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모스크바 통신문에 올렸던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북매거진 <텍스트>의 청탁을 받고 씌어진 글인데, 분량상 이 글의 축약본이 <텍스트>에는 실렸었다. 안톤 체홉(체호프)의 작품을 읽으면서 '세계문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글이다.

 

 

모스크바 체류 6개월째(*이 글은 2004년 9월 중순에 씌어졌다). 이런저런 ‘현지사정’으로 그동안 단 한편의 글도 기고하지 못했는데, <텍스트>는 새로운 기획의 한 꼭지를 내게 맡겼다. 편집진에서 내게 요구한 것은 “체홉을 읽는다는 것, 혹은 러시아 문학을 읽는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순수문학, 아니 그보다는 ‘진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의 유의미성에 대한 소고”이다. 러시아 작가들 가운데 유독 안톤 체홉(1860-1904)이 거명된 것은 올해가 그의 사망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그가 사망한 달인 지난 6월에 이미 관련행사들이 개최된바 있으며, 한국에서도 최근 이를 기념한 작품집 두 권, <벚꽃동산>과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4)이 출간되었다(*물론 이후에 5권짜리 선집을 포함해서 더 많은 책들이 나왔다. 가장 최근에 (재)출간된 건 <체호프 단편선>(문예출판사)이다). 새로 번역돼 나온 책들에 대한 리뷰를 겸하면서 ‘체홉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이 <텍스트>의 성격에 부합하는 작업일 듯하지만, ‘현지사정상’ 내가 참조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어 문고본 체홉과 (후배에게 며칠 빌린) 한국어본 작품집 <귀여운 여인>(혜원출판사, 2000)뿐이다(이하에서의 체홉 인용 쪽수는 이 작품집의 것이며, 번역은 일부 수정됐다).

<텍스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나는 체홉의 단편들 중 <6호실>(1892)과 <상자 속의 사나이>(1898)를 다시 읽었고, 거기에 최근에 번역/소개된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을 겹쳐 읽었다. 고진의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은 “세계종교에 대하여”인데, 나는 ‘세계종교’에 대한 고진의 사유를 ‘세계문학’에 대한 것으로 고쳐 읽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해서, 이 글의 골격이 짜여진바, 나는 체홉의 두 단편 읽기를 통해서, ‘진짜 문학’, 곧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리고 그것을 읽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따져보고자 한다(이러한 주제가 다소 주제넘은 것으로 보인다면, 그건 이런 걸 주문한 <텍스트>의 탓이다).

체홉의 전기나 연보를 유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것이 1890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에 감행한 사할린 여행이다. 알다시피, 체홉은 순전히 생계의 방편으로 모스크바대학 의학부 학생시절에 유머 단편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이 시기에는 ‘체혼테’ 등의 필명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어느덧 10년, 체홉은 자신의 삶과 작가생활에 있어서 어떤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를 타개/돌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획하고 실행한 것이 사할린 여행이었다.

 

시베리아 철도가 개설되기 이전이라 사할린 섬으로의 여행은 마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체홉은 1890년 4월에 길을 떠나 7월에 사할린 섬에 도착하고 3개월간 체류하면서 당시 유형지였던 사할린 섬의 실태를 조사하고 주민들 혹은 죄수들과 일일이 만나 면접카드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이때 작성한 카드만 8,000장 이상이었다). 그리고는 바닷길을 통해 다시 모스크바에 돌아온 것이 그해 12월이었다. 이 여행 이후에 그는 <시베리아 여행>(1890)이란 기행문과 <사할린 섬>(1895)이라는 아주 ‘객관적인’ 보고서를 발표하며, 문학사가들은 이 여행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보다 넓어지고 깊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사할린 여행 이후의 체홉을 ‘중기 체홉’으로 분류해도 좋으며(‘후기 체홉’은 <갈매기> 이후 드라마 작가로서의 체홉이다), 이 중기의 체홉은 ‘코믹’과 ‘우수’의 작가 ‘체혼테’와는 연속적이면서도 좀 다른 체홉이다. 즉, 그의 코믹과 우수는 저울추를 단 것처럼 다소 무거워진 코믹과 우수가 되었다(그걸 비극과 비애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한 시골 자선병원의 의사가 자신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정신병동에서 유일하게 총명한 청년을 만나 자주 대화를 나누다가 미친 걸로 간주되어 감금되고 결국은 맞아 죽은 이야기를 그린 <6호실>과 자신을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보호/방어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허무한 죽음을 맞은 시골학교 교사를 그린 <상자 속의 사나이>는 이러한 중기 체홉의 대표작들이다.

