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마지막 날이지만 제주에서 강연 일정이 있어서 김포공항에 가는 길이다. 강연은 내일이지만 당일치기로 제주에 다녀오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해서 하루 먼저 내려가는 것. 내일 저녁 강의준비도 해야 해서 가방에는 지젝의 책과 함께 라캉주의 분석가 브루스 핑크의 책들을 오랜만에 챙겼다. <라캉의 주체>나 <성관계는 없다> 같은 책들이다.

공항에 도착해(집에서 50분 거리다) 두리번거리다가 보안검색대까지 통과하니 탑승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김포공항의 국내청사는 내부 리모델링중이어서 좀 어수선한 분위기다. 커피나 한잔 하려다가 그냥 탑승구 앞에서 대기하며 페이퍼를 적는다. 혼자 공항에서 대기하는 일은 오랜만이어서(혼자 탑승하더라도 대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낯선 기분이다. 제주행은 얼추 3년만인 것 같다. 그때는 3월이었지 싶다.

가방에서 <라캉의 주체>를 꺼내 뒤적여본다. 흔적으로 보아 예전에 절반 가량 읽은 듯싶다. 핑크는 <에크리>의 영역자이면서 라캉 정신분석에 가장 정통한 해설자로 꼽힌다. 핑크의 책보다 더 쉬운 입문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번역본은 2010년에 나왔지만 원저는 그보다 훨씬 앞서 구해 읽은 성싶다(완독은 아니었지만). <성관계는 없다>가 2005년에 나왔으니 그맘때였을까. 이 서재를 뒤져보면 독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이번에 지젝의 <레닌의 유산>을 강의하면서 새삼 느낀 점이지만, 지젝과 헤겔, 혹은 라캉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 알아간다는 게 어려운 것 같다. 일종의 독서 임계점이 있어서 그걸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할 따름. 읽을 수 있거나 읽을 수 없거나. 헤겔과 라캉에 대해서 요즘 그 문턱에 있다고 느낀다. 이제 탑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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