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에 대하여

14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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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꼽지 않은 지 오래 되었는데, 가끔은 '오늘의 저자'라도 골라놓고 싶어진다. 금지된 일은 아니니 내키는 날에는 고를 수 있는 것. 오늘은 두 명이다. 공통적으로 사회이론가로도 분류되는 노르웨이 사회학자 욘 엘스터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비데다. 노르웨이 학자라고는 하지만 욘 엘스터는 현재 콜럼비아 대학의 석좌교수와 콜레주 드 프랑스의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위키피디아 참고). 1940년생. 그리고 자크 비데는 1935년생으로 낭테르대학의 명예교수다. 


  














욘 엘스터를 꼽은 건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기>(그린비)란 책이 번역돼 나왔기 때문. 분량 때문에 두 권으로 분권돼 나왔다. 소개는 간단하다. "사회과학의 핵심 개념으로 ‘선택’을 제안하며 사회적 행위의 본질을 고찰하는 욘 엘스터의 논쟁적 저서이다. 합리성 이론의 대가로 불리는 저자의 이른바 ‘사회과학의 도구상자’로부터, 인간 심리와 사회 현상을 꿰뚫는 통찰의 도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선택과 합리성 이론을 결합하면 '합리적 선택이론'을 떠올리게 되는데, 정확한 계보는 모르겠다(엘스터의 박사논문 지도교수가 레이몽 아롱이었군). 영향을 받은 저작으로 토머스 셸링의 <갈등의 전략>을 꼽기도 했다. 셸링의 책으론 <미시동기와 거시행동>도 소개돼 있다(진작에 구해놓고 어디에 놓았는지). 
















사실 욘 엘스터라는 이름은 앞서 나온 <마르크스 이해하기>(나남) 때문에 기억하게 되었다(벌써 5년 전에 나온 책이군). 이번에 원서도 구해서 이제야(!) 읽어보려 한다. 엘스터의 다른 책으론 토크빌론도 소개되면 좋겠다(책은 오늘 구했다).

















자크 비데를 같이 묶은 건 마르크스 전문가여서다. 알튀세르 사단에 속하는 철학자로 <대안마르크스주의> 등의 공저에 이어서 단독 저작으로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오월의봄)이 이번에 나왔다. '푸코와 함께 마르크스를'이 부제(영어판 제목이기도 하다). 비데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루이 알튀세르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와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알튀세르 사상을 계승해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기여해왔다. 알튀세르는 생전에 비데의 작업을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 공헌하는 중요한 시도로 인정한 바 있으며, 발리바르 역시 지금도 비데를 지속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대표적인 알튀세리앵으로 알려진 철학자 발리바르는 국내에 다수의 책이 번역돼 있다. 두 사람이 공저자로 참여한 책도 여럿 된다. 발리바르의 책 가운데서도 몇 권 소환해놓는다. 
















엘스터가 레이몽 아롱의 제자라는 걸 염두에 두면 엘스터와 비데는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좌우 부채꼴을 형성하는 듯도 싶다. 구체적인 독해의 차이는 실제로 읽어봐야 알겠다. '오늘의 저자'라고 골랐지만, 책은 내일이나(혹은 다음주에나) 손에 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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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0-09-02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독전감이 불편한 사람입니다. 로쟈님은 엘스터를, 비데를 읽어봤나요? 알지도 못하는 책에 대해 이 플랫폼에서 인플루언서로 활동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2020-09-02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 재공지다. 한우리 광명지부의 하반기 한국문학 강의를 코로나 상황 때문에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다(상황이 호전될 경우 대면강의와 병행할 예정이다). 한번 공지한 대로, 최인훈, 이청준, 박완서, 황석영, 네 명의 작가를 읽는다. 기간은 9월 3일부터 12월 24일까지 16주간이며(매주 목요일 오전 10:10-12:10), 두 시즌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실시간 온라인 강의라 지방에서도 수강하실 수 있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유료강의이며 수강문의 및 신청은 02-897-1235/010-8926-5607).


