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에 나온 책으로 가장 꼽을 만한 건(* 이 글은 2004년 2월 하순에 씌어졌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이다. 리쾨르, 가다머에 이어서 한동안 또 헤겔 자료를 수집하는 우연히 겹쳐서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직 책을 통독하지는 못했지만, 이 신간은 헤겔과 스피노자의 이름이 들어간 책 가운데, 가장 장정이 유려하며 번역 또한 가장 신뢰할 만하다. 물론 방점이 더 들어가야 하는 쪽은 후자이다.

 

 

 

 

역자 진태원씨는 스피노자 전공자로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고, 곧 <법의 힘>을 역간할 예정으로 있다(*물론 <법의 힘>은 2004년 여름에 출간됐고, 이어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도 작년에 역간됐다). 역자의 '자신감'은 상당한 분량의 해제와 역주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이학사) 정도가 이에 대적할 만하다(내가 요즘 한밤중에 몇 페이지씩 들춰보고 있는 책이다). 당분간은 스피노자보다는 데리다 번역에 더 전념할 계획인 것으로 보이는데, 언젠가는 <에티카>의 새로운 번역을 출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발리바르와 함께 알튀세르 사단을 형성하고 있는 피에르 마슈레의 책들로는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1994)와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 2003)가 이미 번역돼 있는바, 두 권의 책은 문학론에서 마슈레의 주저일뿐만 아니라 알튀세르 사단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1970년대에 나온 전자는 진작에 영역되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책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역본은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역자는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데, 보드리야르로서는 불운한 일이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론 레닌의 톨스토이론에 대한 비평문과 바르트의 구조주의 비판 등에 흥미를 갖고 있지만, 쥘 베른이나 미셸 투르니에에 관한 글들도 관심이 있는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하다. 후자는 생각없는 책값 때문에 아직은 구매할 생각이 없는데, 뒤져보니까 영역본인 <문학의 대상>을 내가 이미 갖고 있었다. 나중에 '휴양지'에서나 한번 읽어볼 생각이다(*나중에 읽어본 바에 따르면,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는 무슨 생각으로 번역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책이다).

 

 

 



마슈레의 책에 이어서 2월의 책으로 꼽을 만한 인문번역서는 부르디외의 <중간예술>(현실문화연구)이다. 지난주에 나온 이 책은 부르디외가 1/3 가량을 쓴, 사진에 관한 공동연구서이다. 부르디외의 책이야 간간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이 책이 유독 반가운 것은 먼저 동문선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단골' 번역자들이 번역하지 않았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나 정말 그간의 사정이 그럴 만했다.

역자는 주형일씨이고, 그간에 <문화의 세계화>(한울, 2000), <소리없는 프로파간다>(상형문자, 2002) 등을 우리말로 옮긴바 있다(*이후에 <사회보장의 발명>, <섬광세계> 등이 역저로서 더 등장했다) . 재미있는 책들을 번역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공갈 번역자는 아니다. <중간예술>의 한 장은 이미 오래전에 <사진의 사회적 정의>(눈빛, 1989)로 번역 소개된바 있다(물론 영역본도 당연히 나와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을 사회학적 시각에서 보완해줄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세번째 책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의 정치>(백성)이다. 레이코프는 마크 존슨과 함께 인지언어학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의 저작은 우리말로도 여럿 번역/소개돼 있다. 대표작인 <삶으로서의 은유 Metaphors we live by>(서광사, 1995)를 비롯해서, <인지의미론 Women, fire, and dangerous things>(한국문화사, 1994), <시와 인지 More than cool reason>(한국문화사, 1996), <몸의 철학 Philosophy in the flesh>(박이정, 2002) 등이 그것이다. 아직 제대로 독파한 적은 없지만, 계속 관심을 갖고 그의 책들은 사모았었는데, 이번에 나온 이 '언어학자'의 '정치론'은 가장 뜻밖의 책이다(원저는 'Moral politics'이고,1996년에 출간됐다).

언론인인 역자도 그리고 두서없이 책을 내는 출판사도 모두 생소하지만, 저자의 지명도 때문에 서점에서 이 책을 주저없이 사들었다. 책의 부제는 '보수주의자들은 알고 있는데, 진보주의자들은 모르는 것들'인데, 보수와 진보의 논리를 인지언어학적인 논리에 따라 차별화시켜서 논하고 있다고. 방법론은 좀 단순해 보이지만 한번 시간을 내서 읽어봐야겠다(*알다시피, 최근에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출간됐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다).

