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뒤늦게 올린다. 핑계가 없지는 않다. 주중에야 그동안 1년 넘게 불안정하던 PC 하드를 교체했기 때문이다. 과거 사양에서는 뭔가가 자주 충돌하여 다운되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두 주 전부터는 먹통이 된 상태였다. 하드를 업그레이드해서 새것으로 교체하니 훨씬 쾌적하고 안정적이다. 다만, 새집에 이사온 것처럼 아직 좀 낯설고 부리는 수족도 내 맘 같지 않다. 그동안 북플 위주로 하던 '서재질'에 변화가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고(모니터 케이블 하나가 맞지 않아서 아직은 하나를 쓰고 있는데, 예전처럼 듀얼 모니터를 쓰게 되면 페이퍼를 쓰는 속도를 좀더 낼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밀린 일부터 처리한다. 올해의 마지막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일이다.
1. 문학예술
올해 문학동네소설상 당선작이 발표되었는데, 황여정 씨의 <알제리의 유령들>(문학동네)이다. 출판 편집자로도 오래 일한 작가는(그래서 나도 구면이다) 오랜 습작기를 거쳐서 작가지망생 딱지를 이번에 떼게 되었다(당선 소감과 인터뷰는 <문학동네> 겨울호에서 읽을 수 있다). 황석영 작가의 따님이기도 하다. 부모가 작가여서 열두 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지만 등단이 늦어졌는데, 그만큼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 이제는 중견이라고 불러야 할 배수아의 신작 <뱀과 물>(문학동네)와 문학동네시인선 100권 기념하여 나온 티저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문학동네)까지도 같이 고른다. 연말은 분주하기도 하기에, 분량 부담이 적은 책들로.
예술 쪽으로는 음악인의 책, 음악가에; 관한 책을 먼저 두 권 고른다(언젠가부터 이 분야의 깊이 있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 없는 말>(프란츠)와 에릭 시블린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찾아서>(21세기북스, 2017). 전자는 뉴욕의 택시운전사에서 현대음악의 거장이 되기까지의 삶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후자는 음악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크게 3개의 이야기 줄기를 따라 흘러간다. 바흐가 18세기에 작곡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 매뉴스크립트가 사라진 일,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가 19세기에 그 악보를 발견하여 대중화시킨 일 그리고 21세기 초에 바흐의 첼로 조곡에 대한 진실을 찾아나서는 작가 본인의 모험이다. 저자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얽힌 바흐와 카잘스의 이야기를 첼로 선율에 맞춰 흥미진진하게 풀어간다."
거기에다 영화책으로 요즘 부쩍 책이 많이 나오고 있는 일본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바다출판사)를 어 얹는다.
2. 인문학
앨런 라이언의 <정치사상사>(문학동네)는 이달의 읽을 책이 아니라 이달에 읽기 시작할 책이다. 1400쪽의 책을 연말에 읽을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다. 이런 책은 2년걸이다. 와다 하루키 등이 공저한 <동아시아 근현대통사>(책과함께)도 마찬가지다. 관심 있는 주제의 장들을 읽는 게 이달의 목표다. 이시게 나오미츠의 <일본의 식문화사>(어문학사)는 내달 일본문학기행을 앞두고 있어서 눈길이 간 책. 그렇지 않더라도 일식을 즐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그리고 두 종의 3권 세트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휴머니스트)와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까치). 브로델의 책은 크리스마스까지 구입하기 위해 (기분으로는) 돈을 아끼고 있는 중이다.
3. 사회과학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책은 <애프터 피케티>(율리시즈). 이 역시 분량상 완독하긴 어렵지만, 25% 독서는 도전 가능하다. 경쟁작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신작 <유로>(열린책들)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는 유로의 전망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지난 10년 가까운 유럽의 경제 지표는 유로존에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에만 몰두하는 유럽중앙은행과, 긴축을 정책으로 삼은 트로이카의 구조 개혁 프로그램은 이제껏 먹힌 적이 없었다. 스티글리츠는 이따금씩 유로존에 관해 들려오는 장밋빛 전망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어떤 근거에서 나온 우려인가 따라가보는 게 독서 과제다. 덧붙여서 비트코인 과열 현상을 분석한 기사를 알게 된 책인데, <블록체인혁명>(을유문화사)이 올해 초에 나온 바 있다. 무엇이, 왜 문제인지 나처럼 궁금한 독자라면 늦게라도 손에 들어볼 만하다.
4. 과학
과학 분야의 책은 넘치는 분위기다. 그래서 얇은 책과 두꺼운 책으로 나누어 고른다. 먼저 얇은 책으로는 '과학 vs 과학철학, 경계를 묻다'를 부제로 한 <과학은 논쟁이다>(반니). 카오스 과학재단에서 진행한 강연과 토론을 묶은 책이다.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 한다>(사이언스북스)는 우리시대의 과학고전 50권에 대한 서평집이다. 그리고 <김상욱의 양자공부>(사이언스북스)는 지난해에 나온 <김상욱의 과학공부>(동아시아)의 뒤를 잇는 책.
두꺼운 책으로는 먼저 데이비드 슬론 윌슨의 <네이버후드 프로젝트>(사이언스북스). "세계적인 진화 생물학자이자 인류학자이며, ‘선택의 단위 논쟁’이라는 진화 과학 최대 논쟁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인 데이비드 슬론 윌슨의 신작으로 진화 과학이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비전으로 가득한 책이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이김)은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가 부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아이의 성장과 성격 형성에 부모의 양육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아이가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화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신념’이 되어버린 양육가설은 신화에 불과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대부분의 연구는 가치가 없음을 넓고 깊은 논증을 통해 설명한다." 논쟁적인 주장을 담고 있지만, 스티븐 핑커가 격찬한 책이다. "<양육가설>은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연구결과다. 나는 이 책이 심리학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나머지 한 권은 세스 호로비츠의 <소리의 과학>(에이도스)이다. "동물들의 오감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감각은 바로 청각이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소리와 듣기라는 평범한 주제에서 출발해 귀가 어떻게 탄생했고, 소리와 청각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빚어냈는지를 과학적으로 파헤친다."
5. 글쓰기/책읽기
먼저 작가지망생들을 위한 책으로 헤밍웨이와 포크너 샐린저 등의 작법을 분석한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교유서가). <거장처럼 쓰라>(이론과실천, 2011)의 개정판이다. 장정일의 <위대한 서문>(열림원)은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엮은 책이다. 편자가 고른 서른 편의 서문을 묶었는데, 글쓰기 노역이라고 생각하는 저자가 '손에 물 안 묻히고 펴낸' 책으로 "순수한 기쁨"을 맛보았다고(그래도 인세는 편자에게?).
17. 12. 10.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 역시 정해져 있는 책이다. 이번에 완간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다. 당장 이달 말부터 오랜만에 나온 이 대작에 대한 강의에 들어가기에 나도 다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부쩍 한반도 주변에서 전쟁 얘기가 많이 나왔던 한해였는데, <전쟁과 평화>를 읽는 분위기로서 의미가 있다. 150년 전 톨스토이의 고민과 성찰을 되짚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