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말 세계일보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고 몇 마디 덧붙이겠다. 원로 비평가 유종호 선생과의 인터뷰인데, '인문학 위기의 시대'에 대표적인 '인문학자'인자 '교양인'으로서 그가 귀뜀해주는 '인문학적 지혜'를 잠시 따라가본다.

세계일보(06. 09. 30) 원로학자 유종호에게 듣는다

인문학이 ‘또’ 위기에 처했다. 1996년 11월 전국 21개 국공립대 인문대학장들이 제주에 모여 ‘인문학 제주선언’을 했고, 2001년에는 전국 국공립대 인문대학협의회 차원에서 인문학 연구와 교육 기반의 붕괴를 우려하는 ‘2001 인문학의 선언’을 내놓았다. 이로부터 5년 만인 지난 15일에는 다시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 117명이 ‘인문학 선언’을 발표해 사회적 파문이 확산하고 있다. 급기야 인문학 선언을 발표한 고려대를 비롯해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의 학장들이 모여서 인문학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던 중 이번 주를 인문주간으로 선포하고, 이화여대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행사까지 벌이는 중이다.

도대체 위기의 실체가 무엇이기에, 아무리 위기라고 외쳐도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고 때만 되면 같은 아우성이 반복되는가. 과연 ‘인문학’의 위기인가, 아니면 한 중견학자의 독설처럼 인문학으로 밥벌이를 하는 인문학자와 인문학도의 위기인가. 위기의 정확한 실체는 무엇인가. 위기를 막을 근본적인 처방은 없는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인문학자로서 46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섰고, 어느 쪽에도 쉬 쏠리지 않는 중립적인 지성으로 평가받는 원로학자 유종호(71)씨를 만나 그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인문학이 위기라고 때만 되면 반복해서 외치는데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겁니까?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위기 선언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학의 위기’라는 맥락으로 들립니다.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 선언은, 근본적인 인문학의 위기 차원보다도 인문학과 지원자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교양과목이 축소되고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려운 상황을 피부로 느끼기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만의 고립된 위기 상황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문학의 위기, 교양의 위기, 대학의 위기, 고급문화 전반의 위기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현상은 범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과거 인쇄술 중심의 책 문화에서 인터넷 전자문화로 옮아가는 문명의 전환기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지요.”

―인문학만의 단독 위기가 아닐뿐더러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서구의 경우는 어떤 양상인가요?

“미국에서도 영문과 지원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도 전반적으로 인문학도가 과거에 누렸던 위세는 추락하고 있지요. 하지만 미국은 우리보다 훨씬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금방 표가 나지 않는 거지요. 일본만 해도 최근 사립대학 하나가 문을 닫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대학의 위기가 감지됩니다. 영국은 불과 40∼50년 사이에 대학생 수가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대학을 나온 이들이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의 전문직에 종사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는 거지요. 영국에서도 문과대학 지원자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상황이 더 안 좋아 심각한 겁니다.”

―최근에는 인문학 출판인들이 모여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며 인문학자들의 위기선언에 보조를 맞추고 나섰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사회는 근본적으로 책을 많이 읽는 사회가 아닙니다. 돈을 번 사람들이 학술이나 문예 진흥을 위해서 많이 지원하는 사회도 아니지요. 일본도 경제대국이고 문화에 대해서 많이 지원한다고 하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수준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는 종합지도 미국의 전문 서평지에 비해 수준이 한참 떨어집니다. 하지만 일본의 메이저 신문 1면에는 꼭 책 광고가 들어갑니다. 광고 단가를 떠나서 신문의 전통과 그 사회의 문화를 위한 배려지요. 인문학의 위기가 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문화적 인프라가 취약한 우리의 경우는 일본이나 미국보다 훨씬 그 강도가 심각한 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인들이 불평할 만도 하지요.”

―학자들은 물론이고 출판인들도 모두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는데요.

정부의 지원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저차원의 지엽말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장애인이나 고엽제 피해자들이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면 곤란하지요. 문제의 핵심은 사회 풍토를 바꾸는 일입니다. 1960년대 이후 정부가 내세운 중요한 목표가 경제 건설이었고, 초고속으로 이룬 산업화 과정에서 효율과 실용성, 국가 부강에 직결되는 것만을 숭상하다 보니 자연히 인문적 가치가 평가절하되었지요. 또 하나의 축은 이른바 민주화세력인데, 이들은 실천을 중시하면서 운동의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의 본질 탐구나 인간성 중시 같은 가치가 평가절하됐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제시한 신지식인이라는 것조차 경영 마인드를 지닌 시장 지향의 지식인인데, 이 또한 인문정신과는 동떨어진 방향이었지요. 결과적으로 작금의 우리 사회에는 반인문적 풍토가 조성돼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인문학과 교양의 위기 사태에 직면한 거지요.”