 

 



 

네번째 책은 권영민 교수의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민음사)이다. 거의 77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지용의 시 거의 전편을 다시 읽어나가는 책이다. 오래전 김학동 교수의 선구적인 <정지용 연구>(민음사, 1997) 이래로 1987년에 해금된 이 대표적 근대시인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돼 있는바, 신간은 그간의 성과를 집약하면서 지용시 연구와 해석의 새 단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 해설서의 저자가 전공이 한국근대소설인 것도 약간은 이채로운데, 서문을 잠깐 읽어보니까 지용시와의 인연은 학부시절 헌챙방에서 우연히/어렵게 구한 시집 <백록담>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고 있었다(*정지용 관련서들로는 최동호 교수의 <정지용 사전> 등이 필독서이다).

어쨌거나 시를 읽고 음미하는 일의 기본을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찬찬히 따라읽어봄 직하다. 그간에 표나게 지용주의자를 자처했던 비평가로 유종호 선생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번 저서에 대해서 어떻게 평할지 궁금하다. 아울러 다른 시인들에 대한 '자세히 읽기'도 이참에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싶다(나는 시를 여기저기 부분부분 인용하며 쓴 연구논문들보다는 이런 류의 전작 읽기를 더 선호하며 신뢰한다). 참고로, 문외한으로서 시를 한번 읽어볼까 하는 이들에겐 유종호의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를 일독하고, 바로 이런 류의 책으로 돌진해보기를 권한다.

 

 

 



물론 시쓰기가 그렇듯이 시읽기에도 무슨 정도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시 전집이 나온 김춘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김춘수 전집은 예전에 문장사에서 오규원이 편집/기획하여 낸 데 이어 두번째인데, 시전집만을 놓고 보면 그간에 민음사에서 <김춘수시전집>(1994)이라고 한번 더 나온 적이 있다). 그의 무의미시와 무의미시론은 지용시와는 전혀 딴판이다(한국현대시론은 이 무의미시론과 김수영의 반시론, 딱 둘밖에 없다. 후배들이 분발할 일이다!) 그러니까 시 또한 단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들', 즉 복수로 존재한다고 봄이 옳다. 각자의 길은 각자가 내는 것이다. 참고로, 작년에 나온 이 분야의 성과로는 이남호가 엮은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과 대표시 해설서 <이 쓸쓸한 날에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현대문학, 2003)가 있다.

 

 

 



다섯번째는 사전류이다. <이진영의 동시통역 기초사전>(이대출판부) 같은 것도 요긴해 보이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개념 사전이다. 잘 알다시피, 사전은 그 나라 지식문화의 결산이면서 집약이다. 그런 의미에서 3권까지 출간된 <우리말 철학사전>(지식산업사, 2001-3)은 다소 미흡하더라도 적극 격려되어야 한다(*2005년에 4권이 나왔다).

 

 

 

 

이번에 나온 건 <우리말 철학사전> 같은 공동작업의 소산이 아니라 개인 저작인데, 하나는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 - 철학>(산처럼)이고, 다른 하나는 이정우의 강의록인 <개념-뿌리들>(철학아카데미)이다. 박이문 선생의 48번째 책이라는 신간은(나는 그의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20권이 안될 거 같다), 아마도 저자의 장점이 가장 잘 발휘된 책인 듯싶다. 그 장점이란 건, 사유의 시작단계에서 마치 농부가 밭을 고르듯이, 개념들을 잘 정돈해 줌으로써 옆길로 새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 미리 방비해주는 것이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권할 만하지만, 그들이 이런 책의 재미를 음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김성곤 교수의 <사유의 열쇠 - 문학>은 올초에 나왔다).

이정우의 신간 역시 서양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뿌리(그리스철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음미해본다(*2004년에 2권이 나왔다). 사실 하이데거-가다머 라인의 철학이란 그러한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기'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이런 작업의 의의는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책들과 더불어서 사유의 기초가 되는 이 개념들과 그 번역의 문제에까지 일반의 관심이 확대/심화되기를 기대한다...

기타, 일본근대문학과 관련된 무게있는 저작들이 두어 권 더 나왔지만, 당장의 관심을 벗어나기에 제외한다. 전공인 분들의 '열렬한'소개가 더 나을 거 같기에...

2004.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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