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소설의 제목이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문학과지성사). 짐작엔 이인성의 소설 가운데, 가장 편하게, 그리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낯선 시간 속으로>를 강의하게 된 김에 다시 읽어보려 오랜만에 재구입했는데, 다시 읽는다고 한 건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잡지에 발표되었을 때 읽었기 때문이다.

단행본은 1995년에 나왔는데, <낯선 시간 속으로>(1983)와 <한없이 낮은 숨결>(1989)에 이은 것이니 6년만에 나온 작품. 그 뒤에 소설집 <강 어귀의 섬 하나>(1999)가 추가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먼저 절판된다(공식적으론 품절이지만 다시 나올지 의문이다). 현재로선 80년대에 나온 작품집 두 권이 이인성의 대표작이고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이 보너스로 덧붙여진 듯한 모양새다.

잡지에서 읽었다고는 하지만 다 읽은 것 같지는 않고 다 읽는 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한 장면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히 하는 소설이어서다. 문제의 장면은 주인공 화자가 시집을 라면과 같이 끓여먹는 대목으로 ‘나‘는 좋아하는 시를 주저없이 뜯어내 갈기갈기 찢어서는 코펠에 뿌려넣는다. 그러고는 걸죽하게 되도록 끓인다. 그렇게 끓인 다음에 라면과 양념수프를 털어넣고 4분. 언젠가 따라서 해볼지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묘사가 자세하다. 이 대목을 다시 읽는 걸로 오늘의 밤참을 대신한다.

˝뜨거운 김에 눈을 찔끔대며, 뜨거운 맛에 혀를 휘두르며, 김치를 말아 라면을 먹는다. 가끔, 충분히 섞이지 못한 밍밍한 종이 맛이 이물스럽게 목에 걸린다. 꿀꺽 삼킨다. 그래, 내가 너희를 먹는다. 너희를 모두 먹고, 너희 모두만한 시인이 되겠다. 나는 맹세했었다. 오래 전에, 그녀에게. 나는 혼자서라도 그 맹세를 지키겠다. 미치기 전에, 내가 미쳐 사라지면 그녀가 죽는 날까지 울, 그런 미침의 기록인 시를 쓰겠다. 맹세를 위해, 나는 국물 위에 뜬 작은 종이 섬유질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쑤셔넣는다. 꿀꺽 삼키고. 손가락을 빨고. 손가락을 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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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데, 19세기 작가로는 레스코프와 살티코프-셰드린, 20세기 작가로는 알렉시예비치를 남겨놓고 있다(20세기는 가을학기 강의다). 이전에 다루지 않아서 이번에 일부러 집어넣은 작품도 있는데, 레스코프의 <왼손잡이>나 살티코프-셰드린의 <골로블료프가의 사람들>이 그에 해당한다.

반면에 분량 때문에 중요한 작품임에도 빼놓은 경우가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1859)다. 발표시기를 고려하면 투르게네프보다 먼저 다룰 수 있는 작가다. 분량이 부담스럽다는 건 두 권짜리여서인데, 최소한 두 주 정도는 할애해야 한다. 오래전 대학 강의에서 한번 다루고 나도 읽은 지 오래 돼 문득 생각이 났다. 러시아 지주계급의 습속을 다룬 점에서는 고골의 <죽은 혼>(1842)과도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시기적으로는 투르게네프의 <귀족의 둥지>나 <전야>와 비교될 수 있다.

<오블로모프>는 1980년 니키타 미할코프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매우 뛰어난 영화다. 오블로모프 역은 러시아의 국민배우 올렉(올레그) 타바코프가 맡았다. 국내 출시 제목은 <오브로모브의 생애>다(아마도 일역된 제목을 옮겨서 표기가 그렇게 된 듯싶다). 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책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영화를 통해서도 어떤 작품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앞장면만 20여분 정도 봐도 오블로모프란 인물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작품의 핵심도 오블로모프란 인물, 내지 오블로모프적 기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블로모프적 기질의 일례는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습성이다.

번역본은 현재 두 종이 나와 있는데, 욕심으로는 하나 더 추가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과도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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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돈>(문학동네)이 초역돼 나왔다. 정확히 세 보지는 않았지만 전체 20권 가운데 국내에는 절반 남짓 번역된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판으로는 졸라의 작품이 다섯 권째 소개된 셈인데, 이로써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가장 많은 작품을 올린 작가로 등극하는 게 아닌가 한다. 프랑스문학 강의 때는 <목로주점>과 <제르미날>만 대표작으로 다룬 적이 있다. 기회가 닿으면 언젠가는 다섯 작품을(물론 추가될 수 있겠다) 다 읽어보고 싶다. 겸사겸사 다섯 작품을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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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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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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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2 (무선)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7년 11월 21일에 저장

나나 (무선)
에밀 졸라 지음, 김치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21,000원 → 18,9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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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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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촌평과 험담을 자주 늘어놓다가 급기야는 박인환에 대한 책들까지도 ‘업데이트‘ 명목으로 몇권 주문했다. 오래 전에 시집부터 평전까지 뗀 시인인지라 ‘재방문‘이 된다.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 등이 대표작인데 그의 전집을 읽더라도 대표시의 목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명동 백작‘으로도 불렸던 박인환은 시가 아니라 포즈로써 시인이었다.

