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한국과 러시아문학, 1896-1946‘을 부제로 한 책이 나왔다. 러시아문학자 김진영 교수의 <시베리아의 향수>(이숲). 이 주제에 관한 국내 논저 가운데 가장 폭넓고 깊이 있는 저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연구해온 학자가 방대한 기록을 참고하고 분석과 성찰을 거듭하여 완성한 책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은 문학 이상의 현상이었다. 궁핍했던 시대를 비춘 거울이자 대리 발언대로서 다른 어떤 외국 문학보다도 깊은 반향을 일으킨 휴머니즘 교과서였고, 근대 지식과 감성과 문화를 유입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 책은 1896년 조선왕조 사절단의 첫 러시아 여행에서부터 1946년 이태준의 첫 소련 여행에 이르는 50년간 러시아 문학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번역되고 읽혔는지, 또 러시아/소비에트 러시아의 표상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

수년 전에 대학원에서 한러 비교문학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런 책이 나와있었다면 궁색한 강의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국외에서도 좋은 학술서가 그 이후에 나왔다). 여하튼 유용한 참고서도 마련된 김에 한러 비교문학의 몇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1-2년 내로 별도의 강의를 기획해보고 싶다.

지난 달인가 다룬 적이 있는데 러시아문학과 한국문학에서의 시베리아를 다룬 책으론 이정식의 <시베리아 기행>(서울문화사)도 유익한 참고자료이다. 시베리아 문학기행도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데 바이칼호가 오염되고 있다는 기사도 어제 읽은 터라 마음이 가볍지는 않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 현대사에 가장 정통하다는 영국의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의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어크로스)이 출간되었다. 주저 <민중의 비극>을 은근히 기대했지만(분량이 무지막지하긴 하다) 러시아 현대사 100년의 압축판으로 대신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러시아 현대사의 권위자인 런던대학교 버벡 칼리지의 올랜도 파이지스 교수는 이 책에서 러시아 혁명을 100년 동안 장기지속된 하나의 사이클로 서술한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대부분의 책들이 혁명이 일어난 1917년 전후의 짧은 시기의 사정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올랜도 파이지스는 이 책에서 혁명의 기원에서부터 독재, 그리고 소련 몰락에 이르는 비극적인 과정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인류 최대의 유토피아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에 대한 이상이 어떻게 현실에서 왜곡되고 실패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레닌과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에서 고르바초프의 개혁 이후 소련 몰락에 이르는 전 과정을 혁명의 계승과 진행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그러니까 러시아혁명사를 상당히 확장된 스케일로 재검토한 책이다. 그럼에도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게 강점. 더 자세한 혁명사를 원한다면 저자의 <민중의 비극>을 참고하면 되겠다(1891년부터 1924년까지를 자세히 다룬다).

파이지스의 책으론 러시아 근대 문화사를 다룬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가 처음 소개되었고 또다른 대표작으로 스탈린시대를 조명한 <속삭이는 사회>(교양인)도 번역돼 있다. 이제 이름을 기억해두어도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일정이 없는 한 주말의 일과는 강의자료를 만드는 일로 채워진다. 매주 적지 않은 강의를 하다 보니 강의자료를 만드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때로는 몇 시간씩 타이핑을 할 때도 있다.

아침에 떨어진 프린터 토너를 오후에 이마트에 들러 사온 이후엔 저녁을 먹은 시간을 제외하면 내내 강의자료를 만들고 프린트하는 일을 반복했다. 다시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 있어서(과열인가?) 머리를 식히며 시집을 펼쳤다. 보드카의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것 비슷하게.

86년생 시인 송승언의 시집 <철과 오크>(2015)에서 아무 곳이나 펼쳤는데 ‘새와 드릴과 마리사‘가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오규원과 박상순을 연상케 하는 시인이다(안 그래도 박상순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문학과지성사)이 최근에 재간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오규원을 떠올린 건 ‘골목‘ 때문일까?

골목은 차다 골목은 반짝인다 골목은 깊이를 잃은 채 골목은 갈라진다 골목은 둘로 나뉜다
셋으로도 나뉜다 넷으로도 나뉜다

죽은 새를 주워 저글링을 했다 죽은 새를 양손으로 주고받으며
둘로 갈라지는 골목을 걷는다 셋으로 갈라지는 골목을 넷으로 갈라지는 골목을

걷는다 의자가 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의자 하나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의자 둘...

