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원고 때문에 대학원 MT도 따라나서지 못하고 집안에 죽치고 있다. 이런 날은 적당한 긴장상태에 있게 되는데, 그러한 긴장에 맞멎는 '배짱' 때문에 한편으론 여유롭기까지 하다(그 배짱의 유일한 근거는 원고를 쓰지 못한다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며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뒷북성' 기사를 읽게 됐는데, '대한제국의 모델은 러시아였다?'란 학술쟁점 기사가 그것이고, 작년말 교수신문 기사이다(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교수신문에 자주 들락거리진 않았나 보다). '자료'의 가치가 있어서 보관해놓도록 한다.

교수신문(05. 12. 20) "대한제국의 모델은 러시아였다?"

대한제국의 개혁 모델이 '러시아'라는 특이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근대사)는 최근 출판된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선인 刊)란 책에 실린 한 논문에서 "대한제국의 국제는 그 전제성으로 볼 때 러시아 차르 체제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허 교수는 '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라는 논문에서 "대한제국이 추진한 황제권 강화는 민국이념을 계승한 것이라거나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제를 본떴다기보다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참용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통계승설과 일본모방설에 강한 의구심을 표출했다.허 교수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러시아에 기대어 등장한 황제국 대한제국의 모델이 제정 러시아였음은 자명하지 않을까?"라는 질문도 던진다.

그런데 이 정도의 문장으로라면 황제권이 강하다는 형태적 유사성, 정치활동을 억압했다는 식의 전권적 지배, 급할 때 도와준 강국의 국가지배체제를 당연히 본받지 않았겠느냐는 식의 추론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허 교수가 동원하는 것은 주한 러시아 공사 스파에르의 보고서가 전부다. 스파에르가 "고종의 충신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여지없이 미국화 되어버린 서재필의 산물인 독립협회는 반러 활동을 전개하는 일본과 영국 공사관의 괴뢰"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이를 근거로 "고종의 독립협회 해산에는 러시아 측의 암묵적 지지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이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대한제국으로 무사히 돌입할 수 있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방패막이 이상의 존재였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사료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허 교수의 논문에서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빈약한 근거로 왜 허 교수는 이런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 그것은 교수신문에서 지난해 벌어졌던 '고종시대 논쟁'에서 '광무개혁'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하고, '대한제국'을 이끈 고종은 영정조의 민국이념을 계승한 개명군주라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이다. 고종이 밀려오는 외세에 대응해 동도서기론을 취했던 이유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고종은 서양의 입헌군주제나 입헌공화제에 대해 소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섣불리 이를 모방하기보다 선왕들이 추구한 민국정치 이념을 계승해 실현하는 것이 훨씬 더 내실있는 왕정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허 교수는 "과연 군주 중심의 동도서기론적 대응이 민국이념이라는 자기역사의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을까"라는 회의를 표한다. 그는 "민국이념을 계승하였다는 사진속의 고종황제는 어째서 차르의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일까"라고 계속 따진다.

이 질문은 그럴싸한 측면이 없지 않다. 공식복장이 그랬다면 그것은 은연중 고종의 지향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적 차원의 겉치레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또한 그간 대한제국의 성립에 영향을 준 국가모델을 명치유신을 거친 일본에 국한해서 논의해온 측면을 지적한 부분은 새로운 역사적 변수를 도입해 좀더 꼼꼼하고 종합적인 시야를 확보하자는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다.

하지만 허 교수는 대한제국의 러시아 모방설을 대한제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고 있어 아쉽다. 즉, 러시아는 모델로 삼을 만한 게 못된다는 것. 그는 이승만의 저서인 '독립졍신'에 러시아가 아주 저급한 국가로 취급되고 있는 걸 예로 들며 "당시 서구중심주의자들이 러시아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었음에 비해, 고종은 그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고종의 대한제국이 "비밀경찰이 사회 구석구석을 감시하는 보수적 반동 전제정치가 강화된 알렉산드리(*알렉산드르) 3세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부조적 방식에 대해서는 '고종시대 논쟁' 중에 많은 비판이 있어왔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고, 전제군주 등 유사성을 부각시켜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방식은 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허 교수의 논문은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상황이나 내적 동기 등을 밝혀내지 못한채 단지 '왜 러시아는 논하지 않나'라는 착상에 의존하면서 유사성을 지나치게 발견하려고 노력한 듯한 흔적을 많이 보여준다.