로쟈와 함께 읽는 한국문학


시즌1


1강 9월 03일_ 최인훈, <웃음소리>



2강 9월 10일_ 최인훈, <광장>



3강 9월 17일_ 최인훈, <회색인>



4강 9월 24일_ 최인훈, <화두>



5강 10월 08일_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6강 10월 15일_ 이청준, <소문의 벽>



7강 10월 22일_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8강 10월 29일_ 이청준, <벌레 이야기>



시즌2


1강 11월 05일_ 박완서, <나목>



2강 11월 12일_ 박완서, <엄마의 말뚝>



3강 11월 19일_ 박완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4강 11월 26일_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5강 12월 03일_ 황석영, <객지>



6강 12월 10일_ 황석영, <무기의 그늘>



7강 12월 17일_ 황석영, <손님>



8강 12월 24일_ 황석영,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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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92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팬데믹 패닉>(북하우스)의 메시지에 대해서 적었다. 리뷰를 작성하기 전에 검색해보니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리뷰기사 말고는 별다른 리뷰가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일이지만 예사로운 일이기도 하다...

















주간경향(20. 08. 31) 현재 재난 상황은 새 공산주의 발명 절호의 기회


아직 가을의 문턱에 불과하지만 2020년은 단연코 코로나19가 세계를 뒤흔든 해로 기억될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팬데믹 상황은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크다. 아직 때 이른 관심이긴 하지만 과연 세계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견해가 갈리지만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쪽이 우세하다. 우리 시대의 대표 철학자 가운데 한명인 슬라보예 지젝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재난적 상황을 새로운 공산주의의 발명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재난은 과연 어떻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몇 년 전 100주년을 맞았던 러시아혁명의 사례를 보자.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혁명세력은 러시아 전역을 장악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지 못했다. 당시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손에 넣었음에도 곧바로 반혁명세력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당차게 품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예기치 않게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이때 탄생한 것이 ‘전시 공산주의’다. 생필품을 포함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라 이를 징발하고 배분하는 데 매우 혹독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팬데믹 상황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쟁 상황이다. 다만 이번에는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와 벌이는 전쟁이다. 러시아는 당시 사회주의혁명이 확산될까 두려워하던 자본주의 국가들에 포위돼 있었고, 이는 전시 공산주의라는 기형적 체제를 낳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서 팬데믹은 국경봉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미국 먼저!”라는 주문도 아무 소용이 없다. 킹 목사의 말을 지젝이 다시 인용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모두 다른 배를 타고 왔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은 현재 상황이 전 지구적 협조와 협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도록 해준다. 팬데믹은 전 지구적 문제이기에 개별 국가적 수준의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수주의적 포퓰리즘도 시장 메커니즘도 해결의 방책이 될 수 없다. 조건 없는 전면적 연대와 전 지구적으로 조율된 대응이 필요하고 정보의 공유와 그에 따른 계획의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젝이 말하는 공산주의란 바로 그러한 새로운 협력체제를 가리킨다. 이조차도 낭만적으로 들린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연대와 협력을 축소하거나 포기함으로써 봉착하게 될 한계상황을 영국의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상상한다.

영국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진행되어 병원마다 환자들이 넘쳐나는 의료 마비현상이 발생한다면 ‘세 명의 현자’ 지침에 따라 각 병원의 세 명의 선임상담자가 산소호흡기와 병상의 배분을 결정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상담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환자들에게 기회를 배분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생존의 권리를 박탈당하게 될 것인가. 그러한 선택과 배제가 과연 어떤 명목으로 정당화될 것인가.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아무리 문명의 외피를 쓰고 있더라도 그것은 야만이라고. 그렇다면 지젝의 주장은 이상적인 것도, 낯선 것도 될 수 없다. 이 양자택일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냉정하다. 곧 “우리 앞의 선택은 야만이냐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재발명된 공산주의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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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카프카를 찾아서

6년 전에 쓴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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