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시인 황유원의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를 펴들고 몇편 읽지 않아서 받는 인상은 ‘우량시인‘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우량아‘를 시인에도 대입한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이즈‘가 다른 대형 신인. 실시간으로서 순간을 최대화하는 역량이 이 시인의 자질이고 재능이다. 적당한 이름이 따로 생각나지 않아 일단 ‘실시간 시‘라고 부르겠다. 그의 솜씨를 잠시 감상해본다. ‘바람 부는 날‘이다.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려과 공평함
그러나 고층빌딩의 견고함
원피스의 펄럭임은 야외에 달린 커튼
걸어다니는 커튼, 긴 머리의 자유로움과
저 여잔 머릴 기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

이렇게 죽 이어지는 시다. 무엇이 강점인가? 생생한 현장감이다. 이런 시를 실내에서 썼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건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쓴 시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쓴 시다. 실시간을 구성하는 순간순간을 바닷물을 움켜쥐듯이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가 해 가면서 쓰는 시, 그리고 물론 소주 한 병에 물회 한 접시를 시켜놓고 쓰는 시.

바람 부는 날 멀리서 바라보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빌딩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테이블에 올려진 물회에 뜨거운 밥 한 그릇을
소주 한 병 시키고 잔 세 개를 부딪칠 때 불어오는 바람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바람보다 더 바람 같은 바람의 통로 안에 담겨 한 접시의 물회를
이제 더 큰 바람이 불어오겠지
암 그렇고말고
(...)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마지막 잔을 비우고 그 속에 한 잔의 바람과 평화를
이 세상 모든 바람이 지금 여기로 불고 있다는 착각
지금 이 바람은 우릴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는 확신
이 모든 접시들과 수저들이 처음 보는 우릴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게 바람이 하는 젓가락질이라는 망상

이제 중반까지다. 실시간 시는 의도가 작용할 수 없는 시다. 예측불가한 현재의 감각이 시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시인을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망상과 몽상에 자신을 내어주고서 다만 취기와 함께 앉아있을 뿐이다.

잔이 세 개였으니 세 명이 ˝한치 학꽁치 미주구리 문어 대가리˝를 안주 삼아 소줏잔을 부딪치면서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을 몸으로 느낀다. 이 시는 의도도 없고 주제도 없으니 어떻게 끝나는가. 술자리가 파하면 끝난다. 바람 부는 날의 시는 다른 결말을 가질 수도 없다.

오늘 왜 난 자꾸 눈물이 날까
이봐 그러고 있지 말고 저길 봐
어느새 일렬로 늘어선 소주병들이 진한 방풍림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봐 앞에 앉아서 자꾸 핸드폰이나 쳐다볼 바엔 차라리 지나가는 여자 다리를 쳐다보지 그래
난장판이 되기 직전 빈 접시의 바람을 집어먹는 나무젓가락의 튼튼함
우리가 이제부터 불어올 모든 바람을 이 한 잔의 공간 속에 모두 쑤셔 담을 순 없겠지만
마침표같이 눌러놨던 돌멩이들 죄다 굴려 버리는 바람
그러나 어딘가에선 반드시 멈출 돌멩이를 바라보며
바람 부는 날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취기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씩을 따라주며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빈 잔은 이제 그냥 빈 잔으로 남겨 두고

중간에 자를 수도 없어서 마지막 시행까지 옮겼다. 이미 적었지만, 무얼 노래하는 시도, 표현하는 시도 아니다. 시를 채우고 있는 건 실시간의 현장감과 바람의 공간감이다(그렇다, 바람은 공기에 부피감을 부여함으로써 공간화한다). 시와 함께 독자는 시인의 술자리에 동석한다. 그리고 얼만큼의 시간을 공유한다. 취기까지 공유한다면 독자도 시인과 같은 족속이 될 만하다...

PS. 덧붙이자면, 시인은 밥 딜런의 <시가 된 노래들>(문학동네)도 공역했다. 대표적인 노래 ‘불어오는 바람 속에‘도 우리말로 옮겼는데 ‘바람 부는 날‘의 시인이 옮겼다니까 수긍이 간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얼마니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모래 속에서 잠이 들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이 하늘 위로 쏘아올려야
포탄은 영영 사라질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나의 친구여, 바람 속에서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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