결국 허 교수가 골인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근대국민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고종과 그 측근세력이 차르체제를 '잠재모델'로 만든 대한제국은 국민을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아니라, 백성을 신민으로 잠자게 하려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지 않을까"라고 지적한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20년 가까이 대한제국 정치구조를 연구해온 서영희 한국산업대 교수(한국사)는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상당히 독특한 주장인데 나는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한국사) 또한 "읽지 않고 판단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만약 사료나 논리적 근거가 없다면 고려해볼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이 국민국가인가 아닌가에 대한 허 교수의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 교수는 대한제국이 서구 근대국가의 일반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국가가 아니라고 본다. 문명화의 정도, 통합기제의 유무, 국가간의 대등관계 등에서 볼 때 '택'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 명치 이래 일본의 문명개화는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이며 "서구근대가 오역, 날조된 것"이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헌법과 의회, 삼권분립 등의 정체를 갖추고 있었기게 일본적 국민국가 정도는 된다는 주장을 한다.

비서구권의 역사진행을 서구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전근대와 근대의 틀 속에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비서구권의 역사를 '근대의 결여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제 '선택'과 '관점'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허 교수뿐 아니라 이 결여태를 상정하는 학자들은 비서구권 국가들이 '번역'이라는 방식을 통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캐치 업' 근대화를 걸어갔다고 보고 있다.

이 때 '번역'이라는 어휘는 역사적으로 볼 때 문명권에서 비문명권으로 지식이 흘러들어간 방식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번역'이라는 수사는 매우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번역=이식'이고, 더 세분화시켜봤자 번역->번안->통언어적 실천(토착화)인 셈이다. 하지만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를 '미메시스'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미메시스는 상호적인 것, 즉 상호모방이다. 번역에서는 원전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최고이지만, 미메시스는 그와 달리 원래의 대상에는 없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이 최종적인 과정으로 포함된다. 

물론 예술에서 주로 쓰이는 이 미메시스의 개념을 역사과정에 확장시켜 대입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으나, 서구의 결여태로서 비서구사를 규명하려는 논의구조가 왜 아포리아인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기자의 아이디어는 책 한 권을 쓸 만한 주장이다. '무리'가 아닌 걸 보여준다면 주목할 만한 업적이 되지 않을까?).

대한제국이 '진정한' 근대국민국가가 아니었다고 결론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대한제국이 진정한 국민국가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룰 때 그 반박으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서구와 역사과정이 다르고, 국가 구성원들의 사회화과정, 교육정도 등에서 큰 차이가 있는 조선이라는 특수한 왕조가 어찌어찌 당시의 대세를 따라 국체를 바꿔보려 했었던들 어찌 '진정한' 서구를 이루었을 것인가가 진정한 의문이다.

차라리 "외세가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어떤 제3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그나마 과거사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으로서 훨씬 인간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따라서 대한제국이 일본, 러시아와 청국, 미국 등 어느 한 나라를 모델로 삼았다는 주장을 하기 전에, 조선이라는 그릇에 이들을 해체재구성하는 혼성모방을 선택했다고 보는 게 손쉬우면서도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강성민 기자)

06. 11. 10.

 

 

 

 

P.S.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 교수와의 역사 대담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이다. 그 대담에서는 '건강한 보수주의자'의 역할을 맡았었다. 이 '쟁점'에서도 시사받을 수 있지만, 한국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러시아는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중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러시아쪽 사료들을 검토/분석할 수 있는 연구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안다. 국문학도/국사학도들이 일본과 중국쪽 사료 못지 않게 러시아쪽 사료들도 참조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나 해방공간에 관한 사료들이 그러한데) 우리가 몰랐던 우리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건 아닌가...

