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준의 첫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창비)가 나왔다. 북플을 통해 알게 돼 시집을 구하기 전에 맛보기로 읽어 본다. 이런 경우엔 전문이 소개된 시를 옮겨놓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 막간에 ‘어떤 귀가‘를 읽는다.

나도 모르게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하고 만다
‘어떤’ 말을 하고 나면 ‘어떤’ 말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우리는 입을 벌린다
입을 다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엇이 말하는 걸까
내 얼굴에는 언제나 ‘어떤’ 입이 놓여 있다
입속에는 ‘어떤’ 집이 놓여 있다
현관문을 돌린다
이곳으로 아무도 도착하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다가 또
무엇을 말했던 걸까
내 곁에 둘러앉은 ‘어떤’ 침묵들
‘어떤’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말로도 말하지 않는 우리가 대화를 한다(‘어떤 귀가‘ 전문)

흠 ‘어떤‘ 말들에 시비를 거는 시로 보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데 어떤 말을 했고, 더 나아가 서로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다면 그 말은 누구의 말이냐고, 혹은 무슨 말이냐고 시비를 거는 시. 우리는 입을 벌려 말을 하지만 그 말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른 말인가, 시인은 그런 걸 따져보려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이 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이고 그래서 별로 흥미롭지 않다. 말과 의미에 대한 회의도 차고 넘치지 않는가. 이 시인의 시인다움을 보여주려면 다른 시를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시들은 부분 인용만 돼 있어서 찬찬히 읽어보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에,

그것을 생각하다가 그것은

이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옷장 속에 구겨두고 어항 속에 풀어두고 꽃병 속에 꽂아두고

이것에는 단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두운 곳에서 헤엄치다가 가만히 시들어버립니다. 아득한 나라 알 수 없는 숲 속에서 이름 모르는 새가 울고

내 곁에 있어도 그것인 것들

그것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목을 닮았습니다

(…)

내 곁에 없어도 이것인 것들(‘설명‘ 부분)

이라고 옮겨보아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언어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나가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고 해두자. 그런데 시는 그걸로 충분한 것일까. 아직 설득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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