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학상 후보작가 인터뷰의 마지막편을 옮겨온다. 김영하와 박민규 편이다. 지난번에 두 여성작가 편혜영/정미경 편을 옮겨다놓은 것과 대구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나머지 여섯 작가들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해주는 건 내가 이들의 작품들을 읽었거나 적어도 소장하고 있다는 점. 김영하의 <빛의 제국>과 박민규의 <핑퐁>은 각각 지난 계절에 문학동네와 창비사가 '간판'격으로 내세운 장편소설이고 독자들로부터 그만큼의 호응은 이끌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공은 문학상 심사위원들께로 넘어갔다.

한국일보(06. 11. 10) [한국일보 문학상 후보자 인터뷰] <5·끝> 김영하·박민규

김영하 '빛의 제국'

“이 소설은 너무 일찍 도착한 개인주의의 파탄을 다루고 있어요. 마일스 데이비스 식으로 말하면, ‘The end of the cool’이죠. ‘쿨’의 끝장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영하(38)씨의 장편 <빛의 제국>은 프티부르주아가 된 남파 간첩과 그 가족들을 통해 쿨하게 살고자 했던 10년 동안의 노력이 결국 파탄에 도달하는 이 시대의 초상을 그린다. “IMF 체제 이후 우리 사회는 쿨의 패러다임을 지향하게 됐지만, 실제 우리는 개인주의를 지탱할 수 있는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우리 사회의 사상적 인프라가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마치 박래품처럼 들어온 거죠.”

아니, ‘쿨의 전도사’인 양 쿨한 인물들과 쿨한 문장으로 독자를 매료시켰던 작가가 이제 와서 쿨의 종언을 선언하다니. “흐흐. 제가 변했다기보다는 시대가 달라졌다고 할까요. 쿨의 패러다임에 맞춰 살고자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라는 분단돼 있고, 핵 문제 터지면 어수선하고…. 이곳은 개인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예요. 실은 다들 불안하고 초조한데 어떻게 쿨할 수 있겠어요. 생존전략으로서의 쿨, 포즈로서의 쿨이었기 때문에 위기상황에선 금방 폭로되는 거죠.” 작품 속에서 누구보다 쿨한 삶의 방식을 영위하던 주인공들이 파국의 위기에 직면하자마자 ‘애는 누가 키우냐’ ‘혼자 북한으로 가라’ 는 등 생존문제를 놓고 구질구질하게 싸우는 장면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1996년 등단 이래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며 문단의 젊은 거목으로 자리잡은 그는 “요즘 들어 드디어 본격적으로 쓰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작가로서 기쁨을 느끼는 단계라고 할까요. 예전엔 한참 놀다가 좋은 생각이 나거나 마감에 몰리면 글을 썼는데, <검은 꽃> 때부터 몸이 변해서 매일매일 꾸준히 작품을 쓰고 있어요. 이젠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글 쓰는 것 말고 재미있는 게 없어서 최근 6개월 동안은 술자리도 한 번 안 나갔네요.”

그는 소설가라는 직업이 정신의 키가 끊임없이 성장해가는 몇 안 되는 직업이라 좋다고 했다. “예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찮아지면서 계속 더 높은 가치를 지향해가는 것, 그렇게 점점 괜찮은 인간이 돼가는 것이 참 좋아요. 옛날엔 진짜 천둥벌거숭이였는데 요즘은 제가 생각해도 사람 된 것 같다니까요.”

◆ 심사평
<빛의 제국>의 주인공은 평양이 고향인 남파간첩 김기영이다. 그는 1980년대 서울로 와서 대학을 다닌 뒤 결혼을 하고 영화사를 운영하며 전형적인 서울시민으로 살아간다. 이런 그에게 갑자기 소환 명령이 떨어진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하루 안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머물 것이냐, 떠날 것이냐.

