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을 다시 들먹이게 된 건(*이 글은 2004년 2월말에 씌어졌다), 순전히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Blank Slate>(사이언스북스) 때문이다. 무려 900쪽에 이르는 이 신간은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에 이어지는 책인데, 아침에 어제일자 문화일보를 보고 오늘 서점에서 실물을 확인했다.

 

 

 

 

촘스키만큼 유명한 이 언어학자 혹은 인지과학자의 책들은 <언어 본능>(그린비, 1998)이 번역돼 있지만(*2004년 소소에서 재출간됐다), 더 많이 번역소개되어야 한다. 다니엘 데넷과 함께 '핀커의 모든 책'이라 할 만큼 그의 책들은 수준있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유익한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이런 교양서들은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똑똑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읽을 도리밖에(물론 분량에 대해선 할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 어느 분이 번역중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신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원)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는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이란 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은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두번째 책은 (다빈치)이다.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1898-1972)의 선집으로 그의 판화작품들과 글, 그리고 해설을 모은 책이다. 사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겨지게 된 계기는 호프스테터의 출세작 <괴델, 에셔, 바흐>(까치글방, 1999) 덕분이 아닌가 싶다(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호프스태터의 책은 1980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과감한 가설과 흥미로운 논증으로 이루어진 수준급의 교양서이며, 사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의 에셔 파트는 거의 전적으로 이 책에 의존하고 있다(초판에서 진중권은 참고문헌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런 에셔의 책으로 이 신간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세번째 책은 베른하르트 타우렉의 <레비나스>(인간사랑)인데, 제목대로 독일에서 나온 레비나스 입문서이다. 나는 이런 류의 독일산 입문서에서 별로 재미를 못봤기 때문에, 이 책의 경우도 적극 추천하는 입장은 아니다. 먼저 읽는 분의 소감을 기다린 연후에야 구입을 하든지 말든지 할 생각이다(*나중에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역시나 별로 읽을 만하지 않은 책이었다). 사실 레비나스 입문서로 더 권장할 만한 것은 언젠가도 언급한바 있지만,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와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이다(*레비나스에 대해서는 '지겨울 만큼' 언급했다!). 참, 내가 재미를 못본 책은 D. 호르스터의 <로티>(인간사랑, 2000)와 키멜레의 <데리다>(서광사, 1996)이다. 번역이 부실한 탓도 있겠지만, 원저도 그다지 신통찮아 보인다.

 

 

 



네번째 책은 서강대 영문과 신경원 교수의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소나무)이다(저자는 여러 논문에서 '이리가라이'라고 표기해왔는데, 단행본에서는 불어식으로 '이리가레'라고 표기했다. 국내에서는 '이리가레이'까지 세 가지가 혼용되고 있는데, 좀 통일되었으면 싶다). 이 책을 소개한 건 순전히 그 희귀성 때문이다(*나로선 그 이상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리가레의 책들이 여러 권 소개되고 있지만, 크리스테바에 비추어 그의 지명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독톡하게 착취/전유한 그의 페미니즘적 정신분석이론은 오히려 크리스테바보다 더 틈실해 보이며,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그래서, 바람직한 건 이런 논문집보다는 그녀의 주저인 <반사경> 같은 책이 번역되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두 사람과 함께 프랑스 페미니즘 3인방이라 불리는 엘런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출구>(동문선)도 번역돼 나왔다(*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페미니즘과 문학>(문예출판사, 1990)에 식수의 글 일부가 번역소개된 거 같은데, 번역이 아주 부실한 책의 하나이기에 잊혀질 만하고, 이번이 본격적인 소개라고 해야 할 듯싶다. 역자는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책세상)과 푸코의 <정신병과 심리학>(문학동네)을 번역한 바 있는 박혜영 교수. 아마도 크리스테바의, 얼만전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신간 <검은 태양>(동문선)보다는 번역이 나을 성싶다. 번역은 역시나 불만스럽다. 프로이트의 '사물'(영어로는 Thing)을 아예 불어 '사물'의 음역인 '쇼즈(Chose)'로 번역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혹시나 싶어 영역본까지 있는 이 비싼 책을 산 나 자신이 한심하다...

 



 

 

끝으로, 두 주쯤 전에 나온 <들뢰즈>(이룸). 저자는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논문과 저서, 그리고 번역서까지 내고 있는 박성수 교수(*그의 최신간은 <애니메이션 미학>(향연, 2005)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전공한 저자가 들뢰즈주의자로 전향(?)하게 된 동기야 알 수 없지만, 그런 대로 튼튼한 이론적 베이스를 갖추고 들뢰즈의 예술론을 소개하고 있기에 신뢰할 만하다... 이것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처음 1장을 읽고 좀 실망하게 되었다. 36쪽에 있는 이런 문장을 보라: '그(엡스텡)는 이러한 전적인 타자성, 낯설음을 숭고로 규정하면서, 칸트가 숭고에 대해 보다 높은 능력의 환기를 통해서 쾌감으로 전화되는 조화의 관점을 비판했다.' 뫼비우스처럼 꼬인 이 문장은 어떻게 읽어도 말이 안된다. 정확한 문장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정확한 사고를 할 거라고 기대하기는 무망하다. 이런 실수가 우연적/일회적인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우스개 하나. 동문선의 신간 중에는 건국대 영문과 김종갑 교수의 <문학과 문화 읽기>도 들어있는데(김교수는 에릭 매슈스의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동문선에서 역간한바 있다), 이 번역본 전문 출판사는 책 겉표지에 '김종갑 지음'이 아니라 '김종갑 옮김'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저자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아직 책을 회수한 기미는 안 보이므로 그대로 참아두기로 한 모양이다. 책이 재판을 찍으면서 수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저자는 역서 한권을 더 늘리는 데 만족해야 할 듯. 그런 동문선의 목표는 1년의 100권의 책을 내는 거라고 한다(물론 80% 이상이 번역서). 번역에의 그 '놀라운 열정'을 치하하면서, 번창을 기원한다...

2004.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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