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 2006)에 대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책의 출간 직후에 일련의 언론 리뷰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었고 지난달에는 꼭 읽어보려고 했지만 60쪽 정도를 읽는 데 그쳤다. 책은 여전히 책상머리에 꽂혀 있는데, 독서를 중단한 이유는 책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꽤나 재미있어서였다. 그 '재미'가 다른 일들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에 일단은 접어두었던 것이다. 한데, 이달 말까지도 일들은 밀려 있는지라 이 책은 연말까지 읽으면 다행이다 싶다. 해서, 당분간은 읽을 만한 리뷰를 읽어보는 걸로 면피할까 하는데, 교수신문에 링크돼 있는 서강대 대학원신문의 이 집중서평은 그런 필요를 가뿐히 충족시켜준다. '엄청나게 발랄하고 믿을 수 없게 오스터적인'이란 제목 자체가 책을 읽기 이전에 내가 기대했던/예상했던 바와 별반 다르지 않다. '리틀 오스터' 사프란 포어의 재능과 그 재능의 문제점(?)에 대해서 짚어보고 있는데, 나의 독후감이 크게 다르다면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교수신문(06. 10. 13) 엄청나게 발랄하고 믿을 수 없게 오스터적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하 『엄청나게』로 함)을 읽다. 참으로 오랜만의 동시대적 미국 소설의 도착이 아닐 수 없다. 시즌을 노리는 블록버스터 영화나 케이블 드라마를 빼면 지난 10년간 한국내  미국문화 영향력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엄청난 자본과 매력적인 스토리가 결합된 드라마 시리즈물은 과거 할리우드 영화나 팝음악의 영향을 압도하고도 남기에 이런 판단은 엄살일지도 모른다). 비교적 최근에 각광받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후광을 업고 E. 애니 프루의 단편집이 동명의 타이틀로 소개되었지만 90년대에 이미 그녀의 장편이 두 권이나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매년 무수한 외국소설이 번역되지만 입지를 단단히 굳혀 차기작까지 소개되는 영광을 누린 작가는 극소수에 한정되고 미국 작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 중 하루키와 거의 같은 즈음에 소개된 폴 오스터(『고독의 발명』의 번역본 2종이 이미 90년대 초반에 출간되었다)는 영화   <스모크>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후, 현재는 모출판사에서 거의 오스터 산업에 가까울 정도로 자질구레한 글모음까지도 소개되어 매우 친숙한 인기 작가군에 속한다. 여기서 굳이 오스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에서 오스터의 첫소설인 『고독의 발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사실 오스터의 대중적 이미지가 『고독의 발명』과 같은 진지한 초기 소설들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독의 발명』은 젊은 소설가 지망생에게 현대 산문이 제기할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이고도 어려운 과제를 부여했다. 개인사의 정점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겨진 것에 대한 정면 대결. 그것이 젊은 시절의 오스터가 탐색 했던 것이라면, 포어는 같은 연장선상에서 그 위에 발랄함을 얹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소개에서 알 수 있듯, 그는 2차 대전 시 할아버지를 구해준 여인을 찾기 위해 단지 사진 한 장만 들고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첫 소설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일종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으로서 여행이란, 확실한 목적과 대상을 품고 출발하기에 그 결과에는 상관없이 존재에 대한 강한 ‘긍정’의 서사일 수밖엔 없다(이러한 긍정의 확인이란 경험을 단지 기억하는 행위 이상으로 고양시키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흔히 그걸 글쓰기-문학이라고 말한다). 청년 작가 포어의 이러한 경향은 『엄청나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포어 소설이 갖는 강점 중 하나다.

소설은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꼬마 오스카가 리무진을 타며 장례식으로 가는 도중 떠벌리는 독백으로 시작된다. 오스카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에 대답하지 못했던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 벽장에서 우연히 떨어뜨린 꽃병 속에서 ‘블랙’이라는 이름이 서명된 봉투와 봉투 안의 열쇠를 찾기 전까진 말이다. 열쇠와 ‘블랙’이라는 단서를 통해 오스카는 드디어 아버지에게 진지한 용서를 구할 구실을 찾게 된 것이다! 비밀 탐문 수사를 통해 한층 성숙해지는 오스카는 동시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스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간의 화해를 지켜보는 유일무이한 목격자가 된다. 세상에 대한 긍정과 희망이라는 낯익은 주제는 재기 넘치는 구성과 병렬적 목소리의 겹침 속에 다소 시끄럽지만 매우 근접한 거리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살아 있음에 대한 실재감-기억의 대리물로서 열쇠와 열쇠로 열리게 될 자물쇠-과 아버지라는 숨은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꼬마 오스카는 짧고 단편적인 여행들을 통해 숱한 ‘블랙’들과 만난다. 이러한 어둠이란 『고독의 발명』에서 피노키오와 주세페 노인이 재회하는 상어 뱃속의 잉크병 속 같은 어둠(마침내 고독-상실과 화해를 가져다주는!)과 대응한다(한편, ‘블랙’이라는 서명이 적힌 봉투안의 투박한 열쇠는 또한 오스터 초기 소설 『뉴욕 3부작』의 「잠겨진 방」을 떠올리게 한다). 오스터가 존재론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이 고래 뱃속 요나 모티브는, 포어에게는 오스카와 만나는 낯설지만 애틋한 실제 인간들로 변형되어 화해와 치유의 구체적인 표정들로 드러나고 있다.