오랜만에 가을 분위기에 맞기도 해서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을 인터넷에 찾았다(찾은 건 어젯밤이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의 가사가 원시와 약간 달라서 혼동되는 면도 있는데 일단 이런 시다(최종판은 시집에서 확인해봐야겠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시를 읽으면 노래가 자동으로 귓전에 흘러드는 시다. 감상적인 시의 표본이라도 해도 과장이 아니다. 노래 가사와 원시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건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란 시구다. 노래에서는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개사되었다. 이 개사는 누구의 작품인지 문득 궁금한데 더불어 이유도 생각해보게 된다.

개인적인 추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발성상의 문제. ‘과거는 남는 것‘은 순수하게 음성학적 차원에서 조금 불편하다. 특히 ‘거‘와 ‘남‘이 음성모음과 양성모음의 조합이어서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는다. ‘옛날은 남는 것‘에서 ‘날‘과 ‘남‘이 호응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의미론의 문제인데, 한국어에서 ‘과거‘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쓰인다. ‘과거가 있는 사람‘ 같은 표현을 보라. ‘과거는 묻지 마세요‘ 같은 호소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옛날‘은 긍정적, 부정적으로 다 쓰일 수 있지만 ‘사적인‘이라거나 ‘비밀스러운‘이라는 뉘앙스는 갖지 않는다. 과거는 숨겨져 있고 옛날은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이 유명한 시에서조차 ‘과거‘는 숨겨지고 ‘옛날‘에 의해 대체된다. 문득 그런 조처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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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이면 이주의 강의책과 강의자료를 식탁과 식탁 주변에 모아놓는다. 오래된 습관은 아니고 아마도 한두 달 된 듯싶다. 미리 챙겨놓지 않아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취하게 된 대응조처다.

오늘도 행방이 묘연한 책은 다시 주문하고 엊그제 배송받은 책은 또 주문할 수가 없어서(그새 행방이 묘연하다니!) 계속 추적중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가 지명수배중인 책이다(원서와 같이 도주중이다).

책을 찾느라 책들을 뒤집어놓다가 허은실의 <나는 잠깐 설웁다>(문학동네)를 발견하고 펴들었다. 잠깐 보다가 만 듯한데 특별히 인상적이지 않아서 기억엔 ‘밋밋한 시집‘으로 분류돼 있다.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뒤로 몇편 훑어보았지만 뭔가 통하는 시와 만나지 못했다. 여성독자라면 ‘우리들의 자세‘나 ‘입덧‘ 같은 시에 공감할 수 있겠다 싶은 정도. 하지만 다른 시들은 읽기 괴로웠다.

늙은 구름은 칭얼대고
죽은 아기들은 웃어대고
버스는 좁은 벼랑 위를 달린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안 될 거예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쁘진 않아요
치사량이 언제나 치명적인 것은 아니니까요

빚 받으러 온 사내들처럼 목 조르는
쉰밥이여
무엇을 주리 빈 젖을 주리

‘지독‘이란 시의 첫 세 연인데, 일단 여기까지 읽는 것도 괴롭다. ‘늙은 구름‘이나 ‘죽은 아기들‘을 들먹이는 시 치고 괜찮은 시를 보지 못했다. 좋지 않은 시의 견본으로나 의미가 있을까. 마지막 두 연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악한 게 아니라 다만 약한
그리하여 독에 이르는
전갈과 뱀과 당신과 우리
지독해진다는 것
매독처럼 피어
서로에게 중독되는
허기의 무궁

비 내린 숲의
비린 냄새를 따라가면
독버섯들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마지막 연만 봐줄 만하다. ˝매독처럼 피어/ 서로에게 중독되는/ 허기의 무궁˝ 같은 구절은 습작에서나 허용되는 거 아닌가.

‘라이터소녀와 껌소년의 계절‘이란 제목의 시도 제목부터 관념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너무 따듯해서
이 거리의 사랑은
일회용 라이터처럼 흔해요

라이터 하나에 가든과 라이터 하나에 모텔과
라이터 하나에 오빠 오빠

이런 식으로 나가면 기대를 접게 된다. 데뷔 시집의 단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한데 습작티를 못 벗은 시들은 버렸어야 하지 않을까.

‘Midnight in Seoul‘도 마찬가지.

도시의 틈새에서
어둠이 새어나온다
홍등이 걸린다

모텔 네온사인이 켜지고
묘지에 돋는 붉은 십자가들
라디오에선
이퓨렛미인 유네버로스트미
내부순환로 양방향정체

방음벽 너머로 골리앗 크레인
도시를 굽어본다
피가 튄 곳마다 거인들이
태어난다고 하지
저 환한 통증들 좀 봐

관념적인 묘사로 공감이나 발견을 끄집어내기는 어럽다. 서울에 대한 묘사가 이럴진대 ‘월 스트리트‘는 어떻게 묘사할까.

온다
지축을 흔드는
강철 페니스
시든 정자들 쏟아진다

계단을 오르는
검은 정장 행렬
마천루로 들어간다

이런 시를 계속 나열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다시 <시녀 이야기>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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