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에. 테. 아. 호프만(풀네임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이 너무 길기에 보통 그렇게 부른다)의 대표작 선집이 나왔다. <모래사나이>(창비). 가장 유명한 단편을 표제작으로 삼았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 E. T. A. 호프만의 대표 중단편을 고루 묶은 소설집. 환상과 그로떼스끄의 대가이자 탁월한 심리묘사와 인간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날카로운 탐구로 호프만의 작품들은 도스또옙스끼, 고골, 보들레르, 발자끄, 에드거 앨런 포 등 무수한 작가를 매료했고, 차이꼽스끼, 슈만, 오펜바흐 같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번 창비 <모래사나이>에서는 특유의 기이하고 매혹적인 세계에 정치체제 풍자와 근대 이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중편소설 ‘키 작은 차헤스, 위대한 치노버‘를 국내 초역으로 선보이고, 호프만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걸작 단편 ‘황금 항아리‘ ‘모래 사나이‘ ‘스뀌데리 부인‘을 함께 수록해 호프만 문학의 진미를 두루 맛볼 수 있게 했다.˝

요컨대 호프만 중단편 선집으로 아주 요긴한 번역본이 나온 것. 안 그래도 이번 겨울 독일문학 강의 때 ‘모래사나이‘를 다시 강의하게 되는데 기존 번역판(문학과지성사)과 비교해서 읽어보고 싶다. 더 나아가면, 러시아 작가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를 호프만에서 이어지는 환상문학 계보에 위치시켜서 다뤄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이론서로는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언캐니)과 토도로프의 <환상문학 서설>을 참고할 수 있다.

독일문학과 러시아문학의 관계를 조명할 때 환상문학은 중요한 비교범주다. 이에 대해서 다룬 연구서가 있는지도 찾아봐야겠다. 호프만을 올해부터 강의에서 다루면서 추가로 떠안게 된 과제다. 환상문학의 시학을 구성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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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에 저자는 부제를 제목으로 삼고 싶어했으나 주변의 만류 덕에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스윙밴드)로 낙착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어느 속물의 윤리적 모험‘은 부제로 표지에 어엿하게 박혀있다. 한국일보 박선영 기자의 칼럼집이다.

2013년부터 5년간 지면에 쓴 칼럼을 고쳐묶은 책이건만 과문하게도 저자의 칼럼을 읽은 기억이 없다. 꽤 화제가 되어 책으로까지 나온 것인데도 그렇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걸 하지 않아서 이런 동향에 둔한가 보다. 그럼에도 이렇게저렇게 검색하다가 알게 돼 주문하고 지난주엔가 배송받은 책을 점심을 먹기 전에 잠시 훑어본다. 싱긋 미소를 짓는다. ˝종교는 유머˝라는 자기소개가 허언이 아닌 걸 확인해서다. 칼럼집이 아니라 유머집이라도 해도 믿었겠다(유머집으로 분류한다면 부제는 바뀌어야 했을까?). ‘작가의 말‘의 한 대목.

재밌게 남편 흉보기에 일가견이 있다며 책을 내보라는 제안이 여기저기서 들어왔을 때, 우리 부부의 대화가 다음과 같았다.
˝여보, 나더러 당신 흉보는 에세이를 써보라는데?˝
˝그런 책을 누가 보냐?˝
˝많이 팔릴 거 같다던데.˝
˝고뤠? (진지해진 표정의 남편, 돌연 내 손을 잡으며) 여보, 나를 밟고 가.˝

재밌는 유머집으로도 읽을 수 있는, 그런 중에 독자까지도 ‘윤리적 속물‘(조금은 윤리적인 속물)로 거듭나게 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칼럼집으로 많은 이가 일독하면 좋겠다. 저자가 아니라 악역을 마다하지 않은 남편분을 위해서라도...

PS. 농담이건 아니건 책에 쓴 모든 글이 진담이라는 게 저자의 고백이지만, ˝나처럼 사악한 인간˝ 같은 과장법은 진의를 침식한다. 객관적으로 ‘사악한‘ 인간들이 읽는다면 불쾌하게 생각할 일이다. 지나친 과장은 유머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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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의 윈도우가 업데이트되는 동안 황동규 시인의 <연옥의 봄>(문학과지성사)을 읽는다. 제목과 다르게 작년 늦가을(11월말)에 나온 시집이다(혹은 연옥에서는 11월이 봄인지도). 의당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구매내역에 없어서 어제 뒤늦게 주문했던 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간판 시인이기도 한 그의 시집은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부터 모두 갖고 있는 듯싶다. 대학 첫학기에 ‘대학영어‘를 황동규 교수에게 들은 인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시인은 주로 30년 전 언저리의 모습이다. 어느새 시인도 팔순이고 시집의 다수 시편이 ‘마지막 날‘의 상상과 ‘별사‘로 읽힌다(마지막 시집이 아니길 희망한다). 시집의 문을 여는 ‘그믐밤‘도 그렇다.

여행 도중 받은 아끼던 제자의 부음,
벌써 가는 나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이나 보자꾸나, 민박집 나와 언덕을 오를 때
휴대폰 전짓불이 나갔다.

냄새로 달맞이꽃 무리를 거쳐
반딧불이만 몇 날아다니는 관목 덤불을 지났다.

