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여러 무대에 오르고 있다. 뮤지컬로도, 발레로도.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는 지난해 11월초에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되었는데 뒤늦게 안데다가 일정이 맞지 않아서 관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회를 다 놓친 건 아니어서 다음달 2일 저녁 대전예술의전당 공연은 보게 될 것 같다. 당일 오후 원작을 소개하는 강의를 요청받아서다.

발레 버전의 <안나 카레니나>는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공연으로 한 차례 본 적이 있다. 찾아보니 2009년이었다. 이번 국립발레단 공연은 강수진 예술감독의 지휘하에 크리스티안 슈푹이 안무를 맡았다. 발레 애호가들뿐 아니라 <안나 카레니나>의 독자들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대다수?) 미리 읽어두는 것도 공연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강의는 그 대용이다.

한편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지난 10일 막이 올라 2월 25일까지 공연된다. 전세계 라이선스 초연이라는데 어떻게 무대화되었는지 궁금하다. 2월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가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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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송 ‘고엽‘의 작사가로 유명한 시인 자크 프레베르(1900-1977)의 시집이 리뉴얼판으로 다시 나왔다.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민음사). 민음사판 세계시인선으로 읽었건, 청하판으로 읽었건 기억엔 30년 전에 읽은 시인이다(요즘 들어 30년 전에 읽은 책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다).

작사가로도 알려져 있듯이 프레베르의 시들은 평이하면서 뭔가 읊조리는 것 같다. 오래 전에 읽은 시들을 다시 읽으려니 마친 오래 전 친구를 다시 만나는 듯한 기분이다. 기억나는 시의 하나는 ‘꽃집에서‘.

(...)
꽃집 아가씨는 꽃을 싸고
남자는 돈을 찾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꽃값을 치를 돈을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갑자기
가슴에 손을 얹더니
쓰러진다

그가 쓰러지는 순간
돈이 바닥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떨어진다
돈은 굴러가는데
꽃들은 부서지는데
남자는 죽어 가는데
(...)
그 여자는 무언가 해야 한다

꽃집 아가씨는
그러나 그 여자는 어찌할지 몰라
그 여자는 몰라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를
―「꽃집에서」에서

그리고 ‘알리칸테‘도 한번 읽으면 따뜻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시다.

탁자 위에 오렌지 한 개
양탄자 위에 너의 옷
내 침대 속에 너
지금의 감미로운 선물
밤의 신선함
내 삶의 따뜻함.
―「알리칸테」

이 시들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비록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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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의 서평강좌 개강이 있었다. 오늘은 서평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에 이어서 다카다 아키노리의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바다출판사)을 다루었다. 매우 실전적이라는 게 책의 특징이자 강점인데 개인적으로 특히 공감한 대목은 ‘읽지 않는‘ 독서의 의의를 강조한 부분이었다. 언뜻 모순으로 들리지만(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떠올린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사정을 보게 되면 당연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를 효율적으로 수집하려는 목적으로 ‘읽지 않기‘란 사실 독서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독서는 ‘읽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책 읽는 기술의 진면목은 ‘읽지 않기‘에 있다. 독서를 할 때 무엇이든 다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이는 ‘무엇을 읽지 않을 것인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특정 서적을 ‘읽지 않는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정 서적의 ‘어느 부분을 읽고 어느 부분을 읽지 않을 것인가‘라는 의미에서 ‘부분‘도 포함된다.˝(83-84쪽)

저자는 그렇게 읽지 않고 건너뛰는 읽기를 ‘펼쳤다‘나 ‘바라봤다‘로 표현하는데 ‘만졌다‘고 해도 좋겠다(내가 즐겨 쓰는 표현은 ‘보다‘나 ‘만지다‘이다). 읽지 않는 독서는 책을 읽는 대신에 차례와 장제목을 꼼꼼히 보거나 책장을 대충 넘겨보며 어쩌다 집히는 대목만 읽는다. 이것이 또한 ‘책벌레‘들 특유의 독서법이다(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작업에 비상식적일 정도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책벌레‘의 습성이다.˝

˝개인적인 야심을 말하자면 연간 5,000권 이상 책을 ‘펼치고, 바라보고‘ 싶다(이는 목표로 정한 희망 사항으로서 실제로 일주일에 두 번 총 40권 정도의 신간을 ‘만지고‘ 있으니 연간 2,000권 정도가 된다). 5,000권이라고 해도 전체 서적의 약 10%지만, 사실 나머지 90%는 ‘도서명이나 저자명을 보기만 해도‘ 쓸데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본인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분야도 많다.˝(86쪽)