 

<6호실>의 주인공인 의사 안드레이 예피므이치는 시골 자선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하여 아주 불결하고 암담함 병원상태를 둘러보고는 “이 시설이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거주자의 건강에도 매우 해롭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현재로서 가장 현명한 조치는 환자를 퇴원시키고 병원을 폐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320-1쪽). 그러니까 문제는 환자가 아니라 병원 자체였던 셈. 하지만, 그는 곧 그러한 ‘현실’과 타협하고 만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부족하며 또한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는 지성과 성실(=정직)을 사랑했지만, “박력(=의지)과 자기 권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주변의 무지와 불성실(=부정직)을 그대로 방치하고 만다.

물론 안드레이 에피므이치도 처음엔 사명감을 가지고 매우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의 단조로움과 무익함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322쪽) 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시골 읍의 사망률은 전연 줄지 않았고 환자의 발걸음도 도무지 그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결국 체념하게 되며 자신의 체념을 죽음과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정당화한다(체념과 나태는 철학의 어머니이다!).

가령, “푸슈킨은 죽음에 임하여 무서운 고통을 맛보았고(참고로, 푸슈킨은 결투에서 복부관통상을 입고 반나절 이상을 신음하다가 죽었다), 불쌍한 하이네는 여러 해를 중풍으로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개 안드레이 예피므이치나 마트료나 사비쉬나 따위가 고통을 맛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그들의 생활은 무미 건조하기 짝이 없어서 만약에 고통마저 없다면 아주 공허하게 되어 아메바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게 될 텐데 말이다.”(322쪽) 그는 이런 논리, 즉 우리가 아메바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고통은 필요하다는 ‘고통의 철학’에 압도당해서 아예 병원에 가는 일조차 그만두고 만다.

 

작가 체홉은 삶의 문제에 대한 ‘철학화’, 혹은 삶에 대한 철학의 (과잉)결정에 언제나 회의적이었다(때문에 그는 톨스토이즘과도 결별한다). 안드레이 예피므이치의 ‘고통의 철학’(=고통의 일반화) 또한 그 자체의 논리로는 완벽하지만, 거기에는 고통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고진의 표현을 빌자면, 거기엔 ‘이 나’의 고통, 즉 고통의 단독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안드레이 예피므이치 라긴’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막연하게 존재했다. 즉 존재했던 것은 ‘안드레이 예피므이치 라긴’이란 단독자가 아닌 그의 유령이자 그림자였던 것이다.

“내가 왜 죽어야 하나?”가 아니라 “아아, 어째서 인간은 죽어야 하나?”와 같은 철학적 상념에 빠져서 책읽기에만 몰두하던 안드레이 예피므이치는 그러던 차에 어느 봄날 정신병동인 6호실을 방문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유일한 대화상대가 될 만큼 사색적이고 총명한 청년을 만난다. 피해망상증 환자로 분류돼 6호실에 수용된/감금된 이반 드미트리치 그로모프였다(사람들은 그를 애칭인 ‘바냐’로 불렀는바, 그는 ‘바냐 총각’이다).

“일반 사람들은 행복이나 불행을 외부에서 구합니다. 즉, 마차(=여행)나 서재(=독서)에서 구합니다만 사색적인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습니다.”(341쪽)란 의사 안드레이의 ‘철학’에, 환자 이반은 “그런 철학은 오렌지꽃이 피는 따스한 그리스에 가서나 설교하시죠. 여기선 기후가 맞지 않으니까요.”라고 대꾸한다. 그리고 의사가 늘어놓는 ‘스토아 철학’ 예찬에 대해서 환자는 성난 표정으로 말한다. “외적인 것, 내적인 것… 미안합니다만 내게는 이해가 안됩니다. 내가 아는 건 신이 나를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했다는 한 가지 사실뿐입니다! 유기적 조직은 생활능력이 있는 경우에 모든 자극에 대해 반드시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난 반응을 하는 거죠! 고통에 대해서 나는 비명과 눈물로 대답하고 비열성에 대해서는 분개로, 추행에 대해서는 혐오로 대답하는 겁니다. 유기체가 저급이면 저급일수록 감수성이 둔하고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약하며, 반대로 고급일수록 현실에 대해 한층 더 민감하게 정열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런 것을 어째서 모르십니까? 의사이면서도 이런 시시한 것도 모르다니!”(342쪽)