P.S.2. 동향기사에 대한 허동현 교수의 반론도 게재되었던 걸 뒤늦게 발견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마저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6. 01. 06) ‘강한 주장 약한 사료’(교수신문 제384호)에 답한다

제정 러시아의 차르체제가 대한제국 광무황제가 꿈꾼 개혁모델이었다는 필자의 견해(「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5)에 대해 “강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사료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강성민 기자의 논평은 정당하다. 허나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기존 연구 모두가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가설의 등장은 역사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켜준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기존의 연구는 개화파, 농민(민중), 국왕, 그리고 일본 중 누구를 근대 개혁의 주체로 보느냐에 따라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 “광무개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신용하 교수는 개화파를, “광무개혁”은 호평하면서도 대한제국은 “의사절대왕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김용섭 교수는 농민을, 대한제국이 주체적 근대 국민국가였다고 본 이태진 교수는 국왕을,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에서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부정한 이영훈 교수는 일본을 근대화의 주체로 본다. 강 기자의 논평에 힘을 실어 준 서영희 ․ 주진오 교수는 어떤 입장일까? 서 교수는 국왕을, 주 교수는 농민을 개혁의 주체로 보는 쪽에 서있는 것 같다.

시민사회와 산업화를 이룬 오늘 그 “발전”의 뿌리를 놓고 한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과 경제사학계의 식민지근대화론이 평행선을 달린다. 외세를 배격한 민족의 자주를 강조하는 대한제국 높이기는 과거사에 대한 성찰일까?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 떠넘기는 과오 감추기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렇다고 개화기의 근대화 노력을 외면하며 오늘 우리가 이룬 경제성장의 뿌리를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대한제국 때리기도 정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종래 연구 동향을 일별할 때, 필자가 품은 의문은 다음과 같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을, “온건” 개화파는 중국을, 친미 개화파는 미국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고종과 주변세력은 갑신정변 실패이후 청국을, 그리고 아관파천 이후 러일전쟁 전까지 일본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왜 그들은 러시아에 의지하려고만 하고 러시아를 개혁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일본이 자국의 제도를 모델로 한 갑오경장을 유도했듯이, 러시아도 삼국간섭 이후 자국을 모델로 한 조선의 개혁을 이끌어 내려하지는 않았을까? 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민족”과 “자주”를 오용하는 국수적 성격의 대한제국과 고종황제 띠우기에 보이는 맹점을 지적하려는 데 그 주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잠정적 결론 하나는 대한제국은 그 개혁모델로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참용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힘의 균형 위에서 연명하던 허울만 남은 제국인 대한제국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추후 실증적 작업이 뒷받침될 때 좀 더 설득력을 얻는다. 최근 필자는 웨베르 주한 러시아공사가 아관파천 때 의정부를 다시 설치한 것에 대해 "고종이 러시아의 국무회의(Gosudarstvennyi Sovet) 절목을 참고하여 부활시켰다"고 보고한 러시아 문서를 찾았다. “강한 주장”을 입증하는 충실한 사료가 앞으로 속속 발견될 전망이다.

허나 필자는 비서구권의 역사를 “근대의 결여태”로 보았다는 비판에 동의할 수 없다. 차라리 졸고가 개화기 한국이 근대화에 실패한 원인을 찾다보니 결과적으로 이미 시효가 끝난 "근대화 예정론"에 불과하다고 평한다면 수긍이 간다. 물론 근대화란 역사적 필수가 아닌 하나의 가능성 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 기획의 문제는 근대 자체를 비판하여 넘어서려는 탈근대의 문제와 구별되어야 할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근대 기획―식민지 근대 극복과 하나 되는 국민국가 수립―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傳言만으로 一針을 주신 주진오, 서영희 교수께 감히 졸고 일독 후 가편을 청한다.(허동현 / 경희대·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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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어요.(>_<)

로쟈 2006-11-10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추신을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