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예향(예술가들의 고향)인지라 시인, 작가뿐 아니라 작곡가와 화가 들의 기념관도 여럿 들어서 있다(전체를 조감하게 해주는 통영 예술가 지도도 나옴직하다). 윤이상기념관이 대표적이다. 2010년에 문을 연 이곳은 규모감도 있고 건물도 품위와 예술성을 겸비했다. 숙소에서 멀지 않아서 아침에 첫 방문자로 들른 다음에 시인들의 기념관을 찾았다.

통영 출신의 대표적 시인으로 청마 유치환을 기념하는 청마문학관(청마의 생가도 언덕에 보존돼 있다. 통영항을 내려다보는 전망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청마문학관은 어른 기준 15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과 김춘수 문학관으로 불리는 김춘수 유품전시관을 차례로 들렀는데 윤이상기념관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지라 실제 문학기행에서라면 동선을 미리 계산해야 할 것 같다.

두 시인의 문학관 내지 자료관을 둘러보며 오래전에 한국현대시를 두루 읽던 때가 떠올랐다. 같은 통영출신으로 해방 직후 통영예술가 모임에서 같이 활동한 이력이 있지만(윤이상기념관에서 읽은 윤이상의 편지에 따르면 이들은 같은 ‘아-파‘에 속했다. ‘현실파‘ 예술가들의 소위 순수예술을 들먹이는 이들을 비아냥거리며 감탄사(아~)만 남발한다고 붙여준 별칭이 ‘아-파‘다) 작품세계는 사뭇 다르다.

청마가 남성적 지사풍의 시인이라면 김춘수(호는 ‘대여‘이지만 그렇게는 잘 불리지 않는다) 여성적이고 기교적이다. 그렇게 다른 경향의 두 시인이 모두 통영을 고향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통영 자체의 이중성을 말해준다. 통영은 남성적인 도시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인 도시인 것. 박경리문학에는 이 두 가지가 결합돼 있다고 나는 본다.

박경리문학에서 정신주의적 요소, 남성적 요소의 기원에 대해 궁금했는데 오늘 박경리기념관과 세병관을 차례로 둘러보고서 뭔가 비밀을 알게 된 듯했다. 박경리기념관은 어제 통영에서 박경리문학관을 보고 온 탓인지 놀랍거나 새롭지 않았다(통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 대한 설명이 하동에 없는 요소인데 가령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은 게 눈에 띄었다). 다만 선생의 묘소가 있는 박경리 추모공원과 붙어 있어서 문학 순례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장소.

영상자료도 잠시 감상하다가 선생이 세병관에 얽힌 기억을 회고하는 장면을 보고 ‘이거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곧장 세병관을 찾아갔는데(박경리기념관에서는 40분 정도의 거리. 차를 이용하면 15분쯤 걸릴 듯싶다), 세병관은 국보로 지정된 목조건축물로 경복궁 경회루와 비슷한 외관을 하고 있다. 충무공의 전공을 기념하여 1603년(선조 36년)에 세워졌고, 건축 이후엔 ‘삼도수군통제사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니까 요즘으로 치면 해군사령부에 해당한다. 그런 용도에 맞는 당당한 위풍과 기품을 자랑했다. 방문객에게는 넓은 그늘이자 휴식처를 제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언젯적인지(어린시절?) 박경리 선생은 이 세병관을 보고서 감탄스러워 눈물까지 흘렸다 한다. 선생의 문학에 등장하는 강인한 여성상과 정신주의의 기원이 이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번 답사의 ‘발견‘은 바로 세병관이다.

세병관 근처에는 중앙활어시장이 있어서 식사도 자연스레 해결하도록 해준다. 활어시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싱싱하고 큼직한 각종 생선이 즐비했다. 나도 통영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물회로(먹어본 물회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아직 속초의 물회를 먹어보지 못했지만).

점심을 먹고 터미널로 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세병관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충렬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선생의 생가터이다. 묘소와 생가터를 모두 방문하고 나니 선생의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문학기행‘의 목적은 그렇게 달성되었다.

이번 여행이 리허설었던 만큼 내년 언제쯤 실제 문학기행 때 다시 찾으리라 마음 먹으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귀가하는 대로 조만간 통영을 배경으로 한 홍상수의 영화 ‘하하하‘를 다시 볼 참이다).

잠시 눈을 붙였다 정신을 차리고서 적어내려가던 여행기를 마무리짓는다. 이제 다시금 일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번주에 강의할 책들을 읽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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