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기사는 홍콩의 영화감독 관금붕(관진펑)의 <연지구>(1987)를 다룬 경향신문의 '일시정지' 코너였다. <인지구>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영화의 주연이 매염방(메이엔팡)과 장국영(장궈룽)이다. 관금붕의 데뷔작으로 기억되는데, 아주 오래전에 본 이 영화가 장만옥 주연의 <완령옥>과 함께 내게는 관금붕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물론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 이후의 영화들은 거의 본 기억이 없지만).

예전에 '매염방의 죽음을 애도함'이란 글을 올린 적도 있는데, 어제 예술의전당에서 감상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 매염방은 내게서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다. 쇼스타코비치와 매염방? 둘을 묶어주는 건 한 친구에 대한 기억이다. 그 친구가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했고 매염방을 좋아했다. 기억에는 지난 93년쯤인가 러시아에서 구입한 EMI음반으로 쇼스타코비치의 5번 '혁명'을 자기방에서 들려주며 의기양양해 하던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영웅본색3>에 처음 본색을 드러낸 매염방의 도톰한 입술이 이후에 주의를 끈 건 순전히 그의 '주목' 덕분이다. 이후에 내가 더 좋아하게 된 건 그녀의 입술이 아니라 노래였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매염방의 노래는 <영웅본색3>의 주제가인 '석양지가'이다. 들을 때마다 '장쾌한'이란 형용사를 떠올려주는 이 노래를 나는 지금도 듣고 있다. 이제 어느덧 세월에 묻히고 있지만, 지난 2003년 봄, 만우절에 장국영이 자살했다. 그리고 그해 12월말에 매염방에 자궁암으로 투병중이던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자살했다는 설도 있는 모양이다. 그해 9월 마지막 '연창회'에서 그녀가 부른 노래가 또한 '석양지가'였다고. http://www.youtube.com/watch?v=b3dP-8Ti6x8). 그리고 친구의 죽음은 그 두 죽음 사이에 끼어 있다.   

인생의 '화양연화'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유금세월'도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웃음도 되찾을 길 만무하다. 내가 반복해서 듣는 건 그저 '석양지가'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그저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자의 의연한 자세뿐이다. 담담한 마음으로 <연지구>(http://www.youtube.com/watch?v=DoXufaoclrw)와 관금붕에 관한 자료 몇 가지를 모아놓는다.

경향신문(06. 11. 09) 관진펑의 ‘연지구’

서양에 오랫동안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신혼부부가 알프스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남편이 조난 사고를 당했다. 살아남은 아내는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슬픔을 안고 돌아왔다. 수십년이 흘러 아내는 할머니가 됐고, 어느날 얼음 속에 굳어있던 남편의 시신이 하천에 떠내려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한달음에 달려간 아내는 수십년 전 청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연이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는 가장 사랑했던 순간 이별해야 했던 연인에 대한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잔인함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관진펑(關錦鵬)의 ‘연지구’(1987)는 장궈룽(張國榮), 메이옌팡(梅艶芳) 주연의 영화다. 1930년대 기녀 여화와 부잣집 진도령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진도령 집안의 반대로 둘은 결혼하지 못하고, 좌절한 연인들은 함께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시대는 흘러 80년대 홍콩, 한 신문사에 구식 치파오(원피스 형태의 여성용 중국 전통의상)를 입은 여화가 나타나 진도령을 찾는다는 광고를 내고자 한다. 함께 저승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진도령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도령과 여화에겐 꽃같이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장면1). 둘은 기생집에 마련된 고급스러운 방에서 아편을 나눠피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여배우보다 더 아름다운 장궈룽의 전성기 얼굴과 전통적 미인은 아니지만 묘한 매력을 내뿜는 만능 엔터테이너 메이옌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귀신이 돼 돌아온 여화는 저승에서 진도령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함께 독극물을 마셨지만 진도령은 깨어난 뒤 치료를 받고 부모님이 추천한 여성과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불행했다. 가산을 탕진한 진도령은 영화판 엑스트라를 전전한다. 혼령으로 돌아온 여화는 영화 세트장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진도령을 발견한다(장면2). 거기엔 기억 속의 아름다운 청년은 간 데 없고, 추한 늙은이만 남아 있다.

여화는 진도령이 선물했던 화장 도구를 돌려준 뒤 미련없이 돌아서고, 여화를 부르던 진도령은 울먹인다. 망쳐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연인을 따라 죽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여화가 세월의 무상함을 깨우쳐 줬기 때문일 것이다. 진도령의 고운 얼굴선은 세월과 함께 무너졌고, 팽팽하던 피부엔 고랑이 패었다. 시간은 피도 눈물도 없이 공평하다. 절세의 미남, 미녀에게도 똑같은 무게의 짐을 지운다.



