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의 감동을 기리며'는 작가 성석제(1960- )의 <소풍>(창비사, 2006)에 '책머리에'라고 붙어 있는 서문이다(그러니까 이 또한 곁다리텍스트이다). 요일로 치자면 '소풍'에 해당하는 일요일 아침에 우연히 들춰보게 됐는데, 그것만으로도 거의 '브랜드화' 된 성석제를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이 경우엔 '맛볼 수 있었다'라고 적어야겠다. 한국 작가들의 책을 읽는 데 다소 소홀한 내가 그의 산문집으로 마지막에 읽었던 건 아마도 <쏘가리>(가서원, 1998)이었던 듯한데, 뒤져보면 쏘가리 매운탕에 관한 글도 산문집 어딘가에서 얼큰한 맛을 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대체로 음식에 관한 이 책은 '구수한 사람' 성석제의 '맛깔진 세상이야기'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거기에 덧붙은 서문은 아마도 '입가심' 같은 글이겠다. 그걸 맨처음 읽을 독자들에게는 '입맛다심'일테고. 그걸 약간만 따라가보겠다. 그러고픈 생각이 든 것은 이 서문이 작가의 문학관을 응축해 놓고 있어서이다.

"이 책에 든 글들은 대체로 음식에 관한 것이지만 음식만 이야기하려 한 것은 아니다. 음식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람과 세상에 관해 썼다. 소풍 가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食) 샘물을 마시는(飮)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낌(感)이 움직이는(動)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그러니까 이 글의 취지는 '식음감동'의 공유이겠다). 숙제를 해치우듯 먹어본 음식은 맛을 느낄 수 없었고 그렇게 해서는 음식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먹는 것이 소풍이라면 음식이야기 역시 소풍이며,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6쪽,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음식은 책에서 (수사법으로 치자면) 일종의 제유로 쓰였다. 사람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 '전체'를 대신하는 한 '부분'이란 뜻이다. 더불어 그가 제안하는 건 '음식을 먹는 것'과 '음식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 소풍이라는 은유이다. 그걸 더 확장시켜서 그는 '무릇 이야기란 우리 삶의 소풍과 같다'라는 직유까지 동원한다. "거기에 소풍 가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라는 문장은 환유적 연상에 기초하고 있다.

요컨대, 이 한 문단에 시의 주요 수사법이라 할 은유, 환유, 직유, 제유가 총동원되고 있는 것. 그들이 마치 동원예비군에 소집된 예비군 아저씨들처럼 모여서 작당하고 늘어놓는 음식이야기가 바로 <소풍>이라 해도 억지는 아니겠다. 그리고, 그들이 주거니받거니 하는 잡담 속에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우리 삶은 소풍이다'라는 것(동원훈련을 소풍 가는 기분으로 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 그럼 소풍이란 무엇인가? "먹고살기에 급급한 때가 있었다. 살기 위해 먹는 처지에 좋은 것과 나쁜 것,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가릴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서 맛을 본다는 건 바로 소풍 같은 것이다."(5-6쪽)

즉, 소풍이란 먹기에 좋은 것과 나쁜 것,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가릴 만한 형편이나 처지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필요, 곧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의 종말' 이후가 되겠다. 작가의 제안대로, '소풍'을 '문학'으로 환치하면 어떻게 되는가? "요즘 우리는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소재를 찾아서 즐감할 만한 물건을 만들어놓는 것이 문학이다." 

