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너무 늦게 먹지도 많이 먹지도 않았지만 속이 더부룩해서, 게다가 눈은 말똥말똥해서 잠을 못 자고 있다. 영화를 보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책상 앞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김삼웅의 <박정희 평전>(앤길)을 읽다가 또 오늘 배송온 시집들 가운데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민음사)를 읽었다. 2012년에 나온 시집이고 내가 읽은 건 올봄에 나온 13쇄. 이 역시 스테디셀러란 뜻인가.

그냥 일독한 소감으론 별로 할말이 없다는 것.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표제시의 시구를 갖다 쓰자면 나는 ‘이 시집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어떻게 이 시집을 다뤄야 하는가˝ 알지 못하겠다. 어떤 시들이길래? 건조과에 속하는 시들이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이라는 말이 유머라면 꽤나 썰렁한 유머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는 대단한 발견일까? 그럼에도 무려 한 연을 구성한다. 그 다음 연도 싱겁기는 마찬가지다.

말린 과일은 당도가 높고, 식재료나 간식으로 사용된다 나는 말린 과일로 차를 끓인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
실내에서 향기가 난다

너무 심심해서 놀랍기까지 하다. 이런 대목을 시로 읽는다면 그건 순전히 시집에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연을 빼놓긴 했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이런 시가 호평을 받는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다른 시들이 너무 습한 시들이어서, 물에 절은 시들이어서.

황인찬스러운 시를 하나 더 읽어본다. ‘그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그것이 사라졌다

성경을 읽다가
다 옳다고 느꼈다

예쁜 것이 예뻐 보인다
비극이 슬퍼서
희극이 웃기다

좋은 것은 좋다

따뜻한 옷의 따뜻함을 느낀다
컵 속의 물을 본다

투명한 빛이 바닥에 출렁인다

그것은 마시라고 있는 것

해설에서 박수연 평론가는 ‘건조과‘를 두고서 ˝심지어는 차를 끓여 마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도 세속의 잡다한 관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 대상과 순결하게 관계 맺으며 신성을 제련하는 구도 행위가 된다˝고 적었다. ‘그것‘도 굳이 정당화하자면 그러한 구도적 제스처를 보여주는 시로 읽을 수 있겠다. ˝좋은 것은 좋다˝가 무슨 말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같은 의미연관을 갖는 게 아니라면 구제할 방도가 없다.

다만 구도 행위나 구도의 제스처를 우리가 굳이 시로 읽고 또 시로 대접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시보다 대단할지는 모르나 시는 아닌 것. 첫 시 ‘건조과‘와 짝을 이루는 마지막 시 ‘무화과 숲‘을 읽는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시의 전문이다. 이 정도 동어반복이면 역설적으로 대담하다고 할 만하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아침에는 아침을 먹다니, 허를 찌르는 수준 아닌가! 아마도 견습시인이 이런 습작을 들고 왔다면 시가 장난인 줄 아느냐며 많이 혼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들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는 행성도 존재하니 세상은 참으로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인찬은 ˝시를 써도 혼나지 않는 꿈˝을 제대로 꾼 시인으로 기억해둘 만하다...

PS. 황인찬은 <희지의 세계>(2015)까지 두 권의 시집을 펴냈다(두 권의 시집을 같이 받았다). 많이 달라졌을 것 같지 않지만 오늘내일중으로 읽어보려 한다. 나로선 난감함을 피력했지만 열독자들도 있을 것이니 리뷰도 찾아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