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주간 제법 많은 책들이 나왔다(*이 글은 2003년 2월말에 씌어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의미있어 보이는 책들을 간략하게 적어보기로 한다. 먼저, 가장 반가웠던 책은(여기서 반갑다는 말은 언제쯤 책이 나올까 고대했었다는 뜻) 마르트 로베르의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동문선)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문학과지성사, 1999)의 저자이며, 그의 책으론 프로이트 해설서인 <정신분석혁명>(문예출판사, 2000)도 이미 번역돼 있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신분석쪽 비평가의 한 사람인데, 사실 그의 주저는 카프카론이라고 한다. 이번에 나온 <고독>은 생각보다는 얇은 분량인데(물론 값은 비싸다) 어쨌든 카프카론의 구색을 맞출 수 있는 비중있는 저작이 번역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역자는 지난번에 소개한 <번영의 비참>의 역자이다(역자후기까지 달고 있는 걸 보면 애를 쓴 번역임에는 틀림없지만, 사실 100% 신뢰하기는 좀 어렵다). 아직 이 책은 일간지 북리뷰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카프카의 책으론 한국카프카학회에서 펴내는 전집의 한권으로 <실종자>(솔)도 얼마전에 출가됐다. 흔히 <심판/실종자>로 묶여서 나오는 소설인데, 나는 카프카가 임시로 붙여두었다는 '실종자'란 제목보다는 사실 (막스 브로트가 붙였다던가) '아메리카'란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작품을 완성했다면, 카프카 자신도 다른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제멋대로 추측해본다. 참고로, 솔출판사판 전집은 10권으로 기획돼 있으면 현재까지 4권이 나왔다(*이 전집은 2006년 현재까지 7권이 나온 것으로 안다).

 

 

 

 

또 일간지 북리뷰에서는 누락되었지만, 눈에 띄는 번역서는 폴 리쾨르의 <해석학과 인문사회과학>(서광사)이다. 리쾨르는 가다머와 함께 20세기 해석학을 양분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개인적으론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과 리쾨르의 <살아있는 은유>(미번역)의 번역스터디에 참여한 바 있어서(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1/3쯤에서 중단되었지만) 이들의 영역본 책들을 여러 권 가지고 있는데, 신간 또한 오래전에 제본해 두었던 책이다(책은 리쾨르 저작의 영어본 논문선집쯤 된다). 리쾨르의 경우는 번역본이 꽤 나온 셈이기 때문에(현재 8권 가량 번역됨) 너댓 권 정도만 더 번역되면 주저들은 거의 다 한국어본을 얻게 된다.

하지만 역시나 한국에서의 리쾨르학은 미진하다. 한국해석학회에서 특집으로 두어 차례 다룬 적이 있지만, 인문학 전반을 망라하는 리쾨르를 따라잡기란 아직은 요원하지 않나 싶다. 작년에 나온 정기철의 <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문예출판사)가 단행본 연구서로는 유일한데,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조금 들춰보고는 다시 반납했다. 전공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이 한손에 꼽을 정도는 되지만, 기대에는 못미치는 수준. 리쾨르의 신간 때문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작년에 <역사와 진리>(솔로몬)가 소리소문없이 번역돼 나왔었다. 리쾨르의 비교적 초기 저작인데, 번역에 무슨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이런 경우 책주문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진다(*알다시피, 리쾨르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사이에 <시간과 이야기>가 완역되었고, 프랑스와 도스의 전기 <폴 리쾨르>가 출간되었으며, 전공자인 윤성우 교수의 연구서/해설서도 선을 보였다. 사정은 분명 좋아졌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고미즈미 요시유키의 <들뢰즈의 생명철학>(동녘)이 이정우의 번역으로 나왔다. 200쪽 정도의 가벼운 분량의 입문서. 그래도 뭔가 장점이 있으니까 번역하지 않았을까 싶다. 들뢰즈 역시 <차이와 반복>과 <주름> 정도만 번역되면 대부분의 주저가 다 번역되게 된다. 여러 열성'분자'들 때문에 그래도 들뢰즈학의 사정은 다른 인문학에 비해 나은 편. <노마디즘>을 필두로 우리 저자들의 들뢰즈 해석/이해가 속속 출간되기를 기대한다(*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주목하는 또다른 번역서로 키스 안셀-피어슨의 <싹트는 생명>이 작년에 출간된 바 있다).

