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며칠전 기사를 읽었다. '나의 학문적 우상은 무엇이었나'란 기획기사인데, 내용이 흥미로워서 옮겨놓는다. 더불어, 잠시 '나의 학문적 우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최장순 기자의 기획의 변은 이렇다: "偶像. 보통,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우리는 우상이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초년병 시절 우상을 만들어내고, 그 우상을 좇아 자기와 동일화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 우리시대의 학자들은 어떤 우상화의 과정을 겪어왔을까. 그리고 학문적 우상은 어떻게 학자의 내면을 장악했다가 결국 쓸쓸히 떠나고 마는 것일까. 그 내밀한 풍경을 살펴보았다." 당신들의 우상은 안녕하신가?..

교수신문(06. 09. 23) 기획취재_나의 학문적 偶像은 무엇이었나

“나는 그 분의 지대한 영향을 입은 사람이다. 1980년대 초반엔 내 논문을 지도해주시기도 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영국사)가 에릭 홉스봄을 떠올리며 남긴 말이다. 박 교수의 회상은 이어진다. “그 분의 영향을 받아 노동사 공부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걸 느끼게 한 유일한 분이었다. 나에게 우상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홉스봄에 대한 박 교수의 마음이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홉스봄에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정치지형의 변화 속에서 홉스봄의 문제점을 조금씩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가 홉스봄과 거리를 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2003년 발간된 ‘Interesting Times: A Twentieth-Century Life’였다. 이 책에서 홉스봄은 젊은 시절의 행동에 대한 자기변명을 일삼으며 총체적 시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박 교수는 “가령 스탈린이 행한 악행을 두둔하려는 홉스봄의 태도는 못참겠다”며 “80세 넘게 살았으면 자기 삶과 20세기를 연관지어 당시 현장에 좀 더 거리를 두고 써도 될 것을… 그런 걸 발견하지 못해 많이 실망했다”고 전했다(*박정희를 두둔하려는 태도와는 어떻게 연관되는지?). 홉스봄에 대한 진한 애정에서 나오는 진심어린 충고다. 조승래 청주대 교수는 “동구권이 몰락하는 등 세계의 정치적 판도가 변화하자 영국 좌파 연구자들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많이 사라져갔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역시 토마스 쿤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았다. 쿤의 두 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홍 교수는 자연스럽게 토마스 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쿤의 방법론은 “텍스트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만 과학의 내용을 넘어 사회 문화적인 측면을 보는 데 한계가 있”어 현재 홍 교수는 “쿤의 방법론을 버리고 있는 중”이다.

특정 지식인에 대한 학문적 우상화는 학자라면 누구나 거치는 관문이다. 이와 관련해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에는 학문적 우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학위를 받고 나서 지식인으로 바로 서야 할 때는 곤란하다”라고 말했다(*학위논문을 쓰면 자립/분가해야 하는 것인가). 우상을 냉철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실행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특정 대가들을 뛰어넘는 걸출한 학자가 드문 게 사실. 누군가를 넘어서려면 ‘부단한 노력’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다른 대상들을 향해 미끄러지는 작업을 동반한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서양사)는 90년대 폴란드 문제와 시름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스탈린을 좇다가 문제가 생기면 레닌으로 돌아가고, 그게 또 문제면 볼셰비키로, 그리고 다시 청년 맑스로 돌아가면 된다는 게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전했다. “우상이란 결국 신화화 작업을 동반하므로, 다채로운 프리즘을 갖고 대상에 접근해야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적 우상에 대한 모방은 필수적인 과정인데, 그것이 자기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 권위에 기댄 기계적 모방이 되면 교조주의나 근본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너무 당연한 말씀들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적 탐구 대상을 우상화하는 일. 그 내부에 어떤 심적 기제가 작동하는 것일까. 이창재 프로이드정신분석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정신을 안정시키며 동시에 확장시켜주는 이상적 대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소장은 “특히 연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엔 연구 욕구를 유지시켜주기에 일정한 지식활동의 모델이 긍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정 인물 및 그 연구작업과의 동일시를 통해 연구활동을 지속할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는 특정 인물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과도하게 진행되더라도, 처음에는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동일시가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다 보면 발전이 정체”되기에 “주체적으로 새로운 대상을 선택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이 소장은 학자 일반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학계에 남는 사람들의 경우 학문의 목적이 자기 고양이나, 개발, 개성 실현에 있는 게 아니라, 대상 결핍 때문에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에게 평생 보호자가 될 사람이 필요하기에 ‘정신의 아버지상’이 있는 학계에 남게 된다는 설명인데 흥미로운 주장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손종업 선문대 교수(국문학)는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탕진하고 싶은데 그 대상의 거짓 내지는 오류를 발견했음에도, 그에 대한 열정을 철회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전했다.

가령, ‘황우석’을 믿었던 사람들은 ‘황우석’의 일정한 문제점이 발견되었기에, 그에 대한 열정을 접어야 하는데, 오히려 합리화하기 위해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게 학자들의 케이스인가?). 그런데 손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요즘 젊은 학자들이 점점 더 현실주의화해가고 있다”며 “더이상 그럴 듯한 것도 없고 모든 존재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냉소적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오히려 적절한 우상을 갖는 일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진정한 우상이 없는 시대”라는 것(*내가 동의하는 바이다. 학문에서 자신의 우상을 절대화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우상을 갖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은 학문적 우상에 관한 취재를 한다고 하자 “특정 학자나 학문에 대한 단순한 개인적 열정 보다 패거리 안에서 확대, 재생산, 조직화되는 열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최장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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