이 경제에서 나오는 만큼 큰 차이가 있다.

 

2005년, 고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18세기부터 도시들은 시장을 위해 권력의 상징인 성벽을 허물었다. 푸코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이미 18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오늘날 세계인이 목숨을 거는 ‘자기계발의 주체’도 그때부터 생겨났다. 이 책에서 푸코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주권자의 힘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이 개념화했던 일망감시 이론을 비판한다. 거기에 반해 통치성 개념에는 정치적 힘을 지닌 여하한 주권자도 없다고 정의된다. 만약 당신이 한 새벽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면, 그것은 고작 금지(일망감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다. 일망감시는 한층 보강된 형국으로 통치성 속에 봉합됐다.(장정일_소설가)

 

11.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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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유죄판결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고를 옮겨놓는다. 박경신 교수의 시론이다.

 

 

한겨레(11. 12. 24) 정봉주 유죄판결은 법적 착시현상

 

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고 개입할 필요는 없다. 상대성이론은 국가 개입 없이 발견되었고 아이폰은 국가 지원 없이 잘 만들어졌다. 사법부가 모든 말의 진위 여부를 결정할 필요도 없다. 안기부 엑스(X)파일 검사가 실제로 떡값을 받았는지, <조선일보> 사장이 장자연의 성상납을 받았는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등등 어떤 명제들은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인 ‘신은 존재하는가?’도 그 진위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천년을 잘 살아왔다.

국가가 국민이 한 말이 허위라고 해서 잡아 가두거나 국가가 독점하는 기타 강제력을 행사하려면 우선 그 말이 허위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번 정봉주 전 의원의 유죄 판결은 이 당연한 원리를 송두리째 무시한 판결이다. ‘비비케이(BBK)가 이명박 소유가 아니다’라는 입증이 없는 상황에서 정봉주 의원에게 ‘네 말이 진실이라고 입증하지 못했으니 유죄’라고 하는 판결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판결이다.

대륙법과 영미법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진실인지 입증하지 못한 명제의 책임을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지우는 나라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야훼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 죄로 모두 감옥에 가야 할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입을 다물라’는 것인데 이런 규범 아래서 문명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상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서는 다행히도 우리 대법원이 정확하게 말했다. “안강민·홍석현·이학수가 법정에 출두해서 ‘우린 떡값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증언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를 입증하지 못한 책임을 노회찬에게 지울 수 없다”고. 이 대법원 판결의 원리를 완전히 뒤집은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깊게 우리 속살을 도려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이다.

이상훈 대법관은 ‘비비케이가 이명박 소유이다’라는 명제가 허위인지를 판시하지 않고 정봉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틀림없이 죄목은 ‘허위사실 공표’인데 허위인지를 판시하기 전에 정봉주에게 자신이 한 말의 근거가 없다고 유죄를 때렸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형법 307조 1항이 진실인 경우에도 명예훼손의 성립을 인정하기 때문에, 진실이든 허위이든 어차피 유죄이니 기소 죄목에서는 ‘허위’가 위법성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진위를 판정하기도 전에 말한 사람이 얼마나 근거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따진다. 피고인이 한 말의 진위를 밝힐 생각은 안 하고 ‘피고인 너 그런 말 할 자격 있느냐’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권력비리는 캘 수가 없다. 권력비리는 침묵과 어둠의 장막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들은 이런 장막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막을 뚫고 간신히 올라오는 단서들은 당연히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서들을 제시할 수조차 없다면 비리의 고발은 불가능하다.

장자연이 남긴 유언장과도 같은 문서, 안기부가 본의 아니게 남긴 엑스파일, 외국 과학자들과 언론이 광우병에 대해서 한 말, 누리꾼들이 황우석의 테라토마 사진을 보고 제기한 의혹들이 바로 그러한 단서들인데, 이 단서들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묻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누가 비리 고발을 하겠는가. 정봉주도 비비케이의 소유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침묵의 장막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어렵게 어렵게 얻어낸 단서들을 국민들과 공유한 것뿐이다.

