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이 글은 2003년의 2월 중순에 쓴 것이다) 일간지 북리뷰란 두 곳에서 지난번에 소개한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가 1면에 올랐다. 바로 한겨레와 조선일보에서. 언젠가 이진경의 <노마드>도 두 일간지는 1면에 올렸었는데, 책을 보는 안목이 비슷한 것인지?

조선일보의 경우는 유독 학술적 유행에 민감하다. 동인문학상을 접수한 경우와 마찬가지일 텐데, 학술/사상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인 듯싶다. 들뢰즈나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크게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학술적 권위(명성)을 조선일보와 동일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얼마전 쿤데라님이 소위 '수집주의'에 대해 비판한 바 있는데, 실상 그 수집주의의 심리적 메커니즘에도 그러한 동일시에의 욕망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일상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유명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그 욕망은 야콥슨/라캉의 용어를 빌면, 환유적이다.(그리고 물론 그 욕망은 성취되지 않는다! 라캉의 공식이 보여주듯이.)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것은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왕>(동문선)이다(*연극과인간 버전도 조금 나중에 출간됐다). 나는 이 작품을 오래전에 밀란 슬라덱의 마임 공연으로 먼저 본 적이 있다. 예술의 전당에 공연을 보러 갔는데, 슬라덱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의 공연 비디오를 대신 보게 된 것. 그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이, 바로 원조 부조리극쯤에 해당하는 <위뷔왕>이었다(그때는 '우부대왕'쯤으로 이해했다). 그러다가 작년인가 마침 영역본을 구할 수 있었고, 이번에 우리말 번역이 나왔으니 이제 시간을 내서 즐기는 일만 남았다.

내가 알기에 <위뷔왕>의 초연은 굉장한 스캔들이었고, 이후에 자리는 위비왕 연작을 썼는데, 번역본의 분량으로 봐선 한 작품만이 번역된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감상과 함께 다루기로 하겠다. 참고로, 자리와 <위뷔왕>에 대해서는 신현숙의 <20세기 프랑스 연극>(문학과지성사, 1997)이 요긴하다.

 



 

 

<위뷔왕>과 함께 동문선에서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이 번역돼 나왔다. 마찬가지로 얇은 분량에 비싼 책값이다. 들뢰즈와의 공저들을 뺀 가타리만의 책으론 <분자혁명>(푸른숲, 1998)이 있지만,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이 책은 조만간 구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 돈들어갈 구멍은 막을 수가 없다!). 때문에 이 신간에 대해서도 뭐라 말할 수 없다. 누군가 그의 작업에 대해서 리뷰를 해주었으면 싶다. 참고로,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최명관 역, 민음사)는 김재인의 새번역으로 다시 출간된다고 한다(<안티 오이디푸스>로). 시기는 올연말쯤이고 출판사는 같은 민음사이다(*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번역의 오류들이 개선되고 더 좋은 번역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러한 노력이 일부 저자나 책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나 도스토예프스카야(1846-1918)의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한 나날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두번째 아내인 속기사 안나의 회고록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러시아초판은 1925년에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인 L. 그로스만의 편집으로 나왔고(800쪽 정도 분량) 2판은 더 축약된 형태로 1972년에 튜니마노프 등의 편집으로 나왔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우리말 번역은 이 2판을 토대로 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영역본은 1975년에 B. 스틸만의 편역으로 나왔고, 이 책을 옮긴 것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문음사, 1986)이다. 분량으로는 <나날들>이 <아내>의 2배 가량 된다.(*러시아어본을 나는 재작년에 모스크바에서 구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문고)이 번역돼 나왔다. 듀이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은 1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문고본은 처음 3개 장만을 번역해 싣고 있다. 문고본 분량 때문인 것 같은데, 좀 유감스러운 일이다. 듀이 관련 연구서들은 역자가 더 읽을 만한 책 목록에서 소개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거기에 빠진 것이 이 책의 완역본이 이미 나왔었다는 사실인데, <예술론>(희성출판사, 1986초판, 1990재판)이 그것이다. 이 책을 서점에서 샀는지 헌책방에서 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책장에서 먼지묻은 책을 꺼내 새로 나온 번역본과 잠시 비교해 보았다(물론 새 번역의 가독성이 더 좋은 편이다).