한편, 오스터가 형식적 생활 패턴 뒤로 숨어 영영 자아를 유폐시킨 아버지를 회상하던 중, 내밀하고 끔찍했던 가족사와 맞닥뜨린다면, 『엄청나게』에선 총 17장 중, 각 4장 씩 할애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육성을 통해 할아버지의 미처 태어나지 못한 아들을 비롯한 가족사의 질곡을 얕은 음영처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고독의 발명』에서 화자 A(오스터)가 횔덜린, 안네 프랑크, 고흐, 에밀리 디킨슨 등의 방을 찾아 그들의 방에서 울려 퍼져 곧 A(오스터)와 공명하는 목소리들로 독창적인 고독의 형식을 창조했다면, 포어는 태어나지 못한 아들과 아버지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고 죽은 아들을 둔 할아버지의 정신적 공백을 3대에 해당하는 꼬마 오스카의 어둠에의 탐험을 통해 메워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편으론 2차대전과 9.11이라는 무거운 관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자 택한 형식이지만, 오스카의 발랄함과 전복적 이미지가 가지는 실제적인 한계들을 직시하지 않는 결과로 다소 가볍게 읽히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오스카와 기왕의 소설들에 등장했던 너무 아이 같거나 어른스러운 어린 화자들과의 차이점을 거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거의 그럴 정신이 없게끔 만드는데, 이는 형식을 뒷받침해주는 사진, 타이포그래피들의 삽입이라는 의도적 중단의 효과 때문이다(이런 시도를 새로운 소설 형식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꼭 사진이 아니라면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소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사진들만 넘겨보아도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 ‘리틀 오스터’ 포어의 두 번째 소설은 9.11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배면에 깔고 있기에, 4년의 시간이 제공하는 미진한-미숙한 시선을 애초에 지니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의 시각은 자신의 세대가 내릴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방식의 봉합이며 그것이 문학적으로 올바르냐라는 물음을 교묘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말해져야 할 것들이 매우 난삽하게 떠돌고 있음에도 ‘그 이후의 것’들은 고스란히 남겨둔 채, 여덟살 짜리 꼬마 뒤로 가뿐히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9.11에 대한 정면 대결을 바라는 것 자체가 젊은 작가에게 무리일 수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 전 세대의 보편적인 전쟁의 상흔(2차대전)과 동시대 9.11을 나열하며, 할아버지의 두 아들을 희생시킨 것은 조금 작위적인 면이 없진 않다(조각가가 꿈인 할아버지가 실어증에 빠져 사람들과 글을 써서 소통한다는 장면은 간혹 소설을 희극적으로 몰고 간다). 또 새로운 문학이나 새로운 소설 형식의 실험적 측면에서도 역시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려워 보인다. 이 소설에 실린 사진들만 보자면 결코 이미지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선별되어 호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앞으로 이미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는 텍스트를 양산할 부작용 또한 낳을 지 모른다.

포어는 공교롭게도 필자와 동년배이다. 같은 시절 오스터의 소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찌할 수 없지만, 결코 쉽지 않는 긍정적인 세계관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호감으로 작용했다면 너무 개인적일까? 포어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곧 소개될 첫 소설 『모든 것은 아름답다』를 읽은 후로 미뤄야겠지만, 영화로 제작되었을 정도라면 나이에 비해 일찍 찾아온 성공이 차기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가 더욱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엄청나게』 역시 일정 정도 영상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소설이라 짐작된다. 일본의 신세대 작가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지금, 포어 부부의 성공적인 진입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면, 뭐랄까, 오스카 식으로 ‘갑자기 부츠가 무거워진다’.(남승민 | 문화평론가)

0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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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E 2006-10-15 10:48   좋아요 0 | URL
이 작가의 부인인 니콜 크라우스가 쓴 '사랑의 역사'도
오스터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더군요.

로쟈 2006-10-15 15:28   좋아요 0 | URL
<사랑의 역사>를 저는 제쳐놓았었는데(제목이 좀 감상적이어서) 여러 사람들의 호평에 떠밀려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해보고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