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시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문학과지성사)가 복간본 시집 시리즈로 다시 나왔다. 제목이 생소해서 확인해보니 초간본 열림원판을 구입하지 않았던 듯하다. 기억 속의 최승호 시인은(그 사이에 동명의 PD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군. 현 MBC 사장 역시 최승호다) <대설주의보>(민음사)와 <세속도시의 즐거움>(세계사)의 최승호다.

이번에 신작시집 <방부제가 썩는 나라>(문학과지성사)가 같이 나왔는데 문지시인선으로는 예전에 <고슴도치의 마을> 한권밖에 나온 게 없어서 놀랐다. 주로 민음사와 세계사에서 시집을 냈던 모양이다.

˝최승호는 1977년 등단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시들을 쏟아내며, 마치 온몸을 시에 부딪치는 듯한 강렬한 시적 상상력을 보였다. 사물을 느껴지는 그대로 포착해내는 직관력을 바탕으로 시인은 현대 문명의 화려한 껍데기 아래 썩어가는 사회의 단면을 들추어내면서 죽음을 향하는 육체로서의 인간을 노래하는 시들을 써왔다. 시집 <방부제가 썩는 나라>에는 총 105편의 시편이 실렸으며,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강한 비판 의식을 비롯해 특유의 위트 있는 시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느낌에 시들이 예전보다 짧아졌고 좀더 직설적이다. ‘방부제가 썩는 나라‘라는 제목부터 그런 면을 보여준다. 생태주의적 상상력으로 현대 도시문명과 현대인의 삶을 냉소하고 꼬집었던 게 그의 시가 아니었던가 싶다. 오래 전 기억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출세작 <대설주의보>라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사실 요즘 날씨에 ‘대설주의보‘ 만큼 절실하게 들리는 말도 드물 것 같군(원래는 ‘백색 계엄령‘이란 은유를 통해서 군부독재를 겨냥한 시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0sun 2018-08-0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눈밭과 그속의 한사람~만 보면
발저 생각만 나네요.

로쟈 2018-08-05 01:22   좋아요 0 | URL
^^
 

김남주의 번역시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푸른숲)가 다시 나왔기에 다시 구입했다. 다시 읽기 위해서. 제목처럼 아침저녁으로 다시 읽으면 좋겠다. 브레히트와 아라공, 마야콥스키, 그리고 하이네까지 네 시인의 시들을 골라서 옮긴 시집(혁명시인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주로 감옥에서 옮겼기에 ‘옥중 번역시집‘이라고 해야겠다.

김남주의 시집을 몇권 갖고 있었지만(그는 80년대 시인이었고 나는 80년대 독자였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번역시에 더 매료되었다. 그의 번역시의 성취에 대한 연구가 있는지 찾아봐야겠지만 충분히 그런 검토와 조명의 대상이 됨직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브레히트 번역시. 브레히트 시의 번역본은 여러 종이 나와 있는 만큼 김남주의 번역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독어를 아는 분이 검토해주면 좋겠지만, 그냥 한국시로 읽을 때(번역문학도 한국문학이라는 견지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지 나라도 확인해봐야겠다.

판권면을 보니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1995년에 초판 1쇄가 나왔고 내가 오늘 구입한 건 개정판 3쇄다. <은박지에 새긴 사랑>도 짝으로 마저 나오는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위에 대한 참을성이 많은 편인데 엊그제부터는 자주 에어컨을 켰다 껐다 반복하고 있다. 선풍기를 켜고 가만히 있으면 나은데 거실이나(거실에는 에어컨이 없다) 집 바깥에 한번씩 나갔다가 들어올 때마다 무더위를 실감한다. 침대 위에 책을 잔뜩 펼쳐놓기만 하고 읽지는 못하는 형편.

그맇게 널브러진 책들 가운데 하나가 <숙향전/숙영낭자전>(문학동네)다. 최근에 나온 <박씨전/금방울전>의 머리말을 읽다가 역자 이상구 교수의 현대어역판을 대본으로 작년에 <숙향전> 불어판이 나온 걸 알게 되었다.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사업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유럽어 가운데서는 이탈리아어, 스폐인어판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짐작에 그렇게 되면 <숙향전>은 <춘향전><홍길동전>과 함께 서구에 소개된 가장 대표적인 한국 고전소설이 된다.