교육철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은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교육과학사, 1996)도 이미 번역돼 있다(580쪽 분량의 두툼한 책이다). 하지만 역시나 전체적으론 소략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듀이 철학에 대한 업그레이드된 해석은 신실용주의를 제창하는 리처드 로티의 여러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로티의 듀이 다시 읽기는 라캉의 프로이트 다시 읽기에 비유될 수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1843-1941)의 <황금가지>(한겨레신문사)가 다시 번역돼 나왔다. 물론 축약본이지만,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래도 절판된 삼성출판사판을 대신해서 <황금가지>의 우리말 표준번역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듯하다. 물론 여기에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까치글방, 2001)가 곁들여져야 구색이 맞는다.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를 읽으며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는데, 그나마 아직까지 이 분야에 무관심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리스신화 열풍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권도 사지 않은 때문. 최근 중국신화까지 가세하고 있는 형편인데, 신화 혹은 신화론에 관심을 두려는 독자는 먼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참고로 아주 극소수의 한국 신화 관련 서적 중에 표준적인 것은 서대석의 <한국의 신화>(집문당, 1997)이다.

 

 

 



끝으로 자연과학서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은 '인류의 성과 지능의 진화'라는 부제를 단 앨리슨 졸리의 <루시의 유산>(하나번역출판)이다. 저자는 국제 영장류 동물학회장을 역임한 진화생물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500쪽이 넘는 분량이 나로선 아직 부담스럽다(물론 나는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한권을 고르라면, <루시의 유산>과 접전을 벌이다 떨어질 만한 책이 하워드 블룸의 <집단정신의 진화>(파스칼북스)이다. 450쪽이 넘는 이 책은 한마디로 '개체 선택주의'나 '유전자 선택주의'에 맞서서 '집단 선택주의'를 기초로 한 진화론을 주장하는 책이다. 저자의 경력이나 주장으로 봐서 '신과학'류의 책이 아닐까 의심이 갔는데, 저명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추천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사이비는 아는 듯싶다. 같은 저자의 <루시퍼 원리>(파스칼북스)도 번역돼 있다. 하지만 나로선 이 두 과학서를 읽을 만한 여력이 당분간은 없을 것 같다...

 

 

 



덧붙임: 새로 나온 시집 두 권을 적어둔다. 먼저, 황동규의 신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0년에 나온 <버클리풍의 사랑노래>에 이어 딱 3년만에 나온 셈. 사적인 인연이 겹쳐서 황동규의 거의 대부분의 시집을 사서 읽었지만(하지만/때문에 그의 전집은 안 갖고 있다!), 나는 그의 초기시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김춘수의 평에 의하면, 황동규는 당대의 테크니샹이다. 그러니까 기교파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노년(?)의 그의 시들은 자못 인생파적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시적 어법(기교상으로 그의 시의 핵심은 긴장tension이다)은 여전하지만, 선불교를 연상시키는 그 '인생파적' 깨달음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나왔으니까 사두어야겠다.

어제 문화일보를 보고 안 것인데, '노가다 시인' 김신용의 <버려진 사람들>(천년의 시작)이 다시 나왔다. 공사장 품팔이를 하다가 우연하게 등단하게 된 그의 데뷔작인데, 1988년에 고려원에서 나왔다가 한달만에 절판된 시집. 한창 시집들을 많이 사던 때였고 서점에서 본 기억도 있지만, 그때는 사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의 두번째 시집인 듯싶은 <개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만을 갖고 있다. 박노해나 백무산이 정통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 분류된다면, 김신용은 룸펜 프롤레타리아 시인쯤 될까? 마치 초기 고리키의 경우처럼. 요즘은 드물어진 시적 정서와 만날 수 있을 듯싶다. 혹은 88년 여름 거의 매일같이 바닷가 백사장을 헤매던 청춘의 한 페이지와도...

2003. 02.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