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27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캐롤 페이트먼의 <여자들의 무질서>(도서출판b)에 수록된 논몬 몇 편을 읽고 문제의식을 간추렸다. 페이트먼의 책 가운데 <성의 계약>(<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은 절판되었는데, 이 참에 다시 나오면 좋겠다...
주간경향(18. 04. 03) 서양 정치사상의 남성중심적 편견
여성주의 정치학자의 책 제목이 '여자들의 무질서'라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장 자크 루소의 문제적 발언에서 인용한 제목을 통해서 저자는 근대 이후 서양정치사상에 각인된 남성중심적 편견과 성차별을 문제 삼고자 한다.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한 민족이 지나친 음주로 멸망한 적은 없다. 모든 민족은 여자들의 무질서 때문에 멸망한다."
서양정치사상의 전통에서 통상 사회제도의 첫번째 덕목은 정의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 정의는 가족이라는 예외적인 사회제도에서만큼은 사랑에 우선권을 내준다. 그리고 본성상 가정의 영역을 떠날 수 없는, 곧 정의감이 없는 여성은 시민적 삶에서 정의를 앞세우는 남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여성이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이다.
루소의 뒤를 이어 프로이트는 남성과 여성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정하고 이를 정교화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발달은 여자들이 거들 수 없는 남자들만의 일이다. 남자들은 시민적 삶에 요구되는 본능의 승화와 정의에 대한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여자들에게는 그러한 역량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능의 승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초자아인데, 프로이트는 남자들만이 완전히 발달한 초자아를 소유한다고 본다.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정의감이 약하고 사랑이나 증오 같은 감정적 판단의 영향을 더 자주 받는다.
루소는 여자들의 무질서로부터 더 적극적으로 국가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성간의 엄격한 분리를 강조하는데 아무리 정숙한 여자들이라도 남자들을 타락시킨다고 보았을 정도다. 그렇지만 어머니로서 가정적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수호자로 찬양했다.
루소나 프로이트의 여성론이 현재의 관점에 비추어 부당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양성간의 차이가 정치공간에서 갖는 문제에 대한 성찰 없이 여성주의와 민주주의의 접점은 마련될 수 없다고 본다. 오늘날 지배적인 자유주의 정치이론에서 '여자들의 무질서'라는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회피되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일상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양성이 민주시민으로서 동등한 기회와 역량을 갖는다는 주장은 이 문제에 대한 불편한 편견보다도 오히려 더 무책임할 수 있다.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여성의 시민권을 둘러싼 문제들은 애석하게도 도외시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여자와 아내 문제를 대면하지 못한 것은 한층 더 심각하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결혼을 포함해서 일상적 삶의 구조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가부장적 믿음과 관행을 문제 삼지 않고서 여성에게 성숙한 시민의식과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주문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새로운 헌법적 질서를 모색하고 있는 즈음에 여성주의는 우리가 검토해야 할 과제를 하나 더 얹는다.
18. 0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