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나남, 2006)의 제2권을 먼저 구입했다. 이전에 나온 국역본 <소통행위이론>(의암, 1995)도 갖고 있기에 제1권의 구입은 일단 미루어둔 것. 영역본도 갖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버텨보자는 생각이었고, 제2권을 먼저 읽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판단에서였다. 저자의 명성과는 다르게 막상 주저들이 번역/출간되면 본격적인 서평이 잘 나오지 않는 듯했는데(물론 내가 눈이 밝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며칠전 교수신문(06. 05. 03)에 홍윤기 교수의 서평이 게재되었길래 이 자리에 옮겨온다(홍교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의 철학>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다수의 관련논문을 갖고 있다). '워밍업' 차원에서 도움이 될 듯하기에. 서평의 제목은 '20세기 최후의 파우스튼적 지성의 지향점을 보며'이다.
-이 몇 년간 공사석을 막론하고 장춘익 교수를 보기가 어렵다는 얘기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 새로운 뉴스가 아니었다(*장춘익 교수가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역자이다). 생각해 보면 논문심사나 논평 같이 학계의 궂은 일을 본인이 마다한 적이 별로 없는데도 장 교수가 주는 그런 인상은 올초까지 내 마음 속에 깊이 어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장 교수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특한 내 나름의 마음 씀씀이는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장 교수의 은신과는 전혀 별도로 나는 나의 대학원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읽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하버마스의 논변윤리(Diskursethik)에 관한 1980년대의 문고판 책, 즉 <도덕의식과 의사소통적 행위>가 조야하나마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비록 1백여 쪽에 달하지만 보편화용론에 관한 1976년의 초기 논고를 영어본으로 읽게 하는 데까진 성공했어도 2권으로 된 독일어 원본 쪽수만 1천1백27쪽에 달하는 이 장광설을 무슨 수로, 하다못해 영어본으로라도 읽도록 해야 하지 않는냐 하는 부담은 명색이 선생으로서 넘어야 할 교육상의 난제로 근 7년간 마음을 짓눌러 온 부담이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체계와 생활세계의 식민지론’에 관한 부분만 예전에 일부 번역됐었고, 그 제1권은 전문이 완역되긴 했었다. 하지만 이 부분 번역자분들의 선구적 노고에도 불구하고 우선 한국어로 읽기가 어려워 이 책에 대한 거부감이 영원히 남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마음이 저리는 판이었다. 결국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여전히 교수로서 나의 교육역량을 계속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물론 직접 번역해 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을 독일어로 읽었던 유학시절의 악몽이 조건반사적으로 상기되면서 책갈피를 넘기는 손가락이 또 오그라드는 경련을 느끼곤 했다.
-그런 와중에 장 교수가 이 책을 완역했다는 소식을 좀 늦게 알게 됐다. 첫 번째 생각? 당연히 안도의 한숨이다. 내가 번역하지 않아도 되고, 또 장 교수 번역이라면 우리 친구들에게 한국어 저작처럼 읽게 할 수 있으리라. 그럼 두 번째 생각? 장 교수에 대한 고마움? 천만에! 간사한 것이 인간심리라고 두 번째로는 동학으로서 엄청난 질투심이 들었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하, 내가 왜 장 교수처럼 매일 마늘을 먹고 쑥대를 짚어보는 세월을 보내지 않았던고?! 이 번역상의 쾌거를 장 교수가 차지하다니.
-그리고 책을 실제 받아보았을 때, 그리고 그 번역 상태가 거의 ‘우리말’로 쓴 논술처럼 읽혀지면서, 하버마스 또는 여타 유명한 구미 철학자들의 번역본이 한국어로 읽히지 않았을 때 느꼈던 그 전공자로서의 알량한 안도감― 남의 결과물을 앞에 놓고 나도 이 정도는 하지 뭐 하는 바로 그런 옹졸함―을 이번에는 느낄 수 없었을 때, 같은 분야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느꼈을 그 상실감을 아마 교수 독자분은 공감해 주리라 믿는다.
-그 존립 방식에 있어서 19세기 이래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철학이 본질적으로 강단철학이 됐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철학을 체계적으로 ‘교육’받게 됐음을 뜻하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문제를 숙고하는 생각함의 절실한 고통’이 철학함의 중요한 과정으로 들어설 여지가 없어졌음을 뜻하기도 하다. 사실 칸트의 3대 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 및 <대논리학>, <철학강요>, 그리고 맑스의 <자본>은 그것을 ‘읽는 것’이 그들 저자가 생각한 ‘삶을 사는 것’이 되고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생각함이 삶이 되는 전 과정을 그대로 체현해 준다.
