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자 한국일보(06. 05. 04)에 서경식(1951- ) 도쿄경제대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렇게만 말해도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만, 보다 친철하게 말하자면 <나의 서양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기행> 등의 책을 쓴, 가장 최근에는 <난민과 국민 사이>를 쓴 저자 서경식을 말한다(그의 불행했던 가족사에 대해서는 굳이 더 적지 않는다).
내가 처음 읽은, 그리고 유일하게 읽은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이지만(벌써 14년전이다. 이 책은 이후 200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지속적인 관심은 유지하고 있었더랬다. 얼마전에는 <난민과 국민 사이>(돌베개, 2006)를 '최근에 나온 책들'에 올려놓기도 했는데, 방학때쯤 읽을 짬을 내볼까 생각중이다. 이 인터뷰는 그 '워밍업'으로 적합해 보인다.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아스포라(diaspora). 원래는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흩어져 사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켰던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자기가 속했던 공동체를 떠나도록 강요된 사람 모두를 가리킨다. 굳이 우리 말로 바꾸면 ‘역사적 이산 민족’에 해당한다.
-재일동포 2세인 서경식(55) 도쿄경제대학 교수. 그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재일동포 문제에 천착해온 사람이다. 올초 발간된 <디아스포라 기행>이나 최근 나온 <난민과 국민 사이> 모두 그의 일생의 주제인 ‘디아스포라’에 닿아 있다. 하인스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 외국인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그를 만나 우리의 관심권 밖에 있는 재일동포 문제에 관한 의견 등을 들어보았다.
-그렇게 오고싶어 했던 한국에 오셨는데, 어떤 활동을 하실 생각입니까.(그는 성공회대 연구교수 자격으로 4월초 한국에 왔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한국인의 사고와 생활방식,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어요. 제 나이 벌써 50대 중반이니, 앞으로 내 조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 기회도 없을 겁니다. 저를 포함한 재일조선인(그는 재일동포 대신 재일조선인이라고 표현했다) 2, 3세는 대부분 따로 한국어를 배우지 못해 한국어가 서툰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익히고 싶습니다. 제가 책을 몇 권 냈지만 모두 일본어로 썼어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한국에 번역됐는데, 그러자니 뜻이 제대로 전달되는 건지 저도 궁금하고 좀 답답했습니다.”
-한국에 온 뒤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사실 제법 고생 좀 했습니다. 국적은 분명 한국인데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이유로 휴대폰 계약조차 힘들었어요. 게다가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일본이 발행한 외국인등록증명서를 요구했습니다. 이 증명서는 재일외국인 통제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과거 한국 정부가 일본측에 폐지를 요구했던 겁니다. 그런데도 그런 증명서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한국 국적의 재외국민을 통제의 대상, 관리의 대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제 한국어 발음이 좀 어눌해서 그런지 저를 좀 자연스럽게 대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불편은 어느 사회나 있는 것이므로 저는 이 역시 우리 조국에서 하는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 교수에게 조국은 어떤 존재입니까.
“일본에서 저는 국가가 없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국가란 국민에게 의무를 지우기도 하지만 반대로 국민을 보호하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 같은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물론 귀화를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귀화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거부한 것입니다. 차별과 멸시가 심하면 심할수록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 밀려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제가 말한 조국은 국가 기구가 아니라 사람과 문화를 일컫는 겁니다.”
-조국의 분단은 재일동포에게도 부담이 될 것 같은 데요.
“그렇습니다. 제 할아버지가 충청도 지방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1928년입니다. 살만 했다면 낯선 곳으로 갔겠습니까. 저희 집안 뿐 아니라 일제시대에 200만명 이상이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갔습니다. 현재의 재일조선인 대다수는 그때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해방이 되고 남북의 단독 정부 수립,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되지만 재일조선인 사회는 한동안 분단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친척이나 친구가 민단 소속도 있고, 조총련 소속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6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 사회도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남북이 통일을 이룬다면 우리 재일조선인들도 자유롭게 한반도의 남과 북을 오가며 조국을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비해 지위가 많이 올라간 것 아닙니까.
“전에는 공무원, 교수, 변호사, 대기업 직원 등은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좋은 직업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극심한 가난을 겪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회 관습적으로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인과 결혼하려면 부모가 말리는 일이 많았고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따돌림이 심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요. 제한적으로나마 공무원이 될 수 있고 건강보험과 연금에도 가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타성은 아직도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인에게 재일조선인은, 식민지배와 이에 따른 남북 분단 등 그다지 직시하고 싶지 않은 자신들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껄끄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일조선인 1세는 거의 없으며 2, 3세가 80~90%입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밖에 모릅니다. 우리 말도 잘 못하지요.”
-일본내 한류 바람과 독도 문제가 재일동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한류가 한국과 일본의 상호 이해에는 도움을 줄지 몰라도 재일조선인의 삶에는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독도는 일본이 권리를 주장하면 안 되는 곳입니다.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두 나라가 마찰을 빚을 때마다 살기가 어려워 집니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경제 통계를 인용하면서 일제 때 고도성장이 이뤄졌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또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수치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수치가 보여주지 못하는 생생한 개인의 체험이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제 때 일본으로 200만명 이상이 건너가 이 가운데 150만명 정도가 해방 후 귀국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를 포함한 많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태어났고 차별 속에서 자랐습니다. 만주로도 100만명 이상이 나갔습니다. 그들이 만주에서 얼마나 어렵게 농지를 일구었는지는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시 한국 인구의 6분의 1 정도가 딴 나라로 떠돌았습니다. 일제 하의 한국이 그만큼 먹고 살기 어려웠다는 것이지요.”
-문화 예술 전반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문학과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게다가 60, 70년대에는 차별 때문에 재일조선인이 직업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진입이 자유로운 문학, 미술 등을 많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소설가도 꿈꿨고 그림과 영화도 동경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의 문화계, 체육계에 재일조선인이 많은 것도 저와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저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국내에서도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미술은 따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까.
“학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차별 많은 일본에서 현실 문제를 잊고 그림을 감상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지고 사심없이 작품과 대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일보가 5월20일부터 피카소 작품전을 한다고 하는데요, 저는 피카소 그림에 매료돼 22년 전 일본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건너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전시된 ‘게르니카’를 직접 보겠다는 일념으로요. 직접 본 ‘게르니카’는 책이나 화첩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주었습니다. 프랑코 정부에 맞서 싸우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야만 했던 피카소가 저의 관심 영역의 하나인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에 더 각별한지도 모르겠습니다.”(대담=박광희기자)

06. 05.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