―그렇다면 인문학의 실용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왜 지금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요?

“행복의 추구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자는 우리의 최종 목적이지요. 변혁을 도모한 사람들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잘살기만 해서도 안 되고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에 대한 이해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정신을 지닐 수 있고 관용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덜 살벌하고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정신이요 가치입니다. 토마스 만은 ‘교양이란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향유할 능력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행복합니다.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남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행복한 사람이 많아져야 사회도 행복해집니다. 삶의 여러 가능성에 대한 향유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기본입니다.”

―인문학 부흥을 위한 근본적인 처방은 없을까요?

사람이 빵만 가지고 살 수 없다는 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이 가장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똑똑한 아들에게는 사업을 물려주고, 그다음 똑똑한 아들은 랍비로 키우되 사위 하나는 반드시 똑똑한 지식인을 얻는다고 합니다. 비즈니스만 해서도 안 되고, 성직자만 배출해서도 행세를 할 수 없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까지 가문에서 나와야 사회적 인정을 받는 풍토를 반영하는 사례지요. 그들이 인종적으로 탁월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과학자, 예술가, 학자들이 노벨상을 휩쓸게 된 겁니다. 이러한 사회 풍토를 위한 인문학적 인프라를 조성하면서 정부의 지원도 요청해야지요.”

―불행한 사람은 다른 이들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말씀, 인상적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인데, 우리는 정작 효율과 실용에만 매달려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 출신 철학자 아이자이아 벌린이 소개한 일화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영국의 명문 맥밀런가의 한 사람이 대학 1학년 때 철학을 교양과목으로 들었는데, 첫 시간에 철학교수가 ‘내 강의를 충실하게 들으면 어떤 걸 얻을 수 있는가’ 물은 뒤 ‘관리나 기업가가 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내 강의를 잘 들으면 적어도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의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정도의 분별 능력을 지니게 되며, 특히 남을 속이려 드는 것은 금방 간파하게 된다’고 말했답니다. 이 예화를 인용하면서 벌린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이야말로 굉장한 능력’이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인문학의 기본을 잘 시사하는 발언이지요."
 
"인문학적 소양은 사람을 지혜롭고 총명하게 만듭니다. 이런 정신으로 인문학을 받아들이고 위기를 거론해야지, 왜 우리는 돈을 적게 지원해서 망하게 하느냐고 항의하는 태도는 자칫 직업 이기주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생산적인 건 바로 눈에 띄지만 인문학이란 가시적인 게 아니어서 본질을 꿰뚫고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삶을 제대로 향유할 능력을 갖춘 한 사람의 행복한 교양인을 만드는 일은 오랜 투자와 사회적 노력 끝에 가능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회적인 큰 목적을 세우고 노력해야지요.”(조용호 기자)
 
 
한국일보(06. 09. 21) 老지성들에게 듣는다, 인문학의 길을…
 
 
왜 인문학인가? 왜 인문학이 중요하며 우리의 삶에 절실한가? 또 그토록 중요한 인문정신이 죽네 사네 하는 지경에 이른 까닭은 무엇이며,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무엇을 반성하고 고쳐가야 하는가? 그리고 또 왜 우리는 너무나 막연하고 거대해서 공허하기까지 한 이 질문들을 지금 당장 스스로에게 아프게 던져야만 하는가?

이 무겁고 아득한, 그렇지만 긴박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놓고 학술원 회원인 정명환(77)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차하순(77)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예술원 회원인 유종호(71) 전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가 20일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 당대의 노(老) 지성들은 그들이 짊어진 이 질문들보다 더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시종 깊이, 그리고 느리게 대화를 이어갔고, 좌담의 내용과 형식 자체로서 우리가 복원해야 할 인문주의의 전범(典範)을 연출했다.

차하순=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기 앞서, 그 기원을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말의 기원, 어원처럼 말이죠. 저는 지금 이 위기가 인문학의 본질에 닿아있다고 봅니다. 인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의 가치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조건, 삶의 조건이 급변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시대 공자 시대의 인간에서 생명공학, 정보통신 사회의 인간이 된 거죠. 그렇다면 지금 위기의 기원은 오래된 것이며, 다만 조금씩 심화해왔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1960년대 개발시대 이후 그 병증이 급격히 악화했습니다. 외적으로는 상업화, 산업화라는 인문학적 환경의 변화이고, 내적으로는 인문학 자체가 변화된 세상에 충실히 적응하지 못한 채 전통적 방법과 사고방식을 고수한 것입니다.