 

 

 

 

허버트 드레퓌스의 <인터넷상에서>(동문선)가 번역돼 나왔다(*'행동하는 지성' 시리즈의 이 책은 <인터넷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처럼). 눈에 띄는 건 책이 아니라 저자이다. 드레퓌스는 유명한 푸코 연구서인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의 공저자이다. 물론 우리말 번역은 좀 신통찮지만, 그 책은 손가락에 꼽히는 푸코 연구서이다. 나는 그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연구서인 <세계-내-존재>를 갖고 있기도 한데, 작년인가 그의 두 권짜리 논문선집이 나오기도 했다. 번역된 신간의 그의 다방면에 걸친 관심을 보여주는 듯하다(이런 책은 누가 먼저 읽고 서평을 써주었으면 싶다).



 

 

 

국내 저자의 책으로 넘어가서 제일 먼저 손에 꼽고 싶은 책은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경험과 기억>(당대)이다. 이번에 정년을 맞은 지식인 세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저자는 '종교-종교들-종교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틀을 제시하면서 그 중 '종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통해 종교학을 확장/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종교'라는 말보다는 '종교문화'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덕분에 그의 책은 고리타분한 종교학 개설서와는 좀 거리가 멀다. 참고로, 추천할 만한 정진홍 교수의 책으로는 먼저 종교학 입문서로서 <종교문화의 이해>(청년사, 1995)가 있고, 조금 무게있는 책으론 <종교문화의 논리>(서울대출판부, 2000)가 있다. 좀 가벼운 책으론 종교문화여행기인 <신을 찾아 인간을 찾아>(집문당, 1994)를 권한다.

 

 

 



젊은 사학자 김영두가 옮긴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와 신명직이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현실문화연구)는 지난 두주 동안 일간지 북리뷰의 1면을 장식했던 책들이고,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전자의 경우엔 출판사측도 놀랄 정도로 많이 팔려 나가고 있다 한다. 공들여 만든 책들이 잘 팔린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문화를 두텁게 만드는 일이다. 이 두 책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또 하나 <한겨레21>에 박노자와 함께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역사학자 한홍구의 <대한민국사>(한겨레신문사)가 나왔다(*작년에 제3권이 출간되면서 완간되었다). 고등학생들의 필독서로 읽혔으면 싶다. 그리고 모처럼 소설 한권을 덧붙인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경성라인)이 번역돼 나왔다. 번역 수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개츠비>와 더불어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러시아문학 연구서 한권. 골룹꼬프의 <러시아 현대문학과 잃어버린 대안>(부산외대출판부)이 번역돼 나왔다. 어떤 계열의 책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러시아문학쪽 저작은 워낙 드물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있어서 소개한다.(*고룹꼬프는 모스크바대학 교수이며 얼마전에는 <러시아 현대문학: 분열 이후의 새로운 모색>(역락, 2006)도 출간되었다. 개인적인 안면은 없지만, 비교적 젊고 건장한 외모의 골룹꼬프 교수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새로운 문고본 기획으로 열림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 시리즈가 나오고 있다. 한국문학의 문제작들은 자세히 읽는다는 취지인데, 이남호의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와 김인환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는다> 등이 1차분으로 나왔다. 이러한 기획 자체에 대해서 대단히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120-30쪽 분량의 책에 자세한 연구서지 목록이 들어가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세상 시리즈에서처럼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문헌만을 필자가 가려서 싣는 것이 오히려 요긴하고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여간에 그래서 책은 고등학생이나 일반인이 읽기에는 좀 버거운 형식의 것이 돼 버렸다.

어쨌거나 이런 기획을 계기로 이런저런 지도비평보다는 '작품읽기'의 전범이 될 만한 비평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류의 책들은 필자의 '작품읽기' 수준(본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만큼 모험적이기도 한데, 그런 모험들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교양은 좀더 풍성해질 수 있다.(*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는 나오다 말았다.) 