지금 할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진실임에도 명예훼손 책임을 지우는 형법 307조 1항을 꼭 폐지해야 한다. 물론 이번 유죄 조항은 선거법 조항이지만, 명예훼손 논리를 대입하였음이 분명하다. 둘째, 사법개혁이다. 법관소환제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법관이든 검사든 국민의 위임 범위 안에서 활동한다는 명제를 확실히 상기시켜줘야 한다. 국민은 누구에게도 국민의 말이 진실임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국민을 처벌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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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그렇다. 데버러 로드의 <대학이 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진실>(알마, 2011). 원제는 <지식의 추구(In Pursuit of Knowledge)>(2006). 저자는 스탠퍼드 법과대학 교수로 오늘날 대학의 임무와 지식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성찰의 도마에 올려놓는다. 엊그제 구입한 책인데, 마침 자세한 서평기사가 올라왔기에 챙겨놓는다. 미국 대학의 실상에 대한 폭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향신문(11. 12. 24) 미국 대학은 세계 최고라는 신화…그 허구를 벗긴다

 

적어도 겉에서 보자면, 오늘날 미국의 대학들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다. 전 하버드대 총장인 데릭 복은 “연구조사의 역량, 전문교육의 질, 교육프로그램 혁신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자평한다. 런던타임스에 게재된 조사결과에 따르자면, 세계 최상위 10개 대학 중 7개가 미국 대학이다. 75년 전 미국에서 학사 학위 보유자는 25명 중 1명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상황”이다. 대학교수들의 만족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 총체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90%에 가까운 교수들이 만족한다고 답변”했으며,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교수라는 직업을 택하겠다고 밝힌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80%”에 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데버러 로드(60)는 그 모든 현상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가 보기엔 오히려 모든 것이 그와 반대다. 일단 “대학 소비자들”로 불리는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이다.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지식의 추구라는 본래적 가치”는 가차없이 무너졌으며, 경쟁과 성장의 바이러스가 대학사회를 파고들면서 “대학들 사이의 순위 경쟁이 극에 달해 갖가지 부정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전시행정”을 펼치면서 “명성을 끌어올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을뿐더러, 교수들조차도 이러한 대학 문화를 내면화하면서 “개인적 명성을 쌓는 일에 빠져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대학교수로 25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저자가 오늘날 미국 대학들의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 책이다. 이를테면 대학과 교수 집단에 대한 내부자의 고발인 셈이다. 저자는 “고발이라기보다 성찰”이라고 표현하면서 신중하고 온건한 문체를 구사하지만, 행간에 숨은 비판의 칼날은 예리하다. 게다가 그의 논지는 ‘한국인 저자의 책’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만큼 미국의 대학구조를 수입·추종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이 빠져있는 현실과도 거의 오차 없이 겹친다.

 

저자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대학들 간의 순위 매기기다. 그것은 유럽의 문화와 아주 다른 “미국적 특징”이다. 저자에 따르자면 “대학 순위를 발표하는 자료집의 연간 판매부수는 약 650만부”다. “무료로 배포되는 부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순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최고 행정가들의 주관적 소견,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명성, 예전의 순위 기록에 따른 후광효과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위에 따라 대학에 주어지는 이익 요소들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 행위들”이 빈번할뿐더러 “일부 기관은 사실을 날조”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정해진 순위는 결국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응시생의 수에 영향을 미치고 기관의 의사결정, 정부 지원에서의 우선 순위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순위 경쟁은 “성장주의”와 동행한다. 이제 “성장은 미국에서 대학행정의 기본 원칙”이다. “거대한 건물, 도서관 및 연구실 증축, 예산 확대, 홍보 캠페인의 확장 등”은 “대학의 힘이 커졌다는 환상”을 부여하고 “성취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거대한 제국주의적 건물 증축은 그 자체로 대학의 목적”이 된다. 그런 대결에서 밀려 서열이 낮아진 대학들은 “혁신보다는 모방에 열중하며, 스스로의 장점을 특화시켜 발전하기보다는 명성이 높은 대학을 따라하기”에 급급해진다.