다소 길게 인용된 이 대목에서(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안드레이와 이반, 즉 의사-환자의 관계는 전도된다. 이것은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수행한 ‘가치의 전도’를 연상시키는데(사실 저급한 존재와 고급한 존재의 구별은 바로 니체의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따라서 ‘정신병자’ 바냐의 레슨이라는 형식을 띠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이반 드미트리치 그로모프는 이렇게 말했다”가 되는 것이다(그의 성 ‘그로모프’의 어근인 러시아어 ‘그롬’은 ‘번개’ ‘벼락’이란 뜻이다).

이반이 무엇보다도 문제삼는 것은 인간의 평안과 만족이 자기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간주하는 현자적, 혹은 철학자적 태도이다. 그는 의사 안드레이에게 “당신은 인생을 깨닫느니 고통에 대한 멸시니 하는 문제를 꺼낼 자격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즉, “당신은 예전에 괴로워한 적이 있나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요? 당신은 어릴 때 회초리로 맞은 적이 있습니까?”(344쪽) 이에 대해서, 안드레이는 자신의 양친이 육체적 형벌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고 답하지만(즉, 그는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 이반 왈 “하지만 난 아버지한테 사정없이 맞았죠.”(작가 체홉 또한 식료품 가게 주인이었던 아버지한테 어린시절 사정없이 맞았다.)

그러니 이반이 보기에 안드레이가 고통을 경멸하고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그가 생활(=삶)이란 걸 전혀 모르며 이론적으로만 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한 구분이나, 생활과 고통, 죽음에 대한 경멸 따위는 모두 러시아 놈팡이들의 철학에 불과하다(놈팡이들이 부유하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한 놈팡이 철학의 궁극적인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6호실에 감금돼 있는, 멍청한 얼굴에 뚱뚱하게 비계살이 찐 농부인바,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하거나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몸은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먹기만 하는 불결한 동물이었다.”(317쪽)

병동의 수위 니키타가 그의 시중을 들 때마다 자기 주먹이 아픈 것도 아랑곳없이 힘껏 때려 패지만, “무서운 것은, 그가 얻어맞은 사실이 아니라, 이 무감각한 동물이 구타에 대해서 비명이나 몸을 피하거나 눈을 부라리는 따위의 반응조차 나타내지 않고, 묵직한 통처럼 약간 흔들릴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무감각한 동물’ 혹은 ‘묵직한 통’은 현실을 초월해 있으며,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철학적인’ 통은 ‘디오게네스의 통’이라 할 만하다.

요컨대, 고통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이 농부야말로 철학자연하면서 고통을 무시하는 의사 안드레이 예피므이치의 짝패이자 이면이다(안드레이 왈 “디오게네스는 통속에서 살았습니다만 지상의 모든 국왕보다도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이반의 결론은 이렇다. “당신은 고통을 무시하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신 역시 손가락이 문에 찌이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댈 겁니다!”(345쪽) 안드레이 예피므이치는 이러한 이반 드미트리치와의 대화에 감명을 받아서 이후에 6호실에 자주 드나들게 되며 그로 인해서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서 면직되며 결국은 ‘치료’를 위해서 강제적으로 6호실에 감금되는 처지가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일상생활과 현실의 ‘바깥’이었던 이 정신병동에서야 비로소 생활이 무엇인지, 현실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된다. 즉, 그는 답답한 마음에 한밤중에 산책을 나가겠다고 수위인 니키타를 윽박지르다가 난생처음 구타라는 걸 당하게 되는바, “갑자기 니키타가 문을 홱 열더니 두 손과 무릎으로 난폭하게 예피므이치를 밀어젖혀 놓고 주먹을 들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는 파도 위로 떠오르려고 하는 것처럼 양팔을 휘젓기 시작하다가 누구의 침대인지 붙잡았다. 그때 니키타가 두 번 등을 후려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공포심을 가지고 또 한번 얻어맞을 것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369-70쪽)

안드레이는 자신이 20년 이상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몰랐을 뿐 아니라,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에겐 비로소 “양심이, 니키타처럼 완고하고 난폭한 양심이, 그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오싹 소름이 끼치게 하는 분노로 몰아세웠다.”(370쪽) 하지만, 그건 좀 뒤늦은 분노였다. 그는 바로 다음날 저녁 무렵에 뇌일혈로 사망했으니 말이다.

