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을 비판하는 마리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동녘사이언스, 2017)를 '이주의 과학서'로 고른다. 과학서가 아니라 과학비판서란 점이 눈에 띄는데, 저자가 타겟으로 삼고 있는 것이 진화심리학이다. 원제인 '과학적 성차별 시대'에서 '과학'이 지칭하는 게 바로 진화심리학.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남녀에 관한 유해한 이분법을 비판한 책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꽤 진보했다고 여겨지는 이 시대에 철저하게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그 믿음을 일반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공유하고 설득하려고 애쓴다. 여태껏 우리는 남녀에 관한 유해한 이분법을 해체하는 데 수십 년을 바쳐왔음에도, 진화심리학자들은 터무니없고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근거와 논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성차이에 대한 결정은 그 자체가 이미 이념적이다. 지식 생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세운 가설이 그 주제를 어떤 틀로 바라보고 자신의 연구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조건화됨을 잘 알 수 있다."
요지는 진화심리학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유해한) 이분법을 마치 과학인 양 주장하면서 널리 전파하고 있다는 것. 반면에 저자는 그러한 이분법 내지 성차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한갓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추천사를 쓴 정희진 씨는 저자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적었다.
"과학자든 정치가든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언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도 이런 상식이 필요한 학자들이 떼 지어 있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진화심리학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가장 사회적인 구성물을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자연의 법칙은 없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간주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언제나 무엇을 자연이라고 보는가, 자연의 범주는 누가 정하는가이다. 그것이 권력이고 지식이다."
'이 세상에 어디에도 자연의 법칙은 없다'는 주장은 의도적인 과장법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쩌면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그의 말대로 모든 건 '사고방식'이고 '태도'일 따름이니 '자연의 법치은 없다'는 주장도 사실의 언명이 아니라 주관적 믿음의 표명이겠다).
저자 마리 루티는 앞서 <하버드 사랑학 수업>(웅진지식하우스, 2012)를 통해서 소개된 바 있다. '하버드'란 말이 붙긴 했어도(하버드에서 강의한 경력이 있지만 현재는 캐나다 토론토대학 영문학과에 재직중이다) 좀 식상한 주제여서(비록 저자의 의도 역시 식상한 사랑론을 비판하려는 것이지만) 구입만 하고 읽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검색하다 보니 저자가 정신분석과 영화이론, 페미니즘 분야에서 흥미를 끄는 타이틀들을 갖고 있어서다. 이런 책들에 비하면 <하버드 사랑학 수업>이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는 대중서에 해당하겠다. <불편합니다>를 읽어보고 여력이 생기면 저자의 전문서들도 읽어보려 한다...
17. 03. 18.
P.S. 저자의 비판을 따라가려면 진화심리학에 대한 배경지식도 좀 필요할 텐데, 국내엔 데이비드 버스와 (그의 한국인 제자인) 전중환 교수의 책들이 나와 있다. 저자가 특별히 유감스러워 하는 진화심리학자가 따로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