거기에 “미국인이 학교에서 얻는 배움보다 지위에 더 가치를 두는 풍조”가 결합한다. 그것은 200년 전부터 이어져온 “미국의 문화”다. 고등교육을 족보나 혈통의 확보 같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얘기다. 저자는 “‘대학에 다닌다는 것에 미국만큼 중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나라는 없다”고 단언한다. “미국에서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과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명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런 관습에 물든 “고등교육 소비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최첨단 시설 등, 대학에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실린 만평을 사례로 든다. 여고생이 상담교사와 대학 진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갈 대학은) 라커룸이 넓어야 해요.” 그러다보니 대학은 “구내식당의 메뉴 개선과 개인 운동 트레이너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최상위권 학생들을 유치하려는 대학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 간의 서열을 매기는 데 직결되며, 궁극적으로는 “대학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장학금 제도는 “점점 더 성적 중심으로 운영”된다. “장학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들에 대한 지원은 축소되고, 소득계층의 밑바닥에 속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교수생활을 해온 25년 동안 “대학 교육과 입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현저히 증가한 반면, 정부 지원은 크게 감소한 것”에 주목한다. 미국의 전체 예산에서 “고등교육에 할당되는 재정 비율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지만, 수업료는 두 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위 25%의 3분의 2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데 반해, 최저임금 생활자 25%의 집단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생의 5분의 1만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연수입 20만달러가 넘는 가정의 자녀 중 약 40%가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입법자들은 그들만의 십자포화에 갇힌 채” 이 문제의 해결에 등한하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는 대학교수들도 점점 더 “명성의 추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물론 “인지도를 향한 욕구는 학문적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긍정적이지 못한 부산물”만 잔뜩 쌓여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저자는 “겉멋만 부린 문체, 난해한 주제, 과도한 인용과 참조”에 눈살을 찌푸린다. 이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교수들의 행태는 대학 콘퍼런스, 대담, 토론회 등과 같은 사실상 모든 형태의 교류와 모임”에서 드러나는데, “이목을 끌려고 애쓰는 그들의 행동은 마치 공작새의 구애의식과도 같다”고 조롱한다. “지적 깃털을 한껏 부풀려 과시”하면서 “최고 실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애쓰거나, 그 세계에 발을 디디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을 고민하면서 주변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지위와 명성을 향한 추구에는 “필수불가결하게 결핍”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구조적 필연이다. “신진 교수의 대다수를 공급하는 주요 대학에는 그들이 배출한 교수들이 들어설 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다수의 신진 교수들은 “애초에 지원했던 곳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기관에 자리를 잡거나 겸임교수로 전락”한다. 그래서 “자기과시를 향한 집착은 종종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알력 싸움에서 승리자는 극히 드물고, 패배자는 사방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적) 자본이 자본을 낳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교수들이 명성과 지위를 향한 추구에 점점 더 매달리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지식인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지만, 제대로 된 ‘공적 지식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지나친 실용주의” “과도한 자본의 지배”로 아우른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실용성은 20세기 초반부터 “필요한 것”으로 제기돼왔다. 예컨대 철강왕 카네기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 물질적 부를 좇는 데 필요한 교육을 대학이 효과적으로 제공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 전역에 수천개의 도서관을 기부한 그조차도 “대학의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 대학의 목표는 여전히 “학생의 정신적, 윤리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었다.

이제 대세는 바뀌었다. 저자는 “오늘날 대학은 실용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방향으로 변화”했으며, “전례없는 수준에서 대학의 자본화”가 이뤄졌다고 진단한다. “명예와 지위만을 추구”하는 교수들은 이런 문제에 저항하기보다는 포섭돼 있다. 그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공적인 영역의 일들에 영 무심하다. 그들은 다만 “지원비가 현저히 깎인다거나 의무사항이 늘어나는 등 자신의 이해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때에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많은 대학에서 나타나는 이 “끈질긴 개인주의는 자기 영속화”하면서 “지적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책임감을 지닌 교수는 점점 줄어들고 대학에서의 양질의 교육도 붕괴”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대학사회를 비판의 시선으로 더듬은 저자는 “해결책은 원칙적으로는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요원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그는 대학과 교수사회를 향해 윤리의식과 책임감을 주문한다. “대학기관과 교수협회, 재단 및 비영리 단체는 기존의 순위 체계를 개선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특히 교수들은 특정 지위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가 강조하는 요체는 “지식의 추구”라는 대학 본연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해야 “어느 정도의 방향 수정”이 가능해지며, 실용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대학 현실과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다는 고언이다. 저자는 현재 스탠퍼드대 법과대학 교수이며, 같은 대학 윤리센터의 소장으로 있다.

