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다리 텍스트에 관해 미뤄놓은 이야기들 중 하나를 해치우기로 한다. 점심을 먹은 포만감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이런 잡담을 늘어놓는 대신에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날은 약간 후덥지근하고 아파트 단지를 대낮에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좀 우스운 꼴이 아닐까 싶어서 나는 '좋은 걸' 포기한다. 그래도 이번 토픽은 괜찮군. 문학의 성감대라..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런 몽상을 바로 깨게 되어 미안하지만, 내가 읽은 건 <유종호 깊이 읽기>(민음사, 2006)에 실린 한 대담이다. 책은 이 원로 비평가에게 바쳐진 문집 형태인데, 편집을 맡은 비평가 정과리의 서문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게 상식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유종호 비평이야말로, 정보의 팽창과 역사의 붕괴 그리고 이론의 폭발이라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규정하는 힘인 존재에게 규정당하는 의식이 개입해 존재의 운동에 정지와 성찰과 교정을 촉박하는 역류의 힘으로 작용하는 희귀한 덕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이의 비평을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읽히게 하는 원천은 이 덕목에 있을 것이다."(8쪽)

비록 문법적으로 비문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유종호 비평의 가장 큰 덕목은 이런 '난삽한' 문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인용문은 유종호 비평의 미덕을 정확하게 반증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평이한 언어와 상식에 맞는 감각에 근거하여 깊이와 기품을 겸비한 작품 읽기와 해석을 제시해왔던 것. 책은 바로 그런 그의 면모를 동료/후배 비평가들과 문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집약해놓고 있다(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것은 평론가 유종호와 시인 신경림 사이의 깊은 사적인 인연이었다).

 

 

 

 

한데, 이 '깊이 읽기'에 대한 리뷰는 이 페이퍼의 목적이 아니다(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제목과 관련된 대목은 이런 것이다. 평론가 이남호와의 대담에서 민음사에서 1974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첫권으로 하여 간행하기 시작한 '오늘의 시인총서'에 관한 질문을 받자 유종호는 이렇게 응대한다. 

"그건 김현 씨가 발간 취지문을 쓰고 김현 씨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기획물이에요. 오늘의 시인총서 뒤 표지의 '기획의 변'을 내가 써다고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쓴 게 아니에요.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 그건 김현 씨의 아이디어에요."(20쪽)

이 '기획의 변'이 고 김현(1942-1990)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나로선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얘기지만,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라는 지적은 유종호다운 취향과 감식안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흥미를 끈다(그러니까 김현 비평과 유종호 비평의 차이는 이 '성감대'에 있다. 두 비평가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비평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상대적인 무관심에 따라 각기 다른, 정반대의 이론적 포지션에 배치된다. 시읽기에 관해서라면 각기 일가를 이룬 비평가들인지라 이러한 차이는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한 단어의 쓰임새만으로도 텍스트의 의미를 길어올리고 꿰어내는 것이 유종호 비평의 특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기획의 변' 혹은 '오늘의 시인총서를 내면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텍스트 바깥(뒷표지)에 박혀 있는 이 '곁다리텍스트'는 이런 내용으로 돼 있다(이 기획의 변은 김현의 나이 32살에 씌어진 것이겠다).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 시인의 직관은 논객의 논리를 뛰어넘어 어떤 것을 그 작품 속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의 시인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강조는 나의 것)

즉, 시는 '문학의 성감대'이며(포에티카는 에로티카이다. 그러니 시를 읽으면서 '찌릿찌릿'하지 않다면 당신은 불감증일 가능성이 높다), 한 개인의 창조물로서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한 여자/남자의 성감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여자/남자의 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가 걸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전제하에 기획자 김현이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한국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짱 도루묵이다. 이건 생각보다 파격적인 발상이고 발언이다(고전적 인문주의자로서 유종호라면 보다 겸손한 의의와 역할을 시에 할당했을 것이다).

그에 공감을 표하면서, 내가 새로이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시들이 씌어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꺼이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에 동참하고 있는가? 이건 철지난 질문인가?..

06. 06. 22.

P.S. '오늘의 시인총서' 1, 2권인 <거대한 뿌리>와 <처용>은 내가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 급조한 시들로 자작시집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으로 제일 먼저 산 시집들이다(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 게 아니라 시를 쓰고 시를 읽었다). 그날 두 권의 시집을 사들고 가는 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비평가 김현이 아닌 불문학 교수 김현을 나는 1989년 한 강의실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어 동사 활용형을 말하는 목소리이다(!)... 아래는 목포 자연사박물관 뒤뜰에 있는 김현 문학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