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현재 오후 3시를 향하고 있다. 라벤나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1시간 남짓 자유시간을 갖고 있는데 나는 휴식시간으로 쓰기로 하고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건물로 둘러싸인 작은 광장 가운데 작은 분수가 있고 비둘기 두 마리가 나외 비슷한 처지인지 한가한 오후를 즐기고 있다. 자유시간이 끝나면 다시 버스를 타고 피렌체로 이동하게 된다(피렌체에서 2박, 그리고 로마에서의 2박이 남은 일정이다).

라벤나는 인구 17만의 작은 도시로 피렌체의 절반 크기다. 한때는 이탈리아의 중심도시였는데 6세기가 전성기였으니 ‘오래 전‘이란 말도 멋쩍을 정도로 오래 전이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테의 무덤이 있기 때문. 설명을 들어보니 단테의 유골이 발견된 것도 사후 훨씬 나중의 일이다. 피렌체에서 추방된 단테가 정치적 망명자로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라벤나에 안착한 것이 1318년, 그의 나이 53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1321년에 세상을 떠났다. 1302년 피렌체를 떠난 지 20년, 그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1315년 피렌체가 사면를 조건으로 그의 귀환을 제안했지만 단테는 거부했다).

잠시 주문한 커피맛을 보았다. 에스프레소가 이탈리아식 커피이고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게 아메리카노인데,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니까 에스프레소 커피에 더운 물을 함께 가져다 준다. 물을 부어서 셀프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는데 맛이 좋다.

단테의 무덤과 접하여 아주 크지는 않은 단테박물관이 있었다. 원래는 수도원 건물이라고 하는데 그 일부를 단테박물관으로 쓰고 있었다. 짐작에 생가가 있는 피렌체에는 훨씬 큰 규모의 문학관이 있을 것이다. 피렌체는 단테의 무덤도 마련하여 사후의 단테라도 귀환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곧 피렌체에는 단테의 빈 무덤이 있다. 단테의 삶이 반으로 쪼개졌던 것처럼 사후의 삶도 피렌체와 라벤나가 나눠갖고 있는 셈이다.

단테의 무덤을 전후로 방문한 곳은 라벤나의 몇몇 성당들이다. 특히 비잔티움 양식의 모자이크화로 유명한 산비탈레 성당을 아침에 찾았는데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정교한 모자이크화들이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빈의 화가 클림트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늘로써 절반의 일정이 마무리된다. 다행히 오늘은 빡빡하지 않은 일정이어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바람이 조금 불지만 쾌청한 오후. 라벤나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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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라를 타고 베니스의 수로를 지나는 동안 사공(곤돌리에)이 몇몇 건물을 가리키며 안내를 한다. 내가 들은 개인집은 두 곳인데, 마르코 폴로와 카사노바의 집이다. 두 사람은 베니스가 낳은 대표적 명사이기도 하다. 이유는 다르지만 감옥살이를 한 점도 공통적이다. 카사노바의 탈옥 경험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대표작에 <카사노바의 귀향>이 있고 강의에서 몇 차례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문학기행에 카사노바를 포함하지 않은 건 무엇보다도 그의 회고록이 절판 상태여서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건 슈니츨러의 소설과 츠바이크의 평전 정도.

카사노바의 회고록은 <카사노바 나의 편력>(한길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절판되었다. 만약 절판되지 않았다면 그의 고향 베니스는 카사노바 투어의 의미 있는 장소가 될 수도 있었다. 편견 때문에 그를 배제한 건 아니라는 점을 굳이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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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베네치아)에서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수상버스에 올랐다. 오전에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생전에는 그녀의 저택)에서 컬렉션(피카소, 브라크, 뒤샹, 몬드리안, 마크리트, 폴록 등)을 감상하며 설명을 들었고 오후에는 산마르코 성당과 광장을 중심으로 베니스 투어를 진행했다.

자유시간에는 45분간 곤돌라를 타보기도 했다(흥정가였는데 6인승에 1인당 20유로를 지불했다). 가장 높은 전망탑에 올라가보기도 했다(엘리베이터 탑승비용이 1인당 8유로다). 낮에 잠시 해가 난 걸 제외하면 내내 흐린 날씨였지만 골목을 걸어다니며 베니스의 느낌을 몸에 저장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하루종일 그림이나 사진 속 베니스에 들어선 느낌이었는데, 사실 베니스를 찾는 모든 여행자가 그러하리라. 어딘지도 모르고 우연히 베니스에 들를 수는 없을 것이기에.

이탈리아 여행의 길잡이라고 할 괴테 역시도 그러했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 괴테는 베로나를 경유하여 베니스에 들러서 2주 남짓 머물렀다. 최종 목적지는 로마였던 걸 고려하면 베니스에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고도 할 수 있다. 베니스를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내가 아는 한,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번역본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들고 왔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괴테의 이탈리아기행과 토마스 만에게서 베니스가 갖는 의미에 대해 짧게 소개했다.