미식가란 일종의 쾌락주의자이며,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서 기꺼이 얼마간의 수고를 감내하는 작가의 모습은 '구수한 쾌락주의자'의 그것이다. 이때 구수한 것은 그의 입담이지만, 그 입담은 필요를 벗어난/넘어선 곳에서 장기를 발휘하는지라 시류와 역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종횡이다. 나는 거기에 성석제 문학의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류와 역사야 말로 근대소설의 '본류'라는 의미에서 성석제의 '이야기'들은 소설과 무관하거나 소설의 무늬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작가 김훈이 무늬만 소설인 에세이들을 쓰듯이 시인으로서 먼저 등단했던 성석제는 무늬만 소설인 시를 여전히 쓰고 있는 것 아닐까? 이쯤에서 보다 '본격적인' 그의 문학론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한국일보의 인물탐구란에 연재됐던 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이다. 옮겨놓고 나니까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 글인데, 특이하게도 작가는 호랑이 발자국과 대면했던 체험담을 자기 문학의 '기원'에 놓고 있다(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내가 본 ‘호랑이 발자국’ 믿게 하려고 쓴다. 어느날 나는 호랑이 발자국을 보았다. 엉덩이를 돌려대고 발자국을 찍는 호랑이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 발자국은 호랑이가 남긴 것이었다. 스무 살의 싱싱한 직감과 생생한 정황에 의한 명백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 뒤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호랑이, 또는 호랑이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나마저도 남한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는 둥 호랑이가 왜 발자국 하나만 남기고 주변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겠느냐는 둥 호랑이의 세력권이 천리인데 왜 천리 사방에 그런 이야기가 없느냐는 둥 해가며 그때의 그 발자국을 부정하는 대열에 합류하려고 했다. 이처럼 나는 내가 보고 겪은 것, 만난 사람과 그때의 느낌을 남은 물론이고 스스로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기게 하기 위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더 범위를 넓혀 말하자면 누구나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호랑이, 혹은 호랑이의 발자국 같은 ‘그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성석제의 문학이 알레고리적 성격을 많이 띠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일반화'의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호랑이 발자국은 내 고향인 경상북도 상주군 공성면 하고도 어느 산자락에 나 있었다. 1980년에서 81년 사이의 겨울이었는데 대략 81년 1월초였다. 12월 중순에 그 곳으로 들어간 건 알지만 산중에는 달력이 없어 날짜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겨울에는 스님들이 큰 절로 가는 바람에 비는 자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그에 딸린 요사채가 내 거처였다.

-요사채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출입문을 닫으면 방안은 그대로 캄캄절벽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불을 밝히려면 초를 켜야 했다. 그래서 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면 어느 때는 눈에 반사된 겨울 햇빛이 눈에 시려서, 어느 때는 정말 눈이 시리도록 맑은 겨울밤의 별빛에 신음 소리를 내곤 했다. 그때는 사물과 사물의 경계선이 조리개를 한껏 조이고 찍은 사진처럼 선예도(線銳度)가 높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을 뜨러 양동이를 들고 요사채에서 백 걸음쯤 떨어진 계곡으로 향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가는 길이라 아무 생각 없이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 가운데 무슨 발자국이 하나, 그 길이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는 낙인처럼, 아니 낙관이라 해도 좋고 문장(紋章)이라 해도 상관없다,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 발자국을 보는 순간 나는 머리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는데 그건 내 머리털이 곤두서는 소리였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에 직면한 연약한 한 인간이 느낄 그런 공포, 양동이 하나로 온몸이 무기인 희대의 살인마를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한 개인이 느낄 법한 전율이 그럴까(*그러니까 이 작가에게 트라우마적 역할을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이다. 아마도 '운명'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석제 스타일의 최대치는 <노인과 바다> 류가 아닐까?).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내 발을 그 위대한 발자국 위에 얹어 보았다. 길 위에 단 하나밖에 찍혀 있지 않은 그 발자국은 눈이 녹았다 얼었다 하면서 원래의 크기보다 훨씬 커졌을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컸다. 농구화를 신은 내 발이 쑥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달려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께가 십 센티미터쯤 되는 굵은 나무로 테를 두른 육중한 방문, 도대체 절간의 요사채에 왜 그런 성문 같은 방문이 필요한지 알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방문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눈이 내렸다. 겁이 나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물이 필요하면 방문을 살짝 열고 팔을 내밀어 코펠로 눈을 긁어 담아 녹여서 썼다. 다행히 요사채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따로 있어서 황송하게도 부엌을 화장실 대용으로 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살다가 행복하게 늙어죽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사흘이 한계였다.

-나흘째 되는 날, 나는 가지고 온 옷을 몽땅 꺼내 입고 요사채 벽에 걸려 있던 암자 소유의 털옷까지 겹쳐 입었다. 싸구려 화학섬유로 만든 그 털옷은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두고 갔는지 온통 기운 자국이었고 한 번도 빤 적이 없는 듯 소 덕석 같은 냄새가 났다. 털옷까지 껴입은 건 날이 추워서가 아니었다. 호랑이가 혹시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 때 고생 좀 하라고, 호두처럼 알맹이를 꺼내 먹기가 쉽지 않도록 하려고 껴입은 것이었다. 부엌에는 불을 땔 때 장작을 다듬기 위해 들여놓은 손도끼가 있었다. 또 전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해우소를 치울 때나 쓸 법한 장화를 마루 밑에서 찾아 신고 한 손에 손도끼를, 한 손에는 기특하게도 양동이를 들고 나는 호랑이 아가리 또는 발자취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의미를 모르는 이상한 고함을 내지르며.