<빛의 제국>은 이 하루를 기본축으로 화자의 회상을 통해 1960~70년대의 평양과 80~90년대의 서울의 역사를 되살리며 궁극적으로 21세기 서울에서 중산층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한다. 그것은 당연히 그다지 유쾌한 회고가 되지 못한다. 오늘의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토대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잉여와 거품에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영하가 보여주는 우리의 현재는 거대한 책략과 암투, 어이없는 허위와 편견으로 부글거린다. 간첩이라는 타자의 시선이 아니었다면 이 부패 직전의 부글거림을 포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파이소설의 하위문화적 상상력을 ‘반시대적 고찰’로 끌어올리는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김영하의 장르적 변주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박민규, '핑퐁' 

"저는 글 쓰는 일이 너무 좋습니다. 미치겠습니다. 많이 많이 많이 쓰고 싶습니다."

<핑퐁>은 흉내내기 힘든 개성적 글쓰기로 젊은 독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아온 박민규(38)씨의 세 번째 장편이다. 2003년 <지구영웅전설>과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동시에 문예지와 일간지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그는 소설집 <카스텔라>와 <핑퐁>을 연년생으로 세상에 내놓으며 짧은 기간에 괄목할 만한 생산력을 보여줬다.

가족여행 중인 작가의 요청으로 이메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특유의 단답형으로 소설쓰기의 행복을 얘기했다. 비블리오그래피에 장편의 비중이 높은데 어렵지 않았냐고 물어도 "힘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쓰고 쓰고 또 쓰면 됩니다"는 식의 답변이었다. 아마 '쓰고 싶은 대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은 읽는 사람 마음'이라는 그의 철칙이 낳은 낙천주의 덕분일 것이다.

<핑퐁>은 지구의 사활을 걸고 외계인과 탁구게임을 펼치는 내용이다.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을 마치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풀어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일품이다. 소설이 꼭 개연성으로 충만한 시공간과 사건만을 다루란 법은 없지만, 반대의 경우 독자를 설득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 "개연성은 물론 소설의 중요한 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한 요소, 말 그대로 전부는 아니란 뜻입니다. 연(然)이라는 단어 앞에도 여러 가지 단어가 붙을 수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붙냐에 따라 연의 성격도 달라지겠지요.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있다면 그 단어를 찾는 것입니다. 그 어떤 단어, 하지만 결국 연을 이어지게 하는 방식을 뜻하겠죠."

진짜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농담을 던지자 "그럼 없다고 생각하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초강력 유머가 가득한 당신의 소설에서 유머의 효과가 뭐냐고 물으면 "유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카스텔라>에 묶인 그의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몰라몰라, 개복치라니>의 제목 작법을 빌려 말하자면 이렇다. "그렇습니까? 박민규입니다", "몰라 몰라, 박민규라니".

◆ 심사평

박민규는 아이러니한 작가다. 그의 글쓰기는 다양한 하위문화 장르들에 대해 지극히 너그럽다. 만화와 영화와 인터넷은 그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자양분들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만큼 개연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웃음보다도 더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항상 '현실'의 남루를 모른 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유머'는 우스운 만큼 비극적이고 숭고한 데가 있다. 어쩌면 그는 가장 21세기적인 작가이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80년대 문학의 마지막 적자인지도 모른다.

<핑퐁>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박민규적인 작품이다. 전혀 개연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를 장편 분량으로 밀고 나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이 놀랍다. 독자를 웃게 만들고, 웃다가는 금세 묘한 비애와 자조에 빠지게 만드는 그의 문장들의 마력도 놀랍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현재 존재하는 우리의 일상적 현실을 묘파하는 능력 또한 놀랍다. 우리는 박민규에게서 21세기의 첨단 문물들과 80년대의 진지한 현실 탐구가 행복하게 화해하는 희귀한 예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06. 11. 09.

 

 

 

 

P.S. 다행스러운 건 두 작가 모두 글쓰기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두 사람의 전성기가 가까운 장래에 놓여있다는 뜻도 된다. 이번 문학상 수상여부와 무관하게(둘다 상복이 많은 작가들이긴 하지만) 내년의 작품들에 더 기대가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나저나 올해 나온 책들은 올해 읽어줘야 할 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