다소간 어이없는 주인공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상자 속의 사나이>는 <6호실>을 닮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상징적 공간은 ‘6호실’에서 ‘상자’로 더 축소되었다(덕분에 그 상징성은 더 확대된다). 6호실에는 적어도 대여섯 명의 환자가 함께 감금돼 있었지만, 시골학교의 그리스어 교사 벨리코프의 ‘상자’는 오로지 그만의 것이다. 그가 왜 ‘상자 속의 사나이’인가? 그는 “날씨가 매우 좋은 때에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드는 데다가 반드시 솜이 든 방한 외투를 입고 외출”했기 때문이다.

화자인 동료 교사 부르킨에 의하면, “어쩌면 그것은 격세유전의 한 현상으로 인류의 조상이 아직 사회적인 동물이 되지 못하고 각자가 자기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던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건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그저 인간의 다양한 성격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243쪽) 어쨌든 벨리코프가 자신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격리시켜 방어하려는 ‘상자들’로 자기를 감쌀수록 그에게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자질, 즉 사회성은 배제/결여되게 된다. 이 벨리코프가 찬양한 것은 과거의 세계, 그리스어의 세계뿐이었으며, 그에게 인간은 “듣기 좋고 아름다운 말” 그리스어의 ‘안트로포스’에 의해서 지시될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꽤나 똑똑한 동료교사들을 포함해서 학교 전체가 꼬박 15년 동안 “언제나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들고 다닌 이 사나이”, 언제나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던 이 소심한 사나이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러시아 연구자들은 알렉산드르 3세(1881-1894)와 벨리코프의 친연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나이가 마흔이 넘은 이 노총각 벨리코프를 타지에서 온 동료교사의 누이인 서른 살의 바렌카와 결혼시키려던 일이 어떻게 실패로 돌아갔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란 말(이 또한 그의 ‘상자’이다)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이 사나이에게 결혼이란 ‘일’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도 드물어 보이지만, 하여간에 그는 주변의 모의 덕분에 거의 결혼할 뻔한다. 하지만, 결혼 뒤에 어떤 일이 생길는지 확실할 수 없었던 벨리코프는 바렌카에 대한 청혼을 주저하며,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만다.

사건이란 건 언제나 활달하며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렌카가 어느 일요일에 동생 코발렌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걸 벨리코프가 목격하게 된 것을 말한다. 너무도 날씨가 좋아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활기차게 재잘거리고 지나간 바렌카와는 대조적으로 벨리코프는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로선 부인네나 처녀가 자전거를 탄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요컨대 ‘상자 속의 사나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살아있는 삶’이었다). 게다가 그건 공고로써 ‘허가’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충격을 받은 벨리코프는 다음날 학교도 결근한 채 저녁 무렵 여름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역시나 두꺼운 옷을 껴입고 주의를 당부하러 코발렌코를 찾아가지만, 오히려 봉변만을 당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바렌카는 예의 또 ‘하하하’ 하는 웃음을 터뜨리고, 결국은 ‘무슨 일이 터져버린’ 벨리코프는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앓아 눕게 되며 한달 뒤에 죽고 만다.

벨리코프 이야기의 결말은 이렇다. “관 속에 든 그의 표정은 조용하고 편안해 보였으며 명랑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흡사 드디어 상자 속에 들어가게 해 주어서 이제 두 번 다시 그곳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죠, 그는 글자 그대로 자기의 이상에 도달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경의를 나타내려는 듯 장례식 날은 잔뜩 흐려서 비가 올 듯한 날씨였으므로 우리들은 모두 덧신을 신도 우산을 들고 있었습니다.”(255-6쪽)

 

 

요컨대, ‘상자 속의 사나이’의 삶은 상자(관) 속에 들어감으로써 완성된 것인데, 그러한 사실이 암시하는 것은 그의 ‘상자-속의-삶’이란 것 자체가 이미 절반은 죽은 삶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죽음(=상자)이란 외피를 두름으로써만 연명할 수 있었던 삶, 살아있지만-죽어있는 삶을 살았던 것. 그렇다면, 이 작품 또한 ‘살아있는 삶’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인바, 이 주제는 성 바울의 주제(“너희는 너희가 살아있는 줄 아느냐?”)이면서 동시에 러시아문학의 고유한/유구한 주제이기도 한다(특히 도스토예프스키 계보의 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체홉은 러시아 문학의 전통 바깥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주제를 제기만 할 뿐,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구별된다.