언제 다시금 베니스를 찾을 날이 있을까. 햇빛이 쨍쨍한 어느 날에 흐린 날의 베니스를 상기할 수 있기를. 이제 우리는 단테가 묻혀 있는 곳 라벤나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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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3-0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종일 베니스의 그림 엽서 속으로 들어선 느낌이라 하시니,
와 얼마나 좋았으면,싶으네요ㅎㅎ
저 사진이 쌤 맘속에 저장될 흐린날의 베니스인가봐요~
두고두고 상기되겠네요^^
 

어제는 이탈리아문학기행의 3일차이자 일정의 둘째날이었다. 첫날 토리노를 다녀온 데 이어서 둘째날 일정은 밀라노 투어. 2016년 2월에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집(그의 유명한 서재) 앞까지 가보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밀라노 대성당(두오모)을 찾고 갤러리아에서 자유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버스를 타고 3시간 남짓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 밤안개가 차오르는 베네치아. 중국식당(동방)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일과를 마무리하니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첫날과 둘째날 일정이 피로했던 탓인지 베네치아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일행은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8박10일간 여섯 도시를 둘러보는 여정이라, 생각하면 강행군이기도 하다. 오늘은 베네치아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다시 라벤나로 이동한다. 1786년 가을 이탈리아여행에서 나선 괴테가 베네치아에 2주 넘게 머물렀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괴테 역시 로마로 가려는 급한 마음에 피렌체는 세 시간만에 통과한다. 우리는 피렌체에 이틀 머물 예정이어서 위안을 삼는다.

밀라노에서는 오전 일정으로, 먼저 에코의 저택을 방문하고 바로 옆에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으로 가서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조각작품으로 알려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감상했다. 바티칸의 피에타와 많이 비교되는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그 ‘미완성성‘으로 여러 가지 해석을 낳는 작품이다. 나대로의 해석도 없지 않지만 로마에서 바티칸의 피에타까지 보고나서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나와 방문한 곳은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이곳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육필 스케치(여러 가지 설계도)를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올해가 다빈치 사후 500주년이다). 다빈치의 회화 작품은 하나(카라바조의 초기작도 하나 소장하고 있다. 과일바구니를 그린 유명한 그림). 미술관 겸 도서관이어서 책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은 들러볼 만한 미술관.

밀라노는 프랑스소설사뿐 아니라 근대소설사에서 발자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탕달에게 고향 같은 도시다. 밀라노 사람을 자처한 스탕달은 실제로 밀라노에 장기간 체류하기도 했다. 그의 걸작 <적과 흑>(1830)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파르마의 수도원>(1839)이 16세기 이탈리아(밀라노와 그 주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 것은 그런 점에서 이해가능하다. 나는 왜 16세기를 배경으로 설정했을까가 궁금했는데 이탈리아여행을 준비하면서 책들을 읽다보니 이탈리아의 16세기가 곧 프랑스의 19세기여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발자크가 이 작품을 격찬하며 “마키아벨리가 19세기에 살았다면 썼을 법한 <군주론>과 같은 소설”이라고 평한 것이 힌트다. ‘초기 근대‘라고도 불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근대성은 <신곡>과 <군주론>에 의해 대변된다. 그 <군주론>의 소설적 표현으로 <파르마의 수도원>을 갖다놓아야 하는 것. 따라서 <적과 흑>과 <파르마의 수도원>은 각기 다른 시대를 다룬 소설이지만 동일한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주인공 쥘리앙 소렐과 파브리스가 스탕달의 분신인 것도 자연스레 이해된다. 소렐과 같은 주인공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등장하려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스탕달이 예민한, 그리고 정확한 작가적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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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반비)의 한 대목을 옮긴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사형수의 편지>에서 저자가 인용했으니 재인용이다. 책은 반파시즘 투쟁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한 이들의 유서 모음집이다(분량은 모르겠지만 책이 번역되면 좋겠다. 어제 찾은 토리노가 이 반파시즘 투쟁의 중심도시였다). 대부분 이름없는 민중이라는 사실이 더 감동적인데 특히 내가 밑줄을 그은 건 한 가구장인의 유서다.

가구를 만드는 마흔한 살의 장인 피에트로 베네데티는 아이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공부와 노동을 사랑하거라. 정직한 삶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하며 인생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삶의 신조로 삼고서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의 소망과 고통에 항상 마음을 쓰거라. 자유를 사랑하고 이 보물을 위해서는 부단한 희생을, 때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예의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어머니 조국을 사랑하거라. 하지만 진정한 조국은 세계라는 점, 세상 어디에도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바로 너희들의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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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3-0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것이면 되는, 그러나
지켜내기 힘든 가르침이네요
건강하고 즐거운 여행 되세요~
아쉽아쉽, 쌤의 글로 대신해봅니다~

로쟈 2019-03-06 16:26   좋아요 0 | URL
네 궁극적인 교훈이지만 표준이죠. 구두 장인의 말이어서 더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