-독일 지성에는 분명히 앵글로-색슨 계통의 분석적 치밀함이나 라틴 계통의 발랄한 자기체험과는 구별되는, 파우스트적 성숙에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고문화가 약동한다는 특성이 있다. 이 파우스트적 자기성숙에의 집착은 프랑스적 계몽주의를 ‘내면화’시키는 데 엄청난 저력을 발휘하는데, 철학이 대거 강단철학이 되면서 그 장점은 도리어 거추장스러운 사변적 번문욕례가 돼버렸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내면적 계몽으로 추동되는 은밀한 정신과정이 거의 필요없게 되어가는 듯한 20세기 후반기에 합리성이라는 주제를 두고 맑스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선배에 이르는 그 좌절과 방황의 사고 행보를 지치지도 않게 1천 쪽이나 서술해 놓았다. 사실 ‘의사소통행위이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장 교수를 질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하버마스를 질투하던 그의 어떤 동료분 말처럼, A4 용지 딱 20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학원식 논술 대비 방식에 따르면 A4 한 장 안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을 딱 4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인간이 표출하는 의견과 행위는 합리적인 성질을 가질 수 있으며(이 때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성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현대 언어 철학은 이것을 의사소통과정에서 오가는 언어사용의 형식적 조건들 안에서 부인할 수 없이 보편타당한 것으로 확증할 수 있다는 것. (이 때 언어사용의 형식적 조건들이란 ‘말해지는 언어적 표현’의 이해가능성, ‘말해진 명제’의 진리성, ‘말하는 이’의 진실성, 그리고 ‘듣는 이에 대한 책임 있는 응답’을 가리킨다.)
2. 바로 이런 합리성 조건이 ‘개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안에 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이런 식의 합리성을 전면적으로 실현하지 못한 채 사회를 합리화하는 과정이 인간 삶을 物化시키는 과정으로 변질되어 왔다는 것.
3. 이 때 인간의 삶을 물건처럼 만든 가장 주된 원인은 합리성, 사실은 기능적 합리성의 명목 아래 인간의 삶을 기능체계로 분절시켜 그 안에다 부속시킨 사회체계의 메커니즘에 있으며 이에 따라 시민의 생활세계는 체계의 내부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
4. 그리고 ―이쯤 되면 하버마스가 당연히 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 쓴 필자의 용어를 슬쩍 끼워넣자면― 이런 ‘체계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생활세계의 해방 잠재력은 바로 이 생활세계의 의사소통과정에서 그냥 굴러다니는 타당성의 요구를 끊임없는 論辨(Diskurs), 즉 장 교수의 ―내가 보기에― 아주 부적절한 번역에 따르면 討議를 통해 체계에 제기해 그 지배력을 항상 잠식시켜 나가는 것뿐인데, 현대 들어 그런 과업은 아직 완결 내지 완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 책은 분명히 사회학의 문제 영역에서 사회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정해 놓은 철학적 사고의 구도를 숙지하지 못할 경우 단지 사회학적으로는 충분히 납득되지 못하는 명제들이 빈출한다. 우선 이 책은 루카치가 그 지평을 열었던 서구 맑시즘의 전통에서 정교하게 가다듬어졌던 ‘물화’ 개념을 쓰면서도 20세기 맑스주의적 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에서 빈번하게 거론하던 3가지 주제어, 즉 소외, 착취,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전혀 투입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이미 현대 사회체계의 정당성 기반을 묻는 하버마스의 준거점이 더 이상 정신분석학이나 정치경제학비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그는 영미사회학의 비조쯤 되는 탈코트 파슨스의 ‘체계’ 개념에서 기능 차원에 몰입해 사실상 간과 내지 배제시켰던 규범 차원을 체계의 한 요인으로 복구시켰다. 다시 말해 어떤 체계적 기능도 정당성 차원의 이의제기를 우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나의 이 기고만장한 요약만 보고 <의사소통행위이론>, 그것도 이 국역본을 직접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기반사회를 향해 질주하는 21세기에 철학적으로 낙오한다는 것을 뜻한다. 초월자에 기대어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고집할 수 없다는 ‘신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이 확인한 20세기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 책은 인간이 여전히 파우스트적 자기성숙을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과 씨름하면서 번역투의 짜증스러움을 벗어나는 것이 보장되는 대신 ‘담화행위’(Sprechakt) 같은 보다 친숙한 낱말이 있음에도 ‘화행’ 같은 요상한 번역어를 투입한 역자의 자잘한 부적절성을 독자가 여러군데서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본다면 번역자에 대한 필자의 질투심이 독자에게도 통했다는 알량한 옹졸함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하버마스는 언어학의 용어들을 많이 가져오는데, '화행' '화행론'은 일차적으로 국내 언어학계에서 관례적으로 쓰는 용어이다. 그것이 '자잘한 부적절성'을 증거하는지는 모르겠다. '즐거움'?).
06. 05.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