-공포의 그 발자국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워낙 단단히 얼어붙어 내린 눈이 쌓이지를 못하고 바람에 쓸려간 듯 했다. 나는 여전히 입속말로 ‘이이이이’ 하는 소리를 내며 그 발자국 속에 장화 신은 발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크기가 비슷했다. 무섭지 않았다. 사흘동안 그 발자국을 화두로 면벽수도를 한 뒤라 그런지 실물을 보니 반갑기까지 했다. 겨울산 오후의 잔양 속 어디고 호랑이, 혹은 호랑이 같은 존재의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계곡으로 가서 물을 떴다. 방으로 돌아와 사흘 만에 밥을 지어 먹었다.

-배가 부르고 정신이 돌아오자 내가 본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성석제 이야기의 기원이다!). 산중의 유일한 이웃인 고개너머 채석장에 갔더니 사람들은 일 나가고 없었고 밥 해주는 아주머니는 자고 있었다. 내친 김에 마을까지 내려갔다. 마을회관의 새마을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저녁이 되었고 동네 청년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청년들이 건네주는 고구마를 낫으로 깎아먹다가 손가락을 깊이 베었다. 피를 막고 붕대를 감고 소독을 하는 의미에서 한 잔 더 마시고 취해서 구석에 오그리고 자느라 바빴다. 그래서 소설적인 가감 없이 순수한 호랑이, 또는 호랑이 발자국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관념이나 정신의 모험은 일생 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 진짜 도사는 못되었다. 자꾸 그 이야기를 떠들면서 허풍선이가 되는 데는 성공했다.’ 인용부호 속의 글은 ‘나는 왜 자꾸 집을 나가는가’라는 요지의 글의 일부분인데 글을 쓴 시기는 십여 년 전이다. 그때는 소설을 쓰지 않고 품고만 있었을 때다. 품고 있는지 몰랐을 때이기도 한데 그 겨울 그 호랑이 발자국을 본 때로부터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살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시가 제일의 의의였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일생 분의 모험, 진짜, 도사, 허풍선이 같은 단어들은 시적이지 않다. 이런 불순하고 수상쩍은 것들은 한 이틀 조용히 내린 눈처럼 순수한 세상에 조금만 섞여도 그 세상 자체를 불순하게 만든다. 돌아보니 그 때 이미 시에서도 삶에서도 불순은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혈기가 방장해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는 불온하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나는 소설은 불순하다고 말하고 싶다(*나는 그가 '불순한 시'를 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쓰는 소설은 불순하다고, 원래는 순수했는지 모르지만 웬 놈의 호랑이 발자국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가 물 뜨러 가는 길 위에 찍힌 이후, 모든 길이며 겨울 오후며 시며 소설이며 양동이며 부엌이며 요사채, 손도끼마저 불순해졌다고.

-90년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제 제 길을 찾았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말을 듣는 김에 더욱 잡스러워지려고, 이른바 크로스오버로 놀아보려고 노력했다. 잡(雜)은 잡대로 재미와 의의가 있다. 불순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잡은 외부의 조건이다. 또는 외부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성향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있다. 나는 잡스러운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잡의 세계에는 ‘세계 콤플렉스’ 따위는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하늘의 섭리인지 잡종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다(*<소풍>에서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해놓으면, 그는 갈 데까지 간 것 아닐까?). 가령 내가 아는 최고의 멧돼지 전문 사냥개는 투견과 수렵용 개의 혼혈인데 자신의 형질을 물려받은 새끼를 낳지 못하고 있다. 지금 명견으로 이름을 떨치고는 있지만 그 명성도 당대에서 그치고 말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또 어떤가, 당대를 넘어설 그 무엇이 불순한 운명에 있을까. 내가 멧돼지 사냥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더 사납고 더 예민하고 더 흉악스럽기를 바라겠다, 멧돼지에게만은.