사실 <상자 속의 사나이>는 벨리코프의 죽음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는다. 벨리코프의 죽음으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제는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생활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똑같이 고지식하고 걱정스럽고 무의미한 생활,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도 않은 생활, 요컨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생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벨리코프는 무덤에 묻혔지만 그런 ‘상자 속의 사나이’는 많이 있으며 앞으로 또 나올 것이었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것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니콜라이 2세(1894-1917)의 치세에 견주지만,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꾼” 치세가 러시아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화자 부르킨은 헛간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쳐다본다. “(그에겐) 어둠의 적막 속에서 여러 가지 고통이나 괴로움이나 슬픔에서 벗어나 밤의 그늘에 감싸여 왠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슬프고 아름다워지고 어쩐지 하늘의 별들도 정다운 감동을 지닌 눈길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지상에는 이제 악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원만하게 수습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257쪽) 벨리코프의 ‘코믹’한 삶에 덧붙여진 것은 이렇듯 지상의 악에 ‘무심한 자연’이 낳는 ‘우수’이다(‘무심한 자연’은 투르게네프의 주제이다).

체홉과 동시대의 러시아 작가 레스코프는 “사방이 다 6호실이다. 이것이 러시아다”라고 말했고, 한 여성 작가는 “저에겐 전 러시아가 상자 속 같이 느껴진답니다”라고 체홉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진단을 더 확장하여 “세계는 6호실이다” 혹은 “세계는 상자 속이다”, “우리 모두는 상자 속의 인간”이라고 일반화시켜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예 ‘상자성’이라는 일반 개념까지 만들어서 말이다. 그럴 경우, 체홉의 문학은 러시아 문학을 거쳐서 문학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것이 문학이 갖는 ‘개별성(부분)-일반성(전체)’의 구도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언어와 비극>의 한 장 “단독성과 개별성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옛날 논리학으로는 결코 ‘이 나’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문학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근대소설에서는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은 ‘이 나’가 쓰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별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일반적인 것입니다. 근대소설은 오히려 개별적인 것이 일반적인 것을 의미하는 장치입니다… 따라서 단독성은 문학이 아니라 반대로 논리학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356-7쪽)

고진에 따르면, 문학(특히 근대소설)은 ‘개별성-일반성’의 구도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논리학이 다루는 ‘단독성-보편성’의 구도와는 무관하다. 즉 “마담 보바리는 나다, 곧 우리는 마담 보바리이다”라거나 “안나 카레니나는 나다, 곧 우리는 안나 카레니나이다”와 같은 개별성의 일반화, 혹은 상징화가 근대소설이 가진 특장이었는바, 그것은 진정한 단독성/보편성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용한 대목이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하지만, 고진 자신이 주장하듯이 단독성의 문제는 “고유명의 문제로 귀착”(449쪽)되며, 문학은 다른 무엇보다도 고유명의 세계인데, 문학에서는 단독성이 발견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잉)일반화로 보인다.

“우리는 마담 보바리이다”라거나 “우리는 안나 카레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마담 보바리’나 ‘안나 카레리나’라는 개별성이 ‘우리’라는 일반성으로 곧장 환원된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가 고유명인가 그러지 않는가는 개체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455쪽)다는 고진의 주장을 그대로 되돌려주자면, 문학(이라는 고유명사적 세계)에서 개별성-일반성의 구도를 보는가, 단독성-보편성의 구도를 보는가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간) 결정하는 것이다. 더불어, 근대소설은 근대소설 자체를 넘어선다는 고진의 주장을 역시 그에게 되돌려주자면, (진정한)근대소설은 “근대소설은 오히려 개별적인 것이 일반적인 것을 의미하는 장치”라는 규정을 넘어선다.