공교롭게도 장궈룽, 메이옌팡은 같은 해 사망했다. 2003년 만우절 장궈룽은 거짓말같이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졌고, 12월30일 메이옌팡은 자궁암에 따른 투병생활 끝에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구천을 떠도는 두 배우의 혼령이 나타난다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 그대로일 거다.(백승찬 기자)

씨네21(05. 08. 24) <연지구> vs <완령옥>: 홍콩 포스트 뉴웨이브, 관금붕

홍콩영화의 포스트 뉴웨이브 세대로 등장한 관금붕은 유례없는 예술영화 몇 편을 내놓는다. 관금붕 자신이 말한 바 홍콩 영화산업이 활황을 구가하던 시기였기에 <연지구> 같은 영화의 제작이 가능했듯이, 당시 홍콩 대중영화의 인기에 편승해 국내에 소개됐던 그의 영화들은 낯선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인지구>로 잘못 소개된 <연지구>는 요괴영화와 모던 멜로드라마를 혼용한 작품이다. 영화는 과거의 연인을 찾아 현대로 찾아온 귀신을 통해 지키지 못한 사랑의 약속, 사라지는 홍콩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 변화에 대한 낭만적 거부를 이야기하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촘촘한 화면구도 속에 죽어가는 듯 대사를 읊는 배우의 모습이 탐미적 시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1920, 1930년대 중국의 대표적 배우인 완령옥을 그린 <완령옥>은 관금붕과 배우들의 토론, 완령옥의 기록영상, 그리고 영화 속 영화가 컬러와 흑백영상으로 교차되어 나오는 작품이다. 연기자는 미쳐야 한다고 말했으며, 연기에 빠져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던 완령옥은 사회의 편견에 맞선 여자이자 25살 꽃다운 나이에 자살한 여배우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관금붕은 왜 완령옥이 자살한 1935년 3월8일보다 꼭 1년 전에 <연지구>의 기생 여화가 자살하는 것으로 설정해놓았을까. 1935년이라면 중국영화가 상하이를 중심으로 자국영화의 기치를 드높일 때다. 활기찬 1980년대와 이후 힘을 잃어간 1990년대에 홍콩영화의 현장을 지킨 관금붕은 비문을 반복해서 써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빌려 중국영화의 화려한 시기를 애써 기리는 홍콩 영화감독을 구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관금붕이 완령옥을 불러와 과거를 더듬었던 것처럼 우리는 <연지구>에서 우리의 곁을 떠난 두 배우의 기억을 접하게 된다. 인생과 사랑이 헛되기에 <연지구>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자는 이젠 장국영과 매염방 때문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추기 힘들지 모른다. 관금붕의 영화가 영화 안팎으로 누군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작업이라면, 그중 <연지구>와 <완령옥>은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로 이어지는, 아름다움에 취한 세계의 정점일 것이다(그러나 관금붕은 이후 <쾌락과 타락>과 <란유>를 만들면서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좀더 현실적인 주제로 넘어간다).

새로 출시된 <완령옥> DVD는 기존 출시본보다 30여분 긴 판본을 수록했다는 점을 먼저 주목할 만하다. 두 DVD엔 예고편 모음과 포토 갤러리 외에 관금붕과 영화평론가 폴 포노로프와의 인터뷰를 수록하고 있다. 길지 않은 인터뷰지만 제작 배경과 배우, 스탭, 영화의 주제 등에 대한 설명이 알차다.

06. 11. 09.

P.S. 많이 미뤄진 것이지만, 친구가 유고로 남겨놓은 번역서가 내년쯤에 나올 예정이다. 오늘 그 결정사항을 통보받았다. 주변 사람들이 원고의 교정/교열을 맡기로 했는데, 물론 나도 그 일원이다. 내년에는 친구에게 면목이 설지도 모르겠다...  

P.S.2. 본문에서 깜빡 빼놓은 자료는 신작 <장한가>를 들고서 작년에 부산영화제를 찾았던 관금붕의 인터뷰이다. 오마이뉴스(05. 10. 12)에 게재되었던 내용을 옮겨놓는다. 그의 차기작이 매염방에 관한 영화가 될 거라는 얘기가 눈길을 끈다.