-왜 소설을 쓰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한동안은 호랑이 덕분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는 건지, 호랑이 발자국에 가만히 발을 넣어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호랑이 발자국을 본 자신의 체험을 "누구나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호랑이, 혹은 호랑이의 발자국 같은 ‘그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일반화하지만, 그것이 그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고 특별한 체험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더불어 그 체험은 성격상 소설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다('호랑이를 찾아서'라는 다큐를 구성한다면 보다 소설에 근접하겠지만). 비록 <호랑이를 봤다>(작가정신, 1999/2002)를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이야기라는 틀거리를 빌어서 불순하게, 혹은 잡스럽게 늘어놓는 것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야기시에 가까울 듯하다. 

대범하게 말해서, 성석제의 이야기는 역사 이후, 탈역사 시대에 속하며(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건 시기적으로 사회주의 몰락 이후이다), 개인사적인 비유를 들자면 '현역소설'이 아닌 '예비군소설'의 범주에 든다(그런 점에서 그는 제대 후에도 '현역'임을 자임하는 이창동 류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의 거리두기, 그의 풍자, 그의 냉소, 그의 입담, 그의 연민 등 모두가 역사의 부록 시대를 살아가는, 병역의 여생을 살아가는 예비군소설에 잘 부합하는 것 아닌가? 

먹고살기에 급급하지 않은 '예비군 소설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뭘 맛본다는 것, 맛을 기억하며 소요(逍遙)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고 방심한 상태에 스스로를 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도 밥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소요와 소풍이 그의 나날일 듯하다. 지난 10여년간 그는 한국문학 골목에 소문난 '맛집' 하나를 냈으며(이젠 그에게 '낯선 길'을 물을 게 아니라 낯선 음식점을 물어야 한다), 그로써 그 나름으로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6쪽)이니까. 

하지만, 세상엔 여전히/아직도 배가 고픈 이들이 있는 법이며, 그들에겐 맛집보다 하루의 끼니가 더 소중할 법하다. 그리고 삶이 두루 막막할 법하다. <초록물고기>(1997)에서 이제 막 제대하고 돌아온 막동이처럼 말이다. 서로에 대해 품고 있던 원망을 터뜨리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이 막동이 가족의 '소풍' 풍경은 또 얼마나 잔인한 장면이었던가. 그러니까 예비역이라고 해서 다 같은 예비역은 아닌 것이다. 정리하자면, '초록물고기'와 '호랑이 발자국' 사이는 소설과 시(이야기) 사이이며, 역사와 탈역사 사이이고 삶과 여생 사이이다. 더불어 '니가 인생에 대해서 알아?'(문성근의 대사)와 '삶에 감사한다'(<소풍>, 7쪽) 사이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어디 계십니까, 선배님?"  

06. 07. 02.

P.S. <소풍>을 소개하는 기사 두 개를 덤으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5. 15) 소설가 성석제씨가 겉절이에 밥 비벼먹는 방법이다. “숟갈을 두 개씩 양손에 나눠들고 ‘썩썩’ 비빈다. 이 ‘썩썩’이 중요한 점이다. 황소가 풀을 먹을 때처럼,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 때처럼 힘있고 숙달된 자세, 힘의 낭비가 없되 힘있게, 숨이 죽는 동안 삼투압 작용으로 겉절이에서 나온 물이 비비는 일을 쉽게 한다.(…) 향긋한 맛. 이건 참기름의 공로다. 산뜻한 질감. 이건 배추의 공덕이다. 혀를 바쁘게 하는 양감. 이건 밥의 은혜다.(…) 대부분은 과식을 한다.”

-그의 신작 산문집 <소풍>(창비 발행)의 한 대목이다. 그가 먹은 음식의 맛, 함께 한 사람들의 맛, 어울렸던 세월의 맛을 한 데 ‘썩썩 비빈’ 책이다. “소풍을 가듯 시간의 한 부분을 툭 끊어서 길을 떠났다. 뭘 맛본다는 것, 맛을 기억하며 소요(逍遙)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고 방심한 상태에 스스로를 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도 밥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책 머리에’에서)

-위에서 인용한 군침 돋구는 겉절이 찬가 끝에 그는 1980년 휴교령으로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들과 모내기를 돕다 논두렁에서 먹었던 겉절이 비빔밥 - 그야말로 ‘입속에 가득차는 환희 - 의 기억을 슬쩍 버무려 둔다. 그런 식이다. 그는 “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먹고 이야기하는 것, 이 모두가 ‘음식’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다고 할 때 음식은 추억의 예술이며(…) 감각 총체 예술이다. 음식에 관한 기억과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필연코 한 개인의 본질적인 조건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숙제를 해치우듯’ 먹어서는 안 되며 ‘소요하듯’ 즐겨야 한다고, 그래서 ‘소풍’이라고 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소풍이라면 음식 이야기 역시 소풍이며,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