 

11. 12. 23.

 

 

P.S. 기사를 읽다 보니 생각나는 책은 강준만 교수의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인물과사상사, 2011)이다. 특이하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책인데(저자가 너무 다작이어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중앙일보만 예외적으로 비중있게 다뤘다. 참고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중앙일보(11. 12. 03) 세계의 권력 모이는 미국 그 권력 좇는 아이비리그 학생들

 

세계 대학의 경쟁력 순위를 보면 상위권은 대개 미국 차지다. G2로 불리는 중국에서의 조사도 그렇다. 2011년 8월 중국 상하이교통대 발표를 보면 미국 대학 17곳이 ‘톱20’에 들어 있다. 미국 경쟁력의 근원은 대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핵심이 아이비리그다. 국내 지식인 엘리트의 위선을 줄곧 비판해온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이번엔 아이리비그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저자는 아이비리그를 중심으로 미국 대학의 역사와 명암을 두루 재조명했다. 문헌과 언론보도를 골고루 섞어 인용·분석하는 ‘강준만식 글쓰기’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이비리그는 하버드·예일·펜실베이니아·프린스턴·컬럼비아·브라운·다트머스·코넬대 등 미 동북부에 있는 여덟 개의 명문 사립대를 가리킨다. 조지아대에서 석사를, 위스콘신대에서 박사를 받은 저자는 올해 초부터 컬럼비아대에서 교환교수를 지내며 이 책을 구상했다. 아이비리그에 대한 동경이 심한 한국의 현실을 되돌아보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아이비리그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비리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선망과 숭배는 대단하다. 작은 지역으로 갈수록 더한데, 자식을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내면 축하 파티를 여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에 그 대학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집에 그 대학 깃발을 내걸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름만으로 ‘최고’를 상징하는 아이비리그. 스카이(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영문 이니셜)를 갈망하는 한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등록금 고민하는 대학생, 우리의 입시과외학원을 닮은 사설 컨설팅업체, 자녀 교육에 올인하며 헬리콥터처럼 아이를 곁을 맴돈다고 해서 붙인 ‘헬리콥터 부모’ 등도 우리 현실과 유사하다. 한국과 다른 게 있다면 미국의 평범한 서민층은 자식을 아이비리그에 보내려고 그리 심하게 애쓰지 않는데 비해 한국의 서민층은 ‘처절한 교육 투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일방적으로 미국 대학을 비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몰리는 배경에 주목한다. 영어는 물론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데 세계의 문제를 직접 다뤄본 당사자에게서 경험을 직접 전수받는 것이야말로 미국 대학의 강점이다. 국제사회의 뉴스 메이커들에게서 직접 얘기를 듣는 이점도 있다. 당장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살아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장점으로 꼽으면서, 저자는 이 같은 아이비리그의 매력을 ‘권력 감정’과 연관 지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각종 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 세계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아이비리그는 세계 인력의 양성소로 자리매김된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공정성이다. 엘리트 권력 구조와 직결되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신입생 충원 관련 시비가 왕왕 벌어진다. 입학사정관 제도의 주관적 요소가 문제가 되는 것인데, 아이비리그에서 실시하면 무조건 다 좋다는 식으로 우리 대학들이 흉내내기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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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아침에 보낸 원고인데 헨리 데이비드 소로(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은행나무, 2011)을 거리로 삼았다. 표제글 자체는 50여 쪽 정도의 짧은 글로 <월든>(펭귄클래식코리아, 2010)에도 부록으로 수록돼 있다. 인용문은 두 번역본 모두에서 가져왔다. 덧붙여 참고한 책은 박홍규 교수의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필맥, 2008)이다.

