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작고한 극작가 차범석(1924-2006) 선생의 이름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데,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남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이 대표작 <산불>을 뮤지컬 버전으로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게 됐다는 것. 뮤지컬 버전 <댄싱 섀도우>는 물론 배경이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원작자 '차범석'의 이름을 언제나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게 될 것이니 사후의 불멸 또한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는 걸 입증해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번에 내한한(그는 자주 오는 듯하다) 도르프만의 인터뷰 기사와 <댄싱 섀도우>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교과서에 일부 실렸던 <산불> 외에는 별로 읽은 작품이 없지만, 이 참에 자신에게 '깐깐했던' 한 원로 극작가의 명복을 빈다.

한국일보(06. 07. 05) 세계적 극작가 도르프만, 차범석 작품 뮤지컬로

-“한국전쟁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지만 세계 어디서나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으면 좋겠어요.”

-지난달 타계한 극작가 차범석 선생의 <산불>을 뮤지컬로 각색한 세계적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64)이 한국을 방문했다. 내년 7월 무대에 오르는 창작 뮤지컬 ‘댄싱 섀도우’제작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10년 만에 방한한 그는 “한국은 라틴 아메리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민주화 과정을 겪어 언제나 깊은 형제애를 느낀다”며 “‘미스터 차’가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훌륭하고 감동적”이라고 방한 소감을 밝혔다.

 

 



 

-카를로 푸엔테스, 이사벨 아옌데 등과 함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 문학의 중심부에 정립시킨 그는 1942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10년 후 가족과 함께 칠레로 돌아갔지만 아옌데의 민주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피노체트 군부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10년 넘는 망명생활 끝에 1985년 미국 듀크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소설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와 <죽음과 소녀> 등의 희곡으로 이미 현대문학사에 깊은 날인을 새긴 그이지만(*<죽음과 소녀>는 국내에서도 공연된 것으로 안다), 뮤지컬 각본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 큰 도전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집에서 어딜 나갈 때도 늘 다른 길로만 다니거든요.” 뉴욕에서 자란 꼬마시절부터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뮤지컬을 보며 자랐고, 항상 뮤지컬을 사랑했다는 그는 “뮤지컬은 음악과 가사, 춤, 배우들이 다 같이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에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희곡이 두 시간짜리 대화라면 뮤지컬은 1시간 40분간 노래하고 춤추고, 나머지 2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동안 짧은 대사 안에 모든 걸 표현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에둘러 말하는 화법의 소유자지만, 이젠 뮤지컬 스타일에 맞춰 직설적으로 말하는 버릇을 들여야 해요. 그 점이 가장 어렵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뮤지컬이 좋습니다.”

 

 

 

 

-도르프만과 <산불>의 만남은 그가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2003년에 이뤄졌다. “한국에서 보내온 ‘산불’의 희곡을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더구나 한국 작품이라니…, 꼭 해보고 싶었죠. ‘몇 가지만 바꾸면 딱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원작자가 마음에 걸렸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차 선생님이 ‘노 프로블럼’(No Problem)이라며 흔쾌히 승낙해줬어요. <산불>이 뮤지컬로 만들어지는 걸 보는 게 그분 소원이었는데, 여기 안 계셔서 너무 안타깝습니다.”(*아래 사진은 공연 워크샵에 함께 한 차범석, 도르프만, 그리고 울프슨.)



-그렇게 해서 차범석의 <산불>은 마술적 요소가 강한 러브스토리 <댄싱 섀도우>로 재탄생하게 됐다. 음악을 맡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에릭 울프슨과도 두 시간 만에 작품 이야기를 마칠 정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도르프만은 소백산맥의 과부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삼각 사랑과 이념 대립을 동화(fairy tale) 스타일로 바꾸기 위해 중세 아랍과 발칸 반도에서 지명과 인명 등을 차용했다.

-“원작은 철저한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는 작품이죠. 하지만 리얼리즘 뮤지컬이란 건 없어요. 뮤지컬의 특성상 리얼리즘을 탈색시킬 필요가 있었죠. 동화로 바꾼 건 세계 시장에 내놓았을 때 전세계 어디서나 공감을 얻기 위해서예요. 그런 점에서 <댄싱 섀도우>는 한국적인 작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댄싱 섀도우>를 원작과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내가 왜 필요하겠습니까.”(웃음)

한겨레(06. 07. 05) ‘한국산 다국적표 창작뮤지컬’ 나온다: ‘댄싱 새도우’ 제작 발표

-“칠레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 국적을 갖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제가 각색을 하고, 스코틀랜드의 작곡가와 영국의 연출가가 한국의 원작으로 공연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3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신시뮤지컬컴퍼니와 예술의전당 공동제작 대형 창작뮤지컬 <댄싱 섀도우>의 제작 발표회에서 세계적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64)은 이 작품 탄생 과정 자체가 ‘글로벌’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고국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거울처럼 비쳐진다”며 “전쟁과 독재의 압박을 겪은 한국에서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전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존재하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출신으로 뮤지컬 <갬블러>를 작곡한 에릭 울프슨(61)과 박명성(43) 신시뮤지컬컴퍼니 사장이 만난 것은 지난 1999년 5월. 세계 일류 스태프를 동원해 세계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신시의 장기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이어 아리엘 도르프만이 차범석의 희곡 <산불>을 대본으로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고, 뮤지컬 <맘마미아!>의 연출가 폴 게링턴(37)과 안무가 니콜라 트리헨느(50) 등이 합류했다. 주요 스태프들 모두 영국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군이다. ‘뮤지컬 본고장의 인력을 고용해 뮤지컬 본고장에 진출하겠다’는 역발상의 산물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의 매출액은 한해 1000억원을 웃돈다.(인터파크, 티켓링크 2005년 집계). 외국에 로열티를 지급하고 의상부터 무대세트까지 고스란히 수입하는 ‘라이선스 공연’이 그 중 90%를 차지한다. 신시는 바로 이 수입공연으로 한국 뮤지컬 시장을 키워온 장본인이다. 국내 최장기 공연이었던 <아이다>, 40~50대를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맘마미아> 등이 모두 라이선스 공연이다.

-시장을 개척한 공은 인정받았지만 ‘뮤지컬 오퍼상’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48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투자해 세계 4대 뮤지컬 수준의 명품을 만들어보이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박명성 대표. 그는 “그동안 비싼 수업료를 내고 선진 뮤지컬의 노하우를 배웠다”며 “이번 공연을 통해 우리 스태프들의 수준도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댄싱 섀도우>는 내년 7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두달 동안 무대에 오른다. 현재 대본과 작곡은 거의 끝났으며, 세부 수정 작업만 남아있다. ‘번개 공연’이 범람하는 우리 공연계에서, 공연 1년 전에 출연진을 확정하고 제작발표 및 시연회를 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급하게 마음먹었으면 올해라도 당장 공연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작 관행도 선진적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극장을 대관하고, 그 날짜에 맞춰 허겁지겁 준비하느라 프리뷰만도 못한 수준의 공연을 돈 받고 팔고 있는 게 우리 현실 아닙니까?”(박명성)

06.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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