"정기요는 사랑을 갈구하는 캐릭터"

11일 오후 4시 20분경 메가박스에서 열린 <장한가>의 공식 상영이 끝난 다음, 관금붕 감독과 주연배우 정수문이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홍콩을 대표하는 가수 겸 영화배우이자 뛰어난 패션리더이기도 한 정수문은 영화 속에서 보여준 강렬한 캐릭터와는 대조적으로, 아담하고 작은 체구에 3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귀여운 미소가 돋보이는 스타였다.

진지하고 성실한 이미지의 관금붕 감독은 한국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적극적이고 겸손한 대답으로 눈길을 끌었다. 중화권의 거장들인 허우 샤오시엔과 왕가위와의 비교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에서부터, 예정된 시간을 넘기면서도 '질문을 더 받겠다'며 관객들을 먼저 배려하는 성실한 자세로 호평을 받았다.

- <장한가>는 엄청나게 1940년대에서 80년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긴 시대를 아우르는 이야기이다

관금붕(이하 관): "전작인 <완령옥>이 1920~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면, 이번 작품은 시대가 좀더 넓어졌다. 당시 상하이는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인하여 상류사회의 문화가 발달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굉장히 혼란한 시대였다. 영화의 디테일한 측면은 100퍼센트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속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영화 속에서 역사는 배경으로 작용하지만 이야기의 전면에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방대한 시대를 제한된 시간 안에 영화 속에 녹여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보다 개인의 삶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여 역사적인 배경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

-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의 큰 흐름은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영화의 복고적 스타일은 왕가위의 <화영연화>를 연상시킨다.

: "두 분 모두 개인적으로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감독들이다. 개인적으로 인물이 시대의 격동 속에 놓여 있음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허우샤오시엔은 대만의 역사를 주로 다루는 감독이고, 왕가위는 <화양연화>가 60년대 홍콩을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형식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다소 유사하게 느낄 수는 있어도 본질은 각자 상이한 이야기로 생각한다."



- 정수문 씨는 주로 상업적인 색깔이 짙은 영화에 자주 출연해왔는데,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정수문(이하 정): "개인적으로 그동안 제가 코미디 영화같은 상업 영화가 자주 출연해왔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어떤 배역이든 역할에 따라 변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정기요는 대단히 복합적인 면을 갖춘 캐릭터로 10대에서 50대까지 방대한 시절을 넘나드는지라 그때그때 몰입하는 데 어려움이 다소 있었다. 하지만 정기요의 성향 중에서 나와 비슷한 부분도 있었고, 감독님의 조언도 있어서 전반적인 어려움은 크지 않았다."

- 주인공의 애정관이 다소 모호한 것 같다. 극중에서 만난 4명의 남자를 과연 진정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자들을 속이고 이용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정기요는 영화에 나온 모든 남자들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남자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각 남자들과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 남자들을 사랑한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본다."

: "정기요는 여러 가지 다층적인 면을 갖춘 캐릭터다. 당시에 그녀가 처한 입장은 현실적인 고민을 배제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물론 남자를 만날 때에도 과연 이 남자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려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들을 이용만 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 감독이 주연배우에게 어떤 식의 연기주문을 했는지

: "매번 영화마다 감독님의 기대치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많은 시대를 넘나드는 만큼 감정의 세밀한 부분을 표현해달라고 주문하셨다. 다행히 감독님은 감정이 풍부한 분이라서 저에게 많은 조언을 주셨고, 이 작품을 통해서 연기와 몰입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은

: "최근 사망한 배우 매염방과 관련된 전기 영화가 될 것같다. 현재 시나리오 완성 단계에 있는데 일정이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직 없다. <장한가>도 굉장히 스케일이 큰 작품이라서 힘든 부분이 많았는데 이 작품을 끝내자마자 또 더 규모가 큰 영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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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염방과 장국영 주연의 "우연"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나요. 왕조연도 나왔던 것 같은데... 내용은 영 별로였지만 엔딩의 콘서트 장면이 참 근사했던... 정말 오래전 일이네요.

로쟈 2009-02-2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본 영화인데, '영화'라고 할 만한 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사람이 주제가는 같이 불렀네요.^^


수유 2006-11-1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눈엔 그리 이뻐보이지 않는데 매염방 좋아하는 남자들이 꽤 되더군요..
노래나 함 올려볼까요?

로쟈 2006-11-10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는 제가 (실황으로) 올려놓았습니다(투병중의 마지막 공연 장면이라 음색이 약간 다르더군요). 미모가 아닌 건 다들 인정하는 건데, '독특한' 외모라고 해야겠지요...

2006-11-12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