 

 

한겨레(11. 12. 24) 양심에 따라 살고 있는가? 아니라면 노예일뿐

 

“왜 당신네 미국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나 군인들 말만 듣고 소로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요?”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말이다. 그가 격찬한 소로는 물론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이다. 살아서는 거의 무명인사였고 사후에도 문명에 반대한 자연주의 작가, 그래서 ‘숲 속의 로빈슨 크루소’ 정도로만 알려진 소로는 톨스토이의 말을 통해서 비판적 사상가이자 저항적 지식인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생활한 경험을 적은 <월든>의 저자로 이름이 높지만, 톨스토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그보다 먼저 발표된 <시민의 불복종>(1849)이었다. 애초엔 32살의 소로가 한 잡지에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소로는 무엇을 말했나.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금언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소로는 당시 멕시코 전쟁(1846~1848)에 나선 미국 정부를 맹렬히 비판한다. 영토 확장에 욕심을 부린 미국이 텍사스를 합병하면서 벌어진 이 침략전쟁에 대해 소로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상설 정부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한 결과”로 일어났으며 국민들은 이런 처사를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다음에 국민이라는 게 소로의 기본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법을 존중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어떤 권리인가.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의무”가 소로가 말하는 권리다. 법이 인간을 더 정의롭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존중할 가치가 없는 법을 존중하다 보면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불의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이 소로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식과 양심에 반하여 참전하게 된 대령, 대위, 하사, 사병, 탄약 운반 소년병 등의 행렬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만약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행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스로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그림자이자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 된다. 즉 “육신은 살아 있어도 이미 몸의 절반 이상이 땅속에 묻힌 채 장송곡을 듣고 있는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그것은 기계이고 또 노예이다.

그런 신념을 가진 소로가 노예제에 반대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는 대놓고 말한다. “나는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정치적 조직을 한순간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그는 자유의 피난처임을 자임해온 나라의 국민의 6분의 1이 노예이고, 그 나라가 침략국이기도 하다면 정직한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저항이고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만으론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허다한 사람들이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는 소신을 갖고 있더라도 실질적으로 그것들을 종식시키기 위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소로는 꼬집는다. “기껏해야 그들은 선거 때 값싼 표 하나를 던져주고, 정의가 그들 옆을 지나갈 때 허약한 안색으로 성공을 빌 뿐이다.”

투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옳다는 쪽에 표를 던지지만 옳은 쪽이 승리를 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가볍게 표시하는 정도다. 소로는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수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그가 납세를 거부하다가 투옥당한 일은 한 가지 사례다. 단 한사람의 시민이라도 부당하게 감금하는 정부하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역시 감옥이라고 소로는 말했다. ‘꿈꾸는 자’와 ‘달리는 자’가 잡혀가는 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11. 12.. 23.

 

 

 

P.S. 글의 말미에서 '꿈꾸는 자'와 '달리는 자'란 말이 염두에 둔 건 물론 송경동 시인과 정봉주 전 의원이다. '시민 불복종'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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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리해야 할 원고를 보내고 잠시 포털을 둘러보다가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나꼼수 신드롬'과 함께 2011년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 중앙일보가 진중권 씨에게 촌평을청탁한 모양인데,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로 답해왔다. '나꼼수'에 대한 견해와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동의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다. 

 

 

중앙일보(11. 12. 23)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

 

‘올해의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내년의 인물’이라 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안철수는 전혀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 출마선언과 더불어 갑자기 한국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시장이 되어 있을 게다. 하지만 압도적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이 시민운동의 대명사는 아름다운 양보에 멋진 승리로 보답했다.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이 외려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는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력한 후보의 자리를 턱 없이 낮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게 양보했고, 그 행동을 통해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리며 일거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 여론조사에서 그는 여전히 박근혜 후보에게 10% 포인트 정도 앞서고 있다.