끝으로, 계간지 소식. <문학과사회> 봄호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특집이 실렸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청준 문학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지만(적어도 아직까지는) 그의 문학에 관심있는 이들은 필독하시길...

AS(1): 지난번에 소개한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한 나날들>은 확인해본 결과 2002년에 나온 안나의 회고록을 옮긴 것인데, 12개의 장으로 구성된 것으로 봐서 72년에 나온 2판과 동일한 판본이 아닌가 싶다.

AS(2): 역시나 지난번에 소개한 과학서 가운데 <루시의 유산>은 번역이 좋지 않다고 한다. 이 점은 지난주 중앙일보 북리뷰에서 지적된 것인데(이러한 '죽비'가 많아져야 한다!), 참고로 여기에 옮겨둔다. 우리는 정말 두눈 부릅뜨고 책을 읽어야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번역에 대한 감시는 소비자 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근래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는 곳이 교양 과학서 시장이다. 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 분야는 인기가 높다. 하지만 부실한 번역으로 원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문제다. 대표적인 예로는 <붉은 여왕>(김영사, 김윤택 옮김)과 <루시의 유산>(한나, 한상희·윤지혜 옮김)을 꼽을 수 있다. 외국에서는 `명쾌하고 논리적인 명저`로 이름을 떨친 책들이다. 하지만 번역판은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와 요령부득의 표현이 가득하다.

-우선 지난해 출간된 <붉은 여왕>을 보자. 가장 큰 문제는 원서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한 대목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71쪽을 보자. "…그후 진행의 4분의 3을 이 과정에 쓴다"는 표현이 나온다. 원문은 "…and then dispose of three quaters of the proceeds." 따라서 "결과의 4분의 3을 버린다"는 뜻이다. 저자의 원래 논지는 이렇다. "세포가 난자를 만들 때는 감수분열을 해 자기 염색체의 절반만을 전달한다. 그런데 감수분열 직전에 염색체수를 두배로 늘린다. 그리고는 원래 염색체의 절반만 난자에 집어넣는다. 굳이 두배로 늘린 다음 결과의 4분의3을 버리는 건 낭비가 아닌가?" 하지만 "버린다"를 "쓴다"로 반대로 옮긴 결과 전체 문맥의 의미가 통하지 않게 돼버렸다.

-1백34쪽의 "훨씬 더 중대한 차이는 어머니로부터만 오는 유전자가 훨씬 적다는 것이다"도 마찬가지. 원문은 "A much more significant difference is that there are a few genes that come only from the mother". 그 뜻은 "어머니로부터만 오는 소수의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다. 저자는 이어서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 유전자가 두가지 성별이 생기게 된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존재한다"를 "훨씬 적다"로 옮긴 탓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이 돼버렸다. 이같은 오역과 혼란은 번역본 도처에서 발견된다. <붉은 여왕>은 이른 시일 내에 개정판을 내는 것이 원저자에 대한 예의이자 독자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한편 이달에 나온 신간 <루시의 유산>은 <붉은 여왕>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오역이 많다. 원저는 1999년 미국 출판협회의 전문학술 저작상을 받은 명저다. 하지만 한국어판은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암호책 같은 인상을 준다. "성은 아마도 두개의 연결된 세포에서 나온 핵물질이 함께 살아 남았을 때 육식성이 불완전해지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61쪽) 여기서 '육식성'이 무엇인지 설명이 없다. "유기체의 모든 계통은 자손을 키우는데 암컷만큼 노력하는 수컷이 있는 종을 칭찬한다. 역사적인 각주로서, 우리의 이름인 포유동물, 유방을 가진 생명체도 역시 불가피했다."(91쪽)

-그뿐이 아니다. 저명한 학자의 이름도 엉터리다. 책에는 '토마스 말투스'란 이름이 되풀이해서 등장한다. 알고보니 그는 '인구론'의 저자인 토머스 맬서스였다. 결론적으로 <루시의 유산>은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야 할 책이다. 물론 독자들에게는 리콜을 해줘야 할 것이다. 명저의 한국어 저작권을 독점한 출판사는 한국의 과학 대중에 대해 지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조현욱 기자)

2003.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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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3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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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3 0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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