하지만, 고진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에도, 체홉의 문학은 근대소설에 못 미치거나 그것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에서 개별적인 것(고유명사)은 언제나 일반적인 것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체홉의 문학은 ‘개별성-일반성’의 구도 안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고진은 그러한 구도를 넘어서는 일이 ‘단독성에 집착하는 작가’ 카프카처럼 오히려 알레고리를 선택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언급하는데, (체홉의 경우를 보건대) 알레고리가 아닌 다른 방식 역시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것은 알레르기의 방식이다.

가령 <상자 속의 사나이>의 결말에서, 부르킨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수의사 이반 이바느이치가 “우리가 숨막히는 좁은 동네에 살면서 필요도 없는 서류를 쓰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 그것도 역시 상자와 다름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게으름뱅이나 궤변가나 주책없는 경박한 여자들과 일생을 보내고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들을 주고받는 것, 그것도 일종의 상자가 아닐까요?”(257쪽)라고 동의를 구하면서 “이제는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없어요!”라고 결론을 내리자, 부르킨은 이렇게 대꾸할 따름이다. “또 얘기가 빗나갔군요. 이반 이바느이치. 아무튼, 오늘은 잠이나 잡시다.”(258쪽)

 

후기 톨스토이식의 ‘(도덕적) 교화로서의 문학’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체홉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한 순간에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때문에 언제나 거창한 이념이 아닌, 삶의 ‘부스러기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한 그가 모든 종류의 일반화, 곧 철학화에 알레르기를 보였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알레르기를 선택함으로써, 체홉의 문학은 고진이 말하는 ‘개별성-일반성’의 구도를 넘어서 ‘단독성-보편성’의 구도로 진입한다.

‘개별성/일반성’과 ‘단독성/보편성’을 구별하는 고진의 사유가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은 (내 생각에) 세계종교론에서이다. 고진의 ‘세계종교’와 대별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의 종교’인바, 이것은 “인간이 집단이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강제되는 다양한 구조/시스템”(241쪽)이다(고진이 이렇듯 종교를 광의의 의미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문화와 등가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공동체 종교의 대전제는 안(=내부)과 바깥(=외부)의 구분이다. 반면에 이러한 공동체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출현한 세계종교는 더 이상의 외부가 없는 세계, 즉 ‘외부가 없는 세계’로서의 ‘무한한 세계’를 제시하는 종교이다. 이 세계종교의 구호는 두 가지인바, “신을 두려워하라”와 “타자를 사랑하라”가 그것이다.

고진은 이러한 관점을 유대교에 적용함으로써 유대교에 내재해 있는 (모순적인) 두 가지 계기를 ‘모세의 신’과 ‘야훼의 신’으로 구별/분리해낸다(이러한 구별/분리를 매우 힘겨워하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지젝과 대조된다). 그에 따르면 야훼의 신은 유대 공동체의 신이며, 반면에 공동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모세의 신은 세계종교의 신이다. 이 모세의 신은 사람들에게 ‘공동체에서 나가라’라고 이른바 ‘사막에 머물라’고 고한다(259쪽). 그리고 이때의 ‘사막’은 꼭 물리적인 사막이란 의미가 아니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의미이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상업적 공간이고 교통공간이다(고진은 사회를 그러한 교통공간으로 규정한다). 독백이 아닌 대화가 가능한 것은 그러한 (교통)공간, 즉 ‘사막’에서일 뿐이다.

 

 

 

 



 

 

 

세계종교가 ‘사막의 종교’란 의미에서 세계문학 또한 ‘사막의 문학’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모든 공동체를 거부하는 공동체 ‘바깥의 문학’이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문학’이다. 거꾸로 공동체의 존속과 안녕을 위한 문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세계문학이란 이름에 값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문학은 세계문학이 아니며, 세계문학은 민족문학이 아니다. (올바른)민족문학이 곧 세계문학이 된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공동체적 편견에 불과하다. 세계문학이란 야훼의 신이 아닌 모세의 신을 섬기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문학의 대척점에서 공동체의 문학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야훼의 신이 번창하듯이 공동체의 문학 또한 번성해왔고 번성해갈 것이다. 이것을 나는 ‘상자 속의 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상자 속의 문학’은 공동체문학의 다른 이름이고 민족문학의 다른 이름이며, 상업주의 문학의 다른 이름이다(상업주의는 고진이 말하는 ‘상업적 공간’과 무관하다). 이 ‘상자 속의 문학’은 모든 외부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종족과 재산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든다. “항상 색안경을 끼고 털 스웨터를 입은 데다가 귀를 솜을 싸고, 합승마차를 타면 반드시 포장을 치게 한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벨리코프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상자 속의 문학’이 가장 편하게 들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상자(관) 속이다.