그런 대표성을 갖는다지만 나는 정색하고 읽어본 적이 없어서 부랴부랴 아침에 책을 주문해서 받았다.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애독된 애정소설이라 하니(그렇지만 작자미상에다가 집필시기도 17세기말로 추정할 뿐 확실치 않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읽어봄직하다. 하지만 당장은 다른 책들을 읽어야 한다. 아침에 찾은 불어판 이미지를 옮겨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연락이 올 리가 없지만 모두가
그런 표정이었으므로 나는
네가 오지 못할 거라고 믿었고
믿음은 백년만에 한번 피는 꽃도
능히 피울 수 있기에 나는 달력에다
X자를 그렸고 그건 네가 오지 못한다는
그런 표시였다 언젠가 입을 틀어막고
너를 위해 울었던가 우리는 자주
울먹였어도 그게 나중에는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했지 우리가 어쩌다 만난 것인지
그게 백년에 한번 있을 만한 일이었다고
너는 믿었어 믿기지 않는 믿음으로
강변을 걸었어 바람에 흔들리는 건
구름이었을까 멋쩍게 바람 맞은 날
모든 일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지
그런 날 갈대들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하지
네가 오지 못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건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분명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게 되지
네가 오지 못할 이유는 세상에나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너무도 분명하지만
그게 세상의 법칙이라니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자꾸 뒤집어지는 모래시계처럼
많은 쪽은 언제나 적은 쪽이 되고 말지
태연하게 시간은 모든 구도를 바꿔놓는 거야
그렇다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건 아니고
다만 전세를 거꾸로 바라볼 뿐이지
유정한 사랑은 언제 무정한 사랑이 되는지
그걸 알지 못하고서야 벗어날 수 없는 법
네가 오지 못한다는 연락은 올 필요도 없지
나는 네가 올 거라고 믿으니까
네가 올 수 없다는 게 너무도 분명하니까
너는 기적과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맘 2018-08-0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시인가요!!!
가벼운 시어들인데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잘못 느낀거라면 저의 무지를 용서하십시오ㅎ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며‘가
동시에 떠오른 까닭이 뭘까요

로쟈 2018-08-04 19:18   좋아요 0 | URL
제가 황지우를 떠올린 아니지만, 느낌은 잘 전달한 거 같습니다.^^

two0sun 2018-08-0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왕자 강의를 앞두고 이시를 읽고
삼십년만에 어린왕자를 다시 읽고
오십살에 만나는 어린 왕자는 어떤 너로 올런지.
내게서 오라는 연락을 삼십년만에야 받은 어린왕자.

로쟈 2018-08-05 01:22   좋아요 0 | URL
시를 읽는 맥락도 다양하네요.^^
 

19세 미만 구독 불가이고 구매도 성인 인증을 해야 가능한 사드의 <소돔 120일>이 전집판의 둘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1권은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로 2014년에 나왔으니 2권이 좀 늦었다. 전집에 대해서 잊고 있던 참. 이런 페이스라면 완간은 어제쯤이 될는지(몇 권짜리 규모인지도 확인해봐야겠다).

그럼에도 ‘대작‘이 곧장 출간돼 놀랍다. 물론 초역은 아니고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도 두세 종의 번역본이 앞서 있었고 동서문화사판은 아직 절판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전집판인 만큼 이번 번역본이 정본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사드의 작품에 대해 ‘정본‘이란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또 생각해볼 문제다).

꽤 오래 전에 사드의 <소돔 120일>에 대해서 강의도 할 뻔한 기억이 있다. 관련서들도 많이 나와있던 때였다(파졸리니의 영화 <소돔 120일>도 경악하며 보았던가). 지금은 분위기가 좀 달리진 듯한데 그래도 <미덕의 불운> 같은 경우는 언젠가 강의에서 다루고 싶다. <미덕의 불운>도 현재는 열린책들판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전집판으로는 언제쯤 나오려는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