정명환=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자리에서 아직도 엉뚱한 소리들이 들려요. 우리 인문학이 식민지화했다, 쇼비니즘으로 치우쳤다, 이념화했다, 패거리문화를 형성했다, 학문간 교류가 빈약하고 배타적이다 등등…, 구구한데, 그것은 인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풍토 전반의 문제라 해야 옳습니다. 우리 인문학 자체의 연구성과는, 불문학의 예만 보더라도, 괄목하게 발전해왔어요. 우리 학자들이 프랑스에서 불어로 쓴 논문이 현지의 유수 학술전문 잡지에 실리고, 우리 정부의 보조 없이 유수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왜 대학에 학생들이 안 와서 폐과 지경에 이르고,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영문학과는 셰익스피어를 제쳐두고 시사영어로 기울어질까요.
 
저는, 차선생 말씀처럼, 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교양을 담당하던 계층이 급속히 붕괴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효율성과 합리성, 물질적 풍요와 이윤 지상의 이념 하에 전통적 사대부ㆍ선비계급의 역할을 대신할 지식ㆍ교양 엘리트층이 설 땅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가장 큰 책임은 매스컴, 특히 TV가 져야 합니다. 정신적인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간 이윤 추구의 주체들,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에 기생해온 대중문화, 그리고 과학기술문화 만능정신이 야합한 결과지요. 가장 대중적 레저 수단이라는 TV앞에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 회복을 위한 레저’의 문화를 상실한 것입니다.


유종호= 이 위기가 60년대 이후 심화했다는 데 대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만 거기에는 인문적 가치를 도외시한 산업화세력 못지않게 거기에 맞선 ‘민주화세력’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들은 운동의 효율성을 위한 특유의 실천적 논리 하에 인문적 가치, 인간적 가치를 밀쳐냈습니다. 근본적인 반지성주의, 반지식인주의가 싹튼 것이지요. 지식인을 ‘먹물’이라고 칭했던 당시의 유행어가 반지성주의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또 민주화 정권이라는 김대중 정권이 기치로 내건 ‘신지식인상’은 어떻습니까. 그것 역시 친시장적ㆍ반인문적 효율주의였고, 경영주의였어요. 한 마디로 인문학적 상상력이 앉을 자리를 사회학적 상상력이 차지한 결과입니다. 정보화 사회라는 게 뭡니까. 그 사회의 경쟁력은 정보에서 나온다는 것 아닙니까. 정보란 새로워야 하고, 실용적이어야 하고, 쉬워야 합니다. 그 새롭고(쉽게 교체되고), 실용적이고(물질적 가치), 쉬운(편의주의, 대중주의) 정보의 전횡 앞에 체계적이고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이 대접 받을 자리가 사라진 것이지요.

정명환=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당장 이 정부 문화관광부의 행태를 보세요. 그들의 문화정책 역시 경제지상주의 아닙니까. 한류니 문화콘텐츠니 하는 것들 역시 근원적 인간의 가치, 인문학적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다시 말해 휴머니티를 배반하는 행위지요. 문화란 어떤 삶이 인간적인 삶인가, 진실한 삶의 행복은 무엇인가, 하는 괴로운 정신적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차하순=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19세기 산업혁명 이래 우리 삶을 지배해 온 외형적ㆍ물질적 가치와 내면적 삶의 질 사이의 괴리를 메워가는 일입니다. 물질사회의 빠른 행보를 문(文) 사(史) 철(哲)의 느린 걸음이 따르지 못한 간극을 좁혀야 한다는 거죠. 인문학의 신축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인문학자들은 인공지능, 인간복제에 대해 그 위험성은 말했지만 윤리적, 도덕적 준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어요.
 
또 문화의 양면성, 즉 전문화ㆍ고급화에 대한 학문적 추구와 ‘쉽게, 쉽게’를 중시하는 대중적 가치에의 경도입니다. 사회 지식 엘리트들에게 대중적인 메시지를 쉽게 직접 전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사회처럼, 전문가 집단과 대중들을 매개하는 중간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의식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인들이 음악ㆍ미술은 후원해도 인문학은 후원하지 않지요. 해외로 직원을 파견할 때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쳐달라고 우리에게 강연을 요청하면서, 경제연구소나 만들지 인문학연구소는 만들지 않습니다. 직원을 채용할 때 내거는 전공 제한도 어불성설입니다.

유종호=의식구조 개혁에 덧붙여 저는 대학 개혁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은 대학과 대학생이 너무 많고, 차별성이 없어요. 그래서 50~60년대 대학생이 지녔던 건강한 의미에서의 자부심, 교양적 가치 중시의 풍토가 희석됐어요. 교양을 과시할 대상마저 없어져버린 시대가 된 거죠. 그러니 교양이 대접 받을 수 없죠. 대학개혁 없이 인문학의 위기 극복은 요원합니다.