앞에서 나는 체홉의 전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1890년의 사할린 여행이라고 적었다. 고진의 표현을 빌자면, 사할린이야말로 체홉에게서 공동체의 바깥, 즉 ‘사막’이 아니었을까? 그가 ‘(재능 있는) 생계형 작가’에서 진정한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나는 그 ‘사막의 발견’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진에 따르면, 이 ‘사막의 발견’은 데카르트에게서 의심하는 주체, 즉 ‘코기토의 발견’에 맞먹는 것이다. 코기토란 것은 상이한 다수의 공동체의 차이를 지각하는 것이고, 자기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아는 것이다(265쪽).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인류학적’ 코기토이며, 체홉이 사할린 섬에서 수행했던 작업 역시 (우연찮게도) 인류학적 현지조사였다.

 



<6호실>에서 6호 병동이 안드레이 예피므이치에게 뜻하는바 또한 ‘사막’에 다름 아닌데, 그곳에서 자신과 전혀 생각이 다른 타자, 즉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 이반 드미트리치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즉 6호실은 그의 삶에서 유일한 교통공간이자 사막이며, 거꾸로 소도시 사람들에게는 ‘공동체’를 위해서 배제되어야 하는 ‘외부’ 공간이다. 병동 수위 니키타의 물리적 폭력은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구분하는 비가시적 폭력의 가시적 대응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방이 다 6호실이다. 이것이 러시아다”라고 한 레스코프의 말은 <6호실>에 대한 부적절한 일반화이다. 러시아에는 ‘6호실’이 넘쳐나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6호실을 달라!”고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해서 겉보기와는 달리, 교통공간으로서의 ‘6호실’은 ‘상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연관을 갖는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6호실’에 대응하는 것은 (가능할 뻔했던) ‘바렌카와의 결혼’이다. 그것이 공간으로 표시될 수 있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바렌카는 소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러시아어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큰소리로 ‘하하하’ 웃는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벨리코프 또한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반하지만, 그에겐 자신의 ‘상자’를 벗어 던지고 진정 타자를 사랑할 용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때문에, 갑자기 ‘돌발적인 사건’(kolossalischeSkandal)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그는 만들어내기라도 했을 텐데), “그도 결국은 청혼해서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결혼이 성립되었을 것”(250쪽)이라는 부르킨의 예상은 부정확해 보인다. 그가 말하는 ‘돌발적인 사건’이란 벨리코프에게서 ‘진정한 사건’을 가로막는 버팀목으로서의 유사-사건이기 때문이다. 벨리코프의 삶에서는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자세하게 읽어본 체홉의 두 작품 <6호실>과 <상자 속의 사나이>는 각각 ‘안드레이 예피므이치-이반 드미트리치’, ‘벨리코프-바렌카’란 고유명 쌍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만남은 (외부적) 편견에 의해서, 그리고 (내부적) 의지 결핍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하지만, 고유명이 관여한다고 해서 어떤 이야기가 막바로 보편성의 차원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고진이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학의 보편성이란 건 그것이 (고진의 용어로) ‘공동체’가 아닌, 교통공간으로서의 ‘사회’를 문제삼을 때 얻어진다. 내가 체홉의 문학을 공동체의 문학이 아닌 세계문학의 범주에서 읽고자 하는 것은 그에게서 그러한 ‘사회에의 관심’을 읽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대략적이나마 ‘진짜 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는 밝혀졌으리라고 본다. 이제 그것을 읽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따져볼 차례이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며 이미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문학은 우리게 (우물이 아니라) ‘사막’을 보여주는 문학이며 ‘사막’을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인류학적 여정을 가능하게 문학이다. 해서,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자각하게 함과 동시에 세상은 넓다는 건 교육하는 문학이다.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non-Jewish Jew’(비유대적 유대인)이란 표현을 비틀면, 우리로 하여금 ‘non-Korean Korean’(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한국)문학이 가져야 할 몫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문학을 갖고 있는가?

04.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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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7 2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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