빛이 다가오는가 했더니 물소리였다.
불빛 낮춘 조그만 방같이 환(幻)한 여울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시만 보더라도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는 시다. 그만큼 황동규 풍이 완연하다(하기야 대다수 그의 시가 그러하다). 일단 그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 시적 페르소나가 따로 없어서 시에서 ‘나‘는 시인 자신이다. 이른바 맨얼굴의 시인이고 따라서 연기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솔직하고 정직하다. 그럼에도 시가 되는 것은 소위 ‘시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그의 언어 구사력과 발견술 덕분이다. 시인은 항상 발견하고 감탄하고 마음 환해진다. 그 환해진 마음을 적는 것이 또한 그의 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여행길에 제자의 부음을 듣고서 별을 보러 언덕에 오른다. 관목덤불을 지나고 여울을 건너 어렵사리 언덕에 올라 별이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본다. 별이 지면 사람도 진다는 오랜 믿음! 그렇게 별과 인간의 운명이 상응하기에 마지막 연에서 별들의 안부를 유심히 관찰한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더 내려오는 별˝이 없자 그나마 안도하며 언덕을 내려온다. 그러자 제자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비로소 절감한다. 그 대목을 시인은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숨죽여 흐느꼈다˝ 정도를 대신하는 시구인데, 이런 대체에 의해 시적 긴장이 만들어진다. 시는 다르게 말하는 방법이기에. 그리고 이런 게 황동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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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 한국학자(연구분야는 동아시아 국제관계까지 포함하지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이 번역돼 나왔다.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의 업데이트 요약판이라 생각하고 원서가 나왔을 때 구입한 기억이 있다(이사한 이후로는 책의 행방을 알 수 없다). 더불어 책이 바로 번역되지 않아서 의아해 한 기억도(책은 2010년에 나왔다). 물론 제목에서 ‘기원‘이 빠진 만큼 한국전쟁을 훨씬 폭넓게 고찰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한국전쟁과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던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석좌교수가 총정리한 한국전쟁의 모든 것. 새로운 사료를 반영하고 아주 쉬운 필치로 써내려 간 역작이다.

저자는 한국전쟁의 발단과 전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저항세력‘과 ‘부역세력‘ 사이에서 벌어졌던 대립,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의해 추진된 일본과 남한에서의 조치, 북한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을 되돌아보며, 이후 분단이라는 형태로 고착된 대결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지 폭넓게 살펴본다.˝

 말이 나온 김에 적자면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0년대에 1권만 나왔다가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2권까지 번역되지 않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하는 저작이 전문연구자들에게만 읽힌다는 건 유감스럽다. 이번에 나온 <한국전쟁>이 그나마 독자의 범위를 넓혀줄 것으로 기대돼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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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도 일을 한 셈이니 여느 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다고 침대에 누워서도(사실은 업드려서도) 아직은 말똥말똥한 상태라 책을 뒤적인다. 내주 강의와 관련된 책도 있고 무관한 책도 있다. 장석주의 <은유의 힘>(다산책방)은 무관한 책인데 손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펼쳤다. ‘시에 관한 책‘도 시집처럼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다가 덮으면 되는 이점이 있다. 그렇게 펼친 곳에 전문 인용된 시가 류경무의 ‘팬지‘다.

비를 기다리며 팬지를 심었지 흙의 자물쇠를 따고
나는 팬지를 거기로 돌려보내지

팬지는 위로만 꽃, 아래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지
나는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었지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나는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지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참 좋은 어딘가로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

팬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네
하나둘 팔랑거리며 팬지는 내 손을 떠나갔네

이 시가 <은유의 힘>에서 인용된 것은 ‘팬지‘가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대신하는 은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적 화자의 연인이었겠다. 다시 보면 시에서 팬지는 팬지로서도 등장하고 은유로서도 나온다. 대략 앞의 두 연과 뒤의 세 연의 팬지는 팬지꽃이고 그 사이 세 연의 팬지는 옛날 연인의 은유로서의 팬지다.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3연)란 고백을 매개로 두 팬지는 연결된다.

장석주 시인의 해설. ˝몸뚱이, 쓰다듬다, 붙어살다, 벌리다 같은 어휘들은 팬지가 성애적 경험의 대상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풍긴다. 한 대상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을 진술하는 이 시가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낭만적 사랑‘이라고 특정할 필요와 근거는 모르겠지만 동의할 수 있는 해석이다. 팬지를 심으며 시적 화자가 떠올린 팬지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4-5연이 그 사랑에 대한 진술인데, 좀 특이하게 묘사된다.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시제상으론 옛날이고, 구문상으로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빛의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줄거리다. 그런데 기억의 주체는 왜 ‘우리‘일까? 이어서 ˝팬지도 지금 그럴까˝라고 궁금해 하는 걸 보면 ‘우리‘에는 팬지가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라고 해야 의미상 자연스럽다. ‘우리‘라고 한 건 미스터리(복잡하게 읽으면 팬지는 ‘우리‘의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다).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도 팬지의 생활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시에서 팬지는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다는 진술에 따르자면 바로 ‘내‘가 팬지였다! 그렇다면 사랑의 주체와 대상, 나와 당신이 모두 팬지라는 것인가? 팬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상을 이끌어내는 시이지만 논리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양한 색감이 팬지의 특징이자 매력일 텐데,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라는 시구는 그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분석적으로 읽으면 처음에 주목하지 않은 부분들에도 주목하게 된다(그렇지만 이 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처음 세 연이다). 찾아보니 팬지의 꽃말은 ‘사색‘(나를 생각해주세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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