정명환=저는 정부의 역할도 주문하고 싶어요. 서울대를 비롯한 모든 대학이 취업예비학교가 돼버린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죠. 다만 그럼에도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나아갈 공간, 가령 프랑스의 ‘국립학문연구소’처럼 ‘국립인문학연구소’를 설립해야 합니다. 가령 ‘몽골어’ 전문가는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재지만, 그를 받아줄 대학이나 기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소 같은 기관을 국립인문학연구소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들에게는 ‘건강한 자아 분열’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인문학 전공자가 졸업한 뒤 기를 쓰고 증권회사에 취업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증권맨으로서의 대중적 자아(public self)와 불문학도로서의 개인적 자아(private self)를 분열시켜 고통스럽더라도 인문적 가치를 누리자는 겁니다. 낮에는 시계공으로 일하며 밤에 철학을 했던 스피노자처럼 말이죠. 직장인으로서 돈을 버는 목적 역시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 진정한 행복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인문학적 교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한국일보 편집국 인터뷰실에서 시작된 좌담은 인사동의 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도 이어져, 이 시대 보수와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현 정부에 대한 질타 등으로 주제와 대상을 넘나들며 길게 이어졌다. 주흥이 도도했지만 그들의 대화는 시종 나직하게 우렁찼고, 소박하게 아름다웠다.(정리= 최윤필기자)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arioli 2006-10-12 21:42   좋아요 0 | URL
좋은 얘기지만, 높이 오른 한국인에 대한 불신이 제 맘 가득한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저들의 말이 백번 옳긴 하지만, 역시 인문학 교수다운 지극히 좋고 아름다운 얘기만 하네요. 딱 인문학 틀 안에서만 놀려고 하는 모습. 리영희 정도는 되어야 제 눈에 찰까요.ㅎㅎ 암튼 저들이 자리를 옮긴 인사동 음식점은 한 끼에 얼마짜리일까요?

로쟈 2006-10-13 00:59   좋아요 0 | URL
물론 저 또한 '원로들'의 의견에 모두 공감하거나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생각의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참고로 인사동의 음식점들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parioli 2006-10-13 16:30   좋아요 0 | URL
인사동과 그 근처에 아주 고급 음식점이 있던데요... 강준만이 얼마 전에 쓴 '기회주의 공화국' 을 읽고 아주 공감했죠. 한국에선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위로 못 올라간다... 현실이 우리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기는 하지만.

로쟈 2006-10-13 17:01   좋아요 0 | URL
"한국에선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위로 못 올라간다" 고로, 한국 사회에서 잘 나가는 인간들은 모두 기회주의자이다, 라는 건 너무 단순한 논리 아닌가요? 어느 사회이건 기회주의자로 처신하는 것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을 높여주긴 하겠지만, 그게 다른 설명을 모두 봉쇄시켜버릴 정도일까요? 한편으로, 기회주의에 대한 강준만식 해설에 기대면, "기회주의는 한국의 무한한 잠재력"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제도ㆍ조직ㆍ개인도 사회적 존경과 신뢰는 누리기 어렵게 돼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적 존경/신뢰를 잃는 대가로 지불받는 것이 기회(주의)인 것이지요. 그런데, 원로 인문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시회적 존경/신뢰'의 회복입니다. 인문학을 도구적으로 써먹는 게 아니라...

parioli 2006-10-14 00:12   좋아요 0 | URL
1. 너무 단순한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높이 올라간 사람 중에 기회주의자가 아닌 예외적인 존재가 있을 뿐 아닌가요? 예전 교육부 장관이었던가요, 자기에겐 스승이 없(었)다 던가 하는 발언을 해서 도덕의 수호자들에게서 엄청 욕을 먹었던... 전 그 장관의 말에 백분 공감합니다. 제가 느끼기엔, 우리나라 최상층부-학계든 정계든 법조계든-는 한다리만 건너면 다 알만큼 수백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기에 둥글둥글 처신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봅니다. 좀만 더 심해지면 기회주의가 되는 거 아닐까요?
2.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적 존경/신뢰를 잃는 대가로 지불받는 것이 기회(주의)인 것이지요'라는 문장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3. 원로 인문학자들이 강조하는 그 사회적 존경/신뢰의 회복에 대해 누가 동의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인문학자답게 왜 사회적 존경/신뢰를 잃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죠. 해도 아주 두리뭉실하게 할 뿐.
4. 강준만은 그런 기회주의가 처절히 싫기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있고 서울 소재 대학으로 올라올 기회가 있어도 거절하는 거겠죠. 강준만 정도는 되어야 기회주의 공화국을 비판할 생각이 나는 거겠죠. 소위 인문학계의 원로들은 기회주의를 비판할 생각이 나기나 할까요. (다만, 제가 좀 무식한 지라 저분들에서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