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출판문화'(612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연재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쓰는 것인데, 올 마지막 연재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다뤘다. 그래서 붙인 제목이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여정'이다. 소세키의 책은 최근에도 몇 권 추가되었는데, 네 편의 중편을 엮은 <긴 봄날의 소품>과 아내 나쓰메 교코의 회고록 <나쓰메 소세키, 추억>(현암사)이 소세키 소설전집의 '서플먼트'처럼 나왔고, 절친이었던 시키와 교환한 편지들도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지만지, 2016)으로 출간되었다. <긴 봄날의 소품>에는 '유리문 안에서'도 수록돼 있어서 역시 최근에 나온 민음사 쏜살문고의 <유리문 안에서>까지 포함해 졸지에 번역본이 3종이 되었다. 그렇게 '소세키 사후 100주년'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출판문화(16년 12월호)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여정


세계문학 독자에게 올해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서거 400주년으로서 의미가 있었지만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사후 100주년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의당 기념출판이나 행사가 기획됐음 직한데 사정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대신 국내로 시야를 한정하면, 지난 2013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 소설전집’(14, 현암사)이 완간된 것을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도련님><마음> 등 소세키의 주요 작품은 여러 차례 중복 출간되었고 여타 작품도 한두 종씩 번역본이 나와 있었지만 품위 있는 장정의 새 번역본 전집이 완간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소세키의 저작으론 장편소설 외에도 단편과 산문, 문학론 등이 더 남아 있지만 이미 출간된 번역본들을 참고할 수 있다. 단편의 경우는 <런던소식><회상>(하늘연못, 2010) 두 권으로 갈무리되어 나와 있고, 문학론과 문명론은 각각 <나쓰메 소세키 문학예술론><나쓰메 소세키 문명론>(소명출판, 2004)이 진작 출간되었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한 여건은 충분히 갖춰진 셈이다. 남은 건 독자의 일인데,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일본 작가에게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지 따져보는 것 말이다.


1867년생인 소세키의 생애는 대부분의 기간이 메이지 시대(1868-1912)와 중첩된다. 메이지 시대는 한마디로 서양에서 300년 동안 진행되어 온 근대화를 40년 동안 압축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시대다. 이 압축근대화는 러일전쟁(1904-1905)에서의 승리로 일단 성공을 거둔 듯이 보였다. 숙원대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기간의 갑작스런 근대화산업화가 아무런 부작용 없이 진행될 리 만무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전근대적 사회규범은 급속도로 무효화되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사회 규범과 근대적 시민의식의 형성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세키는 서양을 모델로 한 일본의 근대화는 결국 서양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으며 서양과 일본의 격차는 결코 좁혀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이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정부 유학생으로 2년 반 동안 영국 런던에서 생활해본 소세키의 실감이 그러했다. 그는 키도 작고 왜소한 체구의 자신이 유럽인들과 비교할 때 한갓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근대국가 일본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가 어렵사리 찾아낸 출구는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였다. 소세키의 문학은 이 자기본위라는 신념이 겪게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소세키 문학의 출발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부터다.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를 주재하던 친구로부터 소설을 한번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서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의 시점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관찰한다는 설정으로 지어낸 이야기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도쿄제대의 영문과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오랫동안 앓아온 신경쇠약과 우울증 증세가 더 나빠지던 무렵이었다. 기분전환 삼아 써본 것이었지만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에게 뜻밖의 치료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 작품에서 주된 관찰 대상인 구샤미 선생은 소세키 자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지만, 화자인 고양이도 물론 소세키의 분신이다. 즉 고양이(소세키)가 주인 구샤미(소세키)를 관찰하는 구조이다. 통상적인 자기 분석이 분열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반해서 이 작품에서는 고양이라는 구체적인 거점 덕분에 그러한 자기 분석이 자기 분열에 빠질 위험 없이 안정감 있게 진행된다. 직업이 선생으로서 대단한 면학가인 척하지만 고양이가 서재를 들여다본 결과 대체로 그는 낮잠을 자고 있다. 가끔은 읽다 만 책에 침을 흘린다.” 책을 읽는다지만 두세 페이지 넘기다 이내 침을 흘리며 조는 게 구샤미(소세키)의 일상이라고 고양이(소세키)는 폭로한다. 이러한 폭로의 해학적 어조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성공을 낳았다. 독자들의 호평이 이어졌고 소세키는 수년간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소설쓰기의 순기능을 발견한다. 직업작가로서 나설 결심을 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경험에 힘입어서다.