내가 놀란 건 사정이 비슷해서다. 나도 연간 2,000권 정도는 만지는 축에 속하기에. 차이라면 5,000권 이상을 만져보겠다는 야심은 전혀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 2,000권을 만지는 일만으로도, 곧 2,000권을 읽지 않는 일만으로도 시간과 에너지가 턱없이 모자란다(게다가 비용은?). 그럼에도 비슷한 처지의 동병상련은 느낄 수 있어서 위안이 된다. 저자의 마무리에도 전적으로 동감인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오히려 ‘과거에 출판된 책‘이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적어도 수만 권의 ‘의의가 있는‘ 책이 출판되었을 터인데 이들을 어떻게 하면 파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물론 ‘모두 다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에도 역시 ‘읽지 않는‘ 독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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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유익한 문학 독법이 책으로 나왔다. 토마스 포스터의 <교수처럼 문학 읽기>(이루, 2018)다. 저자는 <미국을 만든 책 25>(알에이치코리아, 2013)로 처음 소개된 미국 미시건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교수처럼 문학 읽기>와 <교수처럼 소설 읽기>, 두 권이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에 오른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을 만든 책 25>에 이어서 이번 책 <교수처럼 문학 읽기>에도 추천사를 붙인 인연을 갖게 되었다.

˝토마스 포스터의 <교수처럼 문학 읽기>는 뭔가 불길하다. 마치 무림 고수들 사이에서만 떠돌던 비전(秘傳)이 유출된 느낌이랄까? 문학 강의를 생계로 삼는 처지에서 보자면, 모두가 교수처럼 ‘쉽고 깊게‘ 문학을 읽는 날은 내가 전업해야 하는 날이다. 문학의 일반 문법과 함께 시시콜콜한 독서 비결까지 일러주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정말로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 내공을 쌓은 사회라면 문학 교수로서 실직하더라도 문학 독자로서는 더없이 부듯할 듯싶다.˝

나로선 어느 쪽이나 유쾌한 결말이다. 독자들의 반응이 별로 없다면 문학강사로서 다행한 일이고, 이런 책을 통해 비전을 습득한 독자들이 많아진다면 ‘영업‘에는 지장을 좀 받겠지만 동료들이 많아진 보람을 느끼겠다.

사실 책의 추천사는 몇년 전에 썼고 그때 곧바로 원서도 구했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행방이 묘연한데, 원서와 같이 다시 정독해보고 싶다. 이런 종류의 책을 나도 쓸 수 있을지 가늠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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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단편집은 선집 형태로 여러 종이 나와있지만 첫 단편집 <플래퍼와 철학자>(1920)의 번역본은 현재 세 종이다. 재미있는 것은 원제의 ‘플래퍼(flappers)‘ 번역인데 마땅한 번역어가 없는 탓인지 각각 ‘아가씨‘와 ‘말괄량이‘, ‘말괄량이 아가씨‘로 옮겼다. ‘아가씨‘란 말로 1920년대 신여성을 가리키는 건 역부족이고 ‘말괄량이‘라고 옮기더라도 사정은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굳이 번역하자면 ‘왈패‘나 ‘왈짜‘ 정도가 유사할까.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1920년대는 미국의 성 혁명 시대로 기록되는 데, 이 혁명의 선두 주자가 바로 flapper(플래퍼: 건달 아가씨, 왈가닥)였다. 넓게 보자면 플래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사회참여로 인해 생겨난 신여성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 전형적인 모습은 짧은 치마를 입고 담배를 물고 색소폰 소리에 몸을 흔들어대는 ‘노는 여자‘였다. 1922년 <플래퍼>라는 잡지가 창간될 정도로 ‘플래퍼 붐‘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말이 외국으로 수출되면서 부정적인 의미가 더욱 강해져, 한국에서도 한때 ‘여자 깡패‘나 ‘행실이 방정하지 못한 여자‘를 가리켜 ‘후랏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건너왔던 ‘후랏빠‘란 말은 ‘플래퍼‘의 일본어 음역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동아시아 여성상에 견주어 본래보다 더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 성싶다. 본래의 ‘플래퍼‘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주체적 형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현대적 여성 주체성의 첫 모델이지 않았을까).

여덟 편의 단편을 묶은 피츠제럴드의 첫 단편집의 가장 큰 의의가 나는 제목에 있다고 생각한다. 표제작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단편들은 ‘플래퍼‘라는 새로운 여성상을 포착하여 주목하게끔 한 공로가 있다. 더불어 플래퍼의 유행에 한몫 거들었다. 그가 시대의 흐름과 징후를 읽을 줄 알았다는 뜻인데, 데뷔 장편 <낙원의 이편>(1920)과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1925)의 여자 주인공에게서도 플래퍼 형상을 읽을 수 있는 건 자연스럽다. 피츠제럴드는 재즈시대의 작가이면서 플래퍼의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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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한스 2024-02-2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미소니안 IPTV 채널에서 컬러로 보는 미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20년대 미국의 경제 호황과 같이 새로이 등장한 flappers를 신세대 여성이라고 나오더라구요 지금 MZ세대 처럼요(부정적인 뉘앙스 보다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