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정리와 아이방 페인트칠 이후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제는 유치원 운동회에서 달리기에다 줄다리기까지 한 탓에 거의 '가사' 상태이다. 지난주 몇 차례의 음주와 만성적인 피로가 보태지니까 거동 자체가 불편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밀린 원고와 강의준비를 걱정하며 드러누워 있던 차에 눈에 띈 책이 김현 문학선 <전체에 대한 통찰>(나남, 1990)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초판이 아니라 1993년의 3쇄본인데, 출간당시엔 수록된 평문들의 대부분을 읽었거나 이미 갖고 있는 형편이어서 따로 손길이 가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책을 산 건 '기념'의 성격에다 '선집'으로서의 유용성을 고려해서이다(이후에 절판되었던 이 책은 하드카버로 재출간되었지만, 그래서 지금도 구해볼 수 있는 책이지만, 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김현이지만 편자는 그가 아니다. 그의 제자인 평론가 정과리이다. 편집의 말에도 밝혀져 있지만, 그는 1990년 6월 27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으며 책이 나온 건 그해 11월이다. 그리고 책의 서문격으로 실려 있는 건 이 선집을 위해 따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그해 5월 그가 수상하게 된 제1회 팔봉 비평문학상의 수상 소감이다. 기억에는 이 상을 주관한 한국일보에 실리기도 한 이 소감문의 제목이 '뜨거운 상징을 찾으며'이다. 제목만큼이나 이 소감문 자체도 평균적인 체온 이상의 열기를 포함하고 있는데, 나태와 안락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기도 하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선 이 상을 만드시 팔봉(八峰) 선생의 유족 여러분과 이 상을 공식적인 것으로 확대시킨 한국일보 여러분, 처음 제정된 상의 심사를 맡아하신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스승-선배-동료-후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상을 공적인 평가의 표시로서가 아니라 사적인 공감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공적인 평가는 지나칠 수 있고 모자랄 수도 있지만, 사적인 공감은 그것이 지나치건 모자라건 언제나 개인적인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평가는 과분한 것일 수 있으나 즐거움은 과분한 것이 아니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이 상이 올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는 점에 큰 기쁨을 느끼며 이 상을 받습니다."

여기서 팔봉은 회월 박영희와 함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맹주로 활동한 바 있는 김기진(1903-1985)을 말한다. 비평가와 소설가,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팔봉의 서거 이후에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김팔봉문학전집>(전6권)이 출간되었고 유족의 뜻에 따라 팔봉 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김현은 그의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으로 그 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참고로, 김윤식이 제2회 수상자였으며, 정과리는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으로 2000년 이 상의 제11회 수상자가 되었다. 팔봉비평문학상은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김환태평론문학상과 함께 국내에서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가장 권위있는 상이지만 해마다 수상자를 선정하다 보니 이젠 '웬만한' 비평가들을 모두 수상자 목록에 올리게 됐다. 첫 수상자를 선정하며 이 상이 가졌던 '뜨거운 상징성'은 그 사이에 다 식어버린 셈이다. 김현의 소감대로 '공적인 평가'보다는 '사적인 공감'의 차원에서 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흠을 잡을 것도 없겠지만. 김현의 수상 소감/서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팔봉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제 머리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길 한복판에 시체처럼 팽개쳐진 팔봉 선생을 찍은 한 장의 사진입니다. 그 사진이 어떻게 찍힌 것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모두 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 '여러분'에 속하지 않는다. 문제의 사진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인데, 짐작에는 6·25전쟁 때 공산치하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봉변을 당한 팔봉을 찍은 사진이 아닌가 한다. 팔봉은 기적적으로 회생했다고 하는데, 1961년에는 '나는 살아있다'라는 그의 실제 체험기에 근거하여 <인민재판>이라는방공홍보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