흔히 김영삼,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 부르나, 안철수의 행보는 이 노회한 이들의 계산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정치적으론 어리숙해 보이는 그에게서 어떻게 그런 묘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안철수는 자신의 후보 사퇴가 가져올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사퇴는 그야말로 아무 계산이 없는 순수한 희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이 정치9단의 노회함을 뛰어넘는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꼰대와 멘토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다. 한국은 이미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낡은 산업사회의 삽질 경제 리더십. ‘CEO 대통령’을 자처하는 그 분은 사실 공사판 현장감독에 가깝다. 이를 시대착오라고 느끼는 대중은 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그리고 그 영웅을 IT산업에서 배출된 디지털 유형의 CEO에서 찾았다.

 

‘롤 모델‘이라는 말이 있다. 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롤 모델이 사회주의적 ’전사’였다면, 탈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의 롤 모델은 자본주의적 영웅이다. 안철수는 IT 분야에서 성공한 CEO이고, 그와 단짝을 이루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주식투자의 전문가다. 한 마디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삶의 목표는 곧 안철수 혹은 박경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형상을 닮으려 한다.

취업난의 시대에 가장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민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낡은 산업사회의 ‘꼰대’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쐬며 일하려고만 한다.” 이와 달리 안철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기꺼이 그들의 ‘멘토’가 되어 준다.

복지에서 시장개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메시지는 나쁘게 보면 허무한 위로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철수는 다르다. 그는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짚어주며, 추상적으로나마 문제의 해결방향을 지시한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 그 속에서는 거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중소기업이 발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용의 대부분을 창출하는 것은 중소기업. 이러니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현 정권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대기업들은 하나 같이 잘 나가고 있으나, 현 정권이 약속했던 떡고물(이른바 ‘낙수효과’)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떡을 먹으면서 고물 하나 안 흘리나?” 성장에 대한 기대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성장도 제대로 안 되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찾아 왔다. 그럼 이제 방향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성장정책에서 비롯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복지’를 떠든다. 복지를 늘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나, 그보다 시급한 것은 시장개혁,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철수가 던지는 메시지다. 이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다.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시장주의자, 이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상식적 보수주의자다.

대안정당이냐 정당대안이냐
역설은 그의 보수적 메시지가 이 사회에선 졸지에 급진적 목소리가 된다는 것. 시장개혁을 하려면 대기업에 칼을 대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맡겠는가? 대기업이라는 고양이 앞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그저 겁먹은 쥐에 불과하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구태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두 정당이 결코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제가 못 된다는, 근원적 절망이다.

일찍이 진보정당은 그 절망에서 만들어졌으나, 그들은 제 존재의 의의를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한때는 그들도 참신하여 10석의 의석과 14%의 지지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시대의 이념을 정체성으로 가진 진보정당은 정보화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산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중에게 접근할 적합한 소통(채널)의 문제 이전에 그들에게 던질 메시지(콘텐츠) 자체의 한계다.

한때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대안정당(“제3정당”) 얘기가 떠돌았으나, 안철수 자신이 부정함으로써 논의는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철수는 ‘대안의 정당’이 아니라, ‘정당의 대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 없이 통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안철수는 아직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치를 하려 한다면, 그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역설
제대로 된 보수가 없고, 진보마저 ‘대안’이 못 되는 상황에서 ‘정당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안철수라는 이름의 상식적 보수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역시 대중이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보수의 미덕(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정의롭게 환원한다.’ 이처럼 비정치적이면서 고도로 정치적인 메시지가 또 있을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안철수를 즐겨 ‘또 다른 이명박’이라 부른다. 그들의 말대로 안철수 열풍은 디지털 버전으로 진화한 이명박 신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안철수의 ‘상식’은 그 어떤 진보적 구호보다 급진적이다. ‘시장의 개혁.’ 거기에는 엄청난 저항과 반발이 따르지 않겠는가? 물론 그가 이 일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그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짚었다.

안철수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분배’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며 재산을 ‘기부’하는 것. 이는 철저히 보수주의의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보수가 미덕과 가치를 가진 합리적 보수로 변모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그처럼 커다란 진보가 또 있을까? 이것이 안철수 현상의 마지막 역설이다.(진중권_시사평론가)

 

1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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