-너비아니 김밥 닭개장 부대찌개 등 끼니 음식(1부), 냉면 라면 등 국수류(2부), 김치 석화젓 등 곁다리 음식(3부), 국화차 소주 등 마실 거리(4부), 해서 그가 들려주는 음식 이야기는 50여 편이다. 미국 보스턴 월든 호숫가 소풍 길에 먹었던, 있는 대로 김과 밥과 김치로만 싼 소박한 ‘정신의 왕족 헨리 데이비드 소로 영감 김밥’의 맛, 이동갈비 2인분을 거의 혼자 다 먹어치우는 친구 이야기, 중국 베이징의 한 백화점 찻집에서 맛 본 국화차의 맛을 떠올리며 그는 “그 국화차는 어쩌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같은 공간의 같은 침묵, 같은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순간, 그 사람을 맛보았다는 느낌으로 행복하다. 슬프다.”

-지난 해 북한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의 고된 일정 중 삼지연공항에 들렀을 때, 땡볕을 피해 그늘진 돌 바닥에 퍼질러 앉아 현지에서 산 북한 음식 자료들을 펼쳐놓고 흡족해 하던 그가 떠오른다.(최윤필 기자)

 

 

 

 

경향신문(06. 05. 16)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힘> 등을 통해 우리 시대 사람 사는 이야기의 풍요로움을 되살린 소설가 성석제씨가 음식에 얽힌 추억을 담은 산문집 <소풍>(창비)을 펴냈다. 저자는 “음식이란 추억의 예술이자 오감이 총동원되는 총체예술이며 필연코 한 개인의 본질적인 조건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다”는 지론을 펴며 평범하지만 추억이 깃든 한식 위주의 음식들을 한 상 가득 차려낸다.

-소설가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결코 정갈하고 비싼 요리가 아니다. 1,000원짜리 김밥, 양은냄비에 담겨 나오는 부대찌개, 클럽 앞 손수레에서 팔던 순두부, 겨울밤 이웃끼리 나누던 제삿밥, 도랑물을 받아 짚단에 불을 지펴 끓여 먹은 라면…. 음식이란 단순히 혀를 즐겁게 하고 살을 찌우는 것을 넘어서 사람과 장소에 얽힌 추억 한자락이자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한다.

-너비아니부터 묵밥까지 한끼 식사로 적당한 음식이 1부에 담겼고 저자가 특히 좋아하는 냉면과 라면 같은 국수류가 2부에, 김치나 홍시·석화젓 등의 곁다리 음식과 국화차·소주 같은 마실거리에 관한 이야기는 3·4부에 나눠 실렸다. 식성대로, 글맛대로 골라 읽어도 무방하다. 책에 실린 글들은 사실에 기반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동안 써 온 음식 관련 이야기를 다 모은 겁니다. 직접 겪은 것, 전해 들은 이야기, 허구가 골고루 섞였어요. ‘불순한 비빔밥’인 셈이죠.(웃음) 원래 음식 이야기는 허구가 좀 있어야 재미있잖아요. 책의 3분의 1 정도만 실화입니다.”

-음식에 관한 책을 썼을 정도니 식성도 남다를 것 같은데…, 역시 그랬다. “평생 안 먹던 것을 한번 입에 대기 시작해 몇 개월씩 매일 먹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굴을 먹기 시작해서 이른 봄까지 굴만 먹었고요, 스물 아홉 살 가을에는 처음 병어를 먹기 시작해서 그 겨우내 병어만 먹었어요. 일종의 벽(癖)이 아닌가 해요. 아직도 정복해야 할 음식이 많습니다.”

-성씨는 향후 차, 커피, 술 등 “배 안 부르면서 비싼” 기호품에 대한 산문도 쓸 것이라고 했다.(이상주 기자)

(*)솔직히 작가의 마지막 멘트는 약간 우려되기도 한다. '성씨' 또한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으로 빠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이다. 그가 발을 담그고 있던 소설의 물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나를 확인시켜주는 일은 아닐까? 그렇다고 '배 안 부르면서 비싼' 글을 쓰겠다는 작가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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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4 1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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