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페이퍼'에 이런 거창한 제목이 달릴 리는 만무하다. 조간신문에 게재될 김우창 교수의 칼럼을 미리 읽어보려고 했을 뿐이다. 요 며칠 자주 다루었던 시사적인 주제여서 따로 옮겨놓기도 하면서. 주로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에 기대어 인문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재차 강조하는 칼럼으로 읽힌다. 내가 안 갖고 있는 책을 포함하여 몇 권의 책을 나열해본다. 내키면 <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이제이북스, 2003) 정도는 바로 읽고 생각할 거리를 마련해도 좋을 듯싶다. "여보세요? 저, 인문학도인데요. 예? 안 들린다고요?"

 

 

 

 

경향신문(06. 09. 28) 공적공간의 윤리성과 인문교육

하버마스의 글에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호 이해에 이를 수 있는가, 또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이 선행돼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이 있다. (“보편적 실천 어용론(語用論)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대화의 기본 조건 가운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로 네 가지, 즉 해독가능성, 진실, 진실성, 정합성이다(*'어용론'은 pragmatics의 번역이겠다. 일반적으론 '화용론'이라고 옮긴다).

첫번째 조건으로 거론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써야 한다는 조건은 자명한 것이라고 할 것이나, 이것이 문법이나, 논리나, 상황의 적절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자명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두번째의 조건은, 말이, 일단은 진실 또는 진리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실을 담은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은, 말이 진지한 또는 성실한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대화자들이 보편적인 타당성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써 자신들의 말의 옳고 그름을 헤아려 볼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의미는 그의 전체적인 관심의 틀 안에서만 바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문제에 대한 이성적 해결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철학자다. 다만 그에게, 이성은 사람이 사는 소란하고 번거로운 세계를 넘어 초월적 공간이나 역사의 큰 움직임 안에 존재하는 높은 원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접하고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타협하고 하는 사회공간 안에서 태어나는 원리이다. 그러면서도 이 원리는 잡다한 경험적 현상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형식적 정형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이성적 원리는 경험적 현상 속에 존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초연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화의 네 가지 조건은, 현실 상황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대화에도, 문법이나 의미를 떠나서, 그 아래에 일관된 어떤 바탕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위의 조건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대화의 진행에는 말의 내용에 관계없이 어떤 실제적인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관찰이다. 그것은 세번째의 진실성 또는 성실성이라는 조건에 가장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것은 대화에 임함에 있어서 대화자는 화제의 대상 또는 자신이나 대화의 상대자에 대하여 일정한 도덕적·윤리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에도 그에 비슷한 윤리적 태도가 들어 있다. 사람이 자기 주장을 내놓는 것은, 이 주장과 함께, 진리를 존중하며, 그 기준에 의한 여러 주장들의 평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내놓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같은 글의 뒤편에서 다시 설명하듯이, 전제의 하나는 누구의 것이든지 논증된 주장에는 승복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말도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그 주장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증명되면, 그것이 실천적으로 함의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약속이다. 건설적 대화가 성립하려면, 대화자들은 그들의 상호연계성을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합리적 또는 이성적 바탕 위에 서야 한다는 것에 승복해야 한다. 즉 대화에는, 간단히 말하여, 실제적 전제로서, 공동체적 상호인정 그리고 공동체의 기반으로서의 이성적 원칙의 수락-이것이 선행돼야 한다.

대화의 선행조건에 대한 하버마스의 말은, 그 이론 전개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하고 큰 현실적 의미가 없는 말로 들린다. 문제는 대화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성립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적 균열이 심한 사회는 대체로 그러하다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러한 공론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있다. 공동체적 상호존중이나 진리에의 순응의 태도를 전제하는 공론의 공간이 사라지고 공동의 진리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공적인 광장에서 발언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은 고려할 것도 없이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태도이다. 문학논의의 지침으로서 레닌이 내세운 것에 당파성(黨派性)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요즘의 발언과 논쟁들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이, 이 원칙을 지상으로 받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판국에 하버마스가 말하는 진리성과 윤리성의 조건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진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생각들의 물질적·사회적 기초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나온 철학자이다.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요인들을 모르고 그가 대화의 조건에 대하여 논의를 펼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적 상황의 어려움에 대한 의식이 그로 하여금 바로 경험의 혼란 속에서 생겨나는 이성을 중시하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가 진리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입장들의 역사적 파국을 직시한 까닭에 위에 말한 원칙들을 천명하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러한 공동체의 원칙을 살려 나가는 것이 좋은 사회를 위한 중요한 실천적 작업의 일부로 생각된 것이다.



어떻게 하여 진리와 공동체적 상호존중에 입각한 대화적 상황이 조성될 수 있는가? 여기에 간단한 답이 있을 수가 없다. 삶의 교사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웃들이 행하는 바를 모범으로 하여 우리 스스로의 행동 방안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보면, 대화적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는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길들이 트이는 것이 또한 인간사이다.

최근에 여러 곳에서 인문과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는 것을 본다. 인문과학은, 인식과 윤리에 있어서의 보편적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몸의 습관으로 지니게 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학문이다. 물론 모든 학문적 수련에는 이러한 원리에 대한 수련이 따른다. 그러나 그중에도 끊임없는 상상적 연습을 통하여 실천적 현실에서 비판적 그리고 자기비판적 이성을 끌어내려는 훈련이 인문과학의 방법론적 기본을 이룬다. 이 점에서 인문과학은 다음 세대의 공동체적 대화자를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경직된 교리 학습이 인문과학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문과학 옹호론이 많이 나와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보탬이 되지는 아니할는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실제적 조처에 대한 궁리이다. 한 가지만 말한다면, 모든 인문과학의 제도적 바탕은 인문과학을 포함한 기초 과학의 교육을 대학 교육의 핵심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오늘의 산업 사회의 필요에 맞는 기능 교육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대학원이나 직장의 직업 훈련에 미루고 대학은 기초과학의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뒤따를 기능 교육에도 좋은 준비가 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맞추는 학제, 재정, 연구 조직의 적응도 물론 별도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 구조 자체가 진리 공동체로서의 이념을 수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경제 성장 또는 그 과실의 분배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아니다. 하버마스의 대화적 이성철학은 이 사실에 대한 역사적 반성의 일부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6.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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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1 23:21   좋아요 0 | URL
**님/ 몇년전에 방한했었지요. 저는 '얼굴'보다 '목소리'가 신기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