1907년 소세키는 도쿄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아사히 신문사의 전속작가로 입사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1906) 같은 작품을 단숨에 써내려간 전력을 믿었지만 막상 전속작가의 생활은 만만치가 않았고 한때 해방감을 맛보게 했던 소설쓰기는 또 다른 굴레가 되어 그를 옥죄었다. 힘들게 소설쓰기의 출구를 모색하던 그는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도쿄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산시로>(1908)를 통해서 마침내 그만의 주제와 스타일을 발견한다. 그것은 근대화 과정의 한복판에 놓인 문제적 주인공의 자기발견 내지 자기본위의 구현이다.


<산시로>에서 스물세 살의 대학생 주인공 산시로는 아직 풋내기로서 자기만의 개성과 독자성을 밀고나갈 만한 배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소세키 소설에서 그런 개성은 주로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산시로는 동향의 대학 선배이자 촉망받는 물리학자 노노미야와 함께 매력적인 신여성 미네코를 사이에 두고 어정쩡한 삼각관계를 형성하지만 그녀를 휘어잡을 만한 능력은 보여주지 못한다. 노노미야 역시 여자의 마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여 미네코를 다른 남자에게 놓치고 만다. 그렇듯 어설픈 사랑이야기로 전개되다 끝나고 말지만 <산시로>는 어둡다기보다는 산뜻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젊은 주인공에게 아직 창창한 미래가 남아 있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산시로>에 이어지는 <그 후>(1909)에 오게 되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이 작품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서른 살의 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일부러 직장을 갖지 않고 빈둥대기에 고등유민이라 불린다. 비록 사업가인 아버지에게 매달 용돈을 타 쓰는 처지이지만, 다이스케는 뛰어난 지성과 심미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서 당대의 세태와 문명에 대한 예리한 성찰과 비판을 내놓을 줄 안다. 가령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 히라오카의 핀잔에 대해 다이스케는 자기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라고 말하면서 일본과 서양의 관계를 핑계로 댄다. 서양의 빚을 얻어서 경제를 일으키려고 하는 일본은 마치 소하고 경쟁하려는 개구리와 다를 바 없고 곧 배가 터지고 말 거라는 게 다이스케의 생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논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먹고살기 위한 노동, 생계를 위한 노동은 노동을 위한 노동이 아니기에 진정한 노동이 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은 타락한 노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근대에 대한 예민한 대결의식을 보여주는 것들로 작가 소세키의 생각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문제는 그러한 비판적 인식이 생활 속에서 안정된 토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권하는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다이스케가 자신이 히라오카와 맺어준 미치요에게 뒤늦게 구애하는 것은 과감한 자기본위의 행동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매장을 감수하는 행위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자연에 따라 미치요를 선택한 대가로 그는 친구에게는 물론 아버지와 형으로부터도 의절 당하게 된다. 이제 스스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다이스케의 모습이 <그 후>의 결말이다.


<그 후>의 뒷이야기로 읽히는 <>(1910)의 주인공 소스케는 과거 친구의 동거녀 오요네를 아내로 삼는 바람에 도의상의 죄를 짊어지고 사회로부터 매장되다시피 한다. 비록 두 사람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지만 과거의 그림자를 다 떨쳐내지는 못한다. 세 번이나 아이를 갖지만 모두 잃게 되는 것도 자신들의 죄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본위의 대가로 감수하기에는 너무 큰 희생이다. 이들 부부에게 과연 행복은 가능할까? 소스케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는 게 <>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소세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마음>(1914)은 이러한 소설적 여정의 마무리로 읽힌다. 작중 화자가 선생님이라고 따르는 이의 유서가 작품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그의 절친했던 친구 K는 하숙집 딸을 사이에 두고 그와 삼각관계에 놓인 것에 절망하여 자살했다. 이후에 그는 하숙집 딸과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 내내 친구의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다가 결국은 메이지 천황의 죽음을 빌미로 하여 자살을 결심한다. 선생님의 이러한 선택은 자기본위적 삶의 궁극적인 패배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 소세키는 나의 개인주의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옹호하고자 했지만 그의 개인주의는 작품 속에서 매우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은 패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패배를 잘 음미하고 성찰하는 것이 소세키 읽기의 과제로 여겨진다.   


16.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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