이 시인에게서, 혹은 이 시집에서 ‘새‘는 어떤 의미로, 혹은 형상으로 반복되는지는 검토해볼 일이지만, 여하튼 죽은 새를 저글링하면서 여러 갈래로 나뉜 골목길을 걸었다는 게 3연까지의 진술이다. 이 진술을 실어나르는 언어의 리듬감이 좋다. 영혼과 성당, 음악 등의 단어가 나오는 다음 두 연을 건너뛰면 마지막 두 연은 이렇다.

죽은 새가 살아나고 반짝이는 날개를 꿈틀거리면 짓눌러 죽은 새로 만드는 일
냉담자들만이 음악을 하지 열심히 하지

지겨울 때까지 그 짓을 했다 더는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둘째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셋째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죽은 새로 저글링을 했다‘와 등치되는 건 ‘음악을 했다‘와 ‘그 짓을 했다‘다. 성당 주변을 빙빙 돌면서 저글링=음악=그 짓을 지겨울 때까지 반복했다는 게 시의 요지.

‘드릴‘과 ‘마리사‘는 시집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 (전후를 살피지 않아) 모르겠으나 시적 화자는 ˝성당에 들지 않고 성당을 뜨지 않는˝ 냉담자로 스스로를 지칭한다. 열심히 음악을 하기에 리듬은 만들어 내지만 죽은 새는 죽은 새일 뿐(혹여 살아나도 죽은 새로 만들 뿐) 의미가 충전되지는 않는다. 무의미의 리듬만 남게 되는가? 일견 그렇게 보인다.

그렇게만 읽혀도 재미있는 시다. 그 재미는 물론 리듬이 만들어내는 재미다. 리듬이 죽으면 송승언의 시도 죽은 시가 될 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 공지다. 현재 진행중인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에 이어서 한우리 광명지부에서는 11월 30일부터 12월 28일까지 5회에 걸쳐서 매주 목요일 오전(10시 10분-12시 10분)에 '프로이트와 함께 읽는 오스트리아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20세기 전반기 대표작가로 국내에 다수 작품이 소개돼 있는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작을 읽는 강의다(슈니츨러는 '문학의 프로이트'로 불린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수강 문의는 02-897-1235/010-8926-5607).


슈니츨러와 츠바이크 읽기


1강 11월 30일_ 슈니츨러, <카사노바의 귀향>



2강 12월 07일_ 슈니츨러, <꿈의 노벨레>



3강 12월 14일_ 슈니츨러, <라이겐>



4강 12월 21일_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5강 12월 28일_ 츠바이크, <체스 이야기>



17. 11. 04.


P.S.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1999)과 비교하며 읽을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심을 먹고(바깥에서 먹고 들어왔다가) 책 몇권을 챙겨서 카페로 왔다. 커피가 괜찮으면서 사람이 많지 않은 카페가 독서카페로는 최적인데 최상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다닐 만한 카페가 동네에 있다(최소한 아메리카노가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보다는 내 입에 맞다. 게다가 동네 스타벅스는 언제나 북적거린다).

그래서 커피 한 잔과 함께 펼쳐든 책이 조지프 히스의 <계몽주의 2.0>(이마)이다. 서두이지만 기대만큼 만족스러운데 번역도 일품이다. 책갈피에서 역자의 이력을 다시 확인할 만큼. 주로 존 그레이 책 번역자로 만난 김승진 씨인데 저자가 아니라 역자를 보고 책을 골라도 되는 역자에 속한다(최근작은 <건강 격차>다).

원서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본 부제는 ‘감정의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다. ‘계몽주의 2.0‘이라는 제목의 취지를 살리자면 ‘몽매주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고 고쳐 말해도 좋겠다. 혹은 ‘이성의 정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아니, 저자도 인용하고 있는 프랭크퍼트의 말과 진단을 갖다쓰자면 ‘개소리의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미국에서는 유명한 정치풍자 프로그램의 진행자 존 스튜어트의 주도로 ‘제정신 회복을 위한 집회‘까지 열릴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온갖 가짜뉴스와 차별적 선동이 판치고 있어서(트럼프 시대를 탄생시켰다) ˝졸지에 미국인들은 정치가 좌파와 우파가 아니라 제정신인 정치와 정신 나간 정치로 분열되는 상황에 처했다.˝

어찌 미국만의 상황일 것인가. ‘정신 나간 정치‘, ‘개소리의 정치‘가 보수를 참칭하고 있는 건 실시간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 나간 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미국과 달리 ‘제정신인 정치‘가 그래도 집권하고 있다는 점이겠다.

그렇더라도 안도할 일은 결코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공유하는 독자라면 <계몽주의 2.0>의 독자로서 최적이다. 제정신의 정치를 수호하기 위한 전선에서 전우들과 함께 읽을 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