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내가 써놓고도 까맣고 잊고 있었던 글들을 만나게 된다. 수년 전에 씌어진 걸로 보이는 아래의 글도 마찬가지인데, 말투로 보아 무슨 '댓글'로 씌어진 게 아닌가 싶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1872)의 주인공이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 대해서 몇 마디 주석을 붙이고 있는데,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악령>은 무엇보다도 주인공 스타브로긴에 대한 연구입니다. 젊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은 수수께끼라고 했을 때, 그 수수께끼성을 가장 매력적으로(악마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스타브로긴이죠. <악령> 속에서 그가 자신에 대해서 직접 털어놓고 있는 부분들은 그래서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요긴합니다. 원래는 삭제됐었지만, 작가의 사후에 포함된 '스타브로긴의 고백'(<찌혼의 암자에서>)을 제외하면 <악령>을 마감하는 그의 편지는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참조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편지는 다리야 파블로브나를 수신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위스의 '우리'란 곳에 도피처 겸 거처를 마련해 두고 그리로 갈까 합니다(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자살입니다). 하지만, 무슨 대단한 걸 기대해서는 아니죠.

"나는 우리의 생활에서 무엇 하나 기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가볼 뿐이죠. 내가 일부러 음울한 장소를 택한 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내가 구속받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낯설 뿐이지요. 사실 러시아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 산다는 일보다 제일 싫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낯설음"이라는 것은 스타브로긴을 대표해줄 수 있는 정서입니다. 그에게 세계(특히 러시아)는 낯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지주의자인 샤토프(그리고 작가)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관념에 들려 있는 인물이죠. 다만, 어느 한 가지 관념(=사상)도 그를 만족시키질 못합니다. 그의 내면은 너무 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넓이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가 말하는 "미학적'의 넓이가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입니다(*아래는 카뮈 각본, 안제이 바이다 연출의 연극 <악령>에 등장하는 스타브로긴. 모스크바의 '동시대인' 극장의 레퍼토리이다).

"나는 가는 곳마다 내 힘을 시험적으로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권했던 일입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 또 남한테 보여 주기 위해 실험하면서도, 내 힘이 한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선행과 악행을 구별없이 행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그 자신에게도 그는 수수께끼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추악하고 엽기적인 행동도 그의 한계를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의 힘과 내면은 무한하거나 무한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인식론적 자아의 무한성'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라스콜니코프의 경우는 소박하기 짝이 없죠. 도끼로 한 노파를 살해하자 마자 자신의 한계가 막바로 드러난 경우니까(앓아눕지 않습니까?).

하지만 스타브로긴의 경우는 12살 소녀 마트료샤가 자살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습니다. 샤토프가 따귀를 때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겐 반응(reaction)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무관심한 존재인 것이죠. 그는 타자의 어떤 목소리에도 응답할 줄 모르는 윤리적 백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식론적 무한은 윤리학적 무한의 결핍을 전제로 합니다. 그에겐 윤리학적 자아가 부재합니다. 무관심이 그 증표입니다. 윤리학적 자아란,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타자의 무한성과 대면하는 자아입니다. 인식론적 자아가 오딧세이의 귀향처럼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자아라면,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자아라면, 윤리학적 자아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결코 고향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지 않는 자아입니다. 즉 타자의 무한 속에서 실종되거나 몸둘 바를 모르는 자아인 것이죠. 제 생각에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대지는 그러한 무한성의 표상입니다. 스타브로긴의 경우는 자신의 인식론적 무한에 포박당한 채, 윤리학적 무한에는 끝내 눈뜨지 못하는 불행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불행은 사소한 것이지만, 삶을 더이상 지탱하기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죠.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말입니다. 더러운 곤충처럼 지구의 표면에서 근절해 버려야 함을... 그러나 나는 자살을 두려워 합니다. 그것은 아량을 보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나는 잘 알고 있소, 그것이 허위임을. 무한한 허위의 연속 속에 있는 최후의 허위임을..."

인식론적 무한은 동시에 허위의 무한(=무한한 가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차연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론적 의미나 진실에 대면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은 한 걸음씩 물러나지요. 왜냐하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체계이며, 타자와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적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악무한인 것이죠. 그러한 사정에 눈뜨기 위해서는 타자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론적 무한의 맹목성과 비참(=가난)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은 분노와 수치와 절망을 동반하겠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스타브로긴에겐 결여되어 있으며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자살은 구원없는 필연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나는 이곳을 떠난 다음부터 여섯번째 역의 역장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나이의 앞으로 회답을 써 주십시오. 주소는 따로 동봉합니다."

그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싶지만, 불행히도 우린 그의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군요!...

06. 11. 03.

 

 

 

 

P.S. 참고로, 최근에 권철근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연구>(한국외대출판부, 2006)가 출간됐다.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단행본 연구서로는 (놀랍지만) 국내 최초의 것이다. 이제까지 국내 연구자들이 펴낸 관련서로는 포괄적인 해설서와 사전, 그리고 논문모음집 등이 있었다. 새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간행된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다. 번역이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의 과제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시각과 축적된 연구역량을 과시할 만한 업적들이 나올 때도 되었다. 그러는 너는? 자고로 '주마가편'이라고 했다. 이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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