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도 책은 나온다. 이주에 나온 신간들은 아직 발행년도에 2002라고 돼 있는 것들이 많지만. 지난번에 소개한 책들 이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끌었던 몇 권의 책을 여기에 소개한다.(*이 글은 2003년 1월에 씌어졌다.)

 

 

 



해가 바뀌기 전에 나온 책이지만, 니진스키의 일기 <영혼의 절규>(푸른숲)는 나에겐 2002년의 책이다. 나는 문예출판사에선가 나온 같은 역자의 발췌번역본을 복사해서 갖고 있는데, 이번에 완역본이 나온 것. 물론 아직 읽기 시작하진 않았지만, 책의 만듦새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한다.(*나중에 리뷰를 올렸고, 2004년 러시아에 가서는 러시아어본도 구했다). 아래 사진은 1916년, 딸을 안고 있는 니진스키.

사실 그의 발레나 '발레 뤼스'(세기초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러시아발레단. 불어로 '러시아 발레'란 뜻)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문제삼는 건, 무용가 니진스키가 아니라 '작가' 니진스키이기 때문이다.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글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그의 언어는 간결하면서도 절묘하다. 거기엔 눈물어린 진실과 인간적 의지가 강하게 배여 있다. 누군가 러시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이 책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과 함께 권하겠다. 그것은 누군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이 책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쓴 탓에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동문선에서 나온 홍성민 편의 <문화와 계급>. 제목만으로 부르디외를 떠올렸다면, 당신의 인문학 교양도 어지간한 편이다. 이전에 현택수가 편한 <문화와 권력>(나남, 1998)이 나온 바 있는데, 한국 학자들의 부르디외 이해를 보여주는 일종의 소개서였다. 이번의 책 <문화와 계급>은 보다 진전된 '적용'을 보여준다.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주목하는 이는 연대에서 박사논문을 쓴 장미혜씨이다. 그녀는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란 부르디외적 문제틀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쓴 바 있다. 이전에 신문기사에서 보고 퍽 궁금해 했었는데, 책 목록에 그녀의 논문이 포함돼 있다.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무의식의 시학>(인간사랑, 2002)이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김종주 부녀인데(그래서 번역에 대한 신뢰는 좀 떨어진다), 내가 분석하고 싶었던 두 작품, <하녀 볼기치기>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기에 부득불 비싼 값의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책은 현재 오고 있는 중이다). 라이트는 얼마전에 작고한 저명한 정신분석 비평가이며 우리말로도 몇 권의 책이 번역돼 있다. 특히 절판된 <정신분석비평>(문예출판사)는 원저가 증보개정판을 냈을 정도로 성가가 있었다.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신문화사, 1997)도 그녀의 책이다. 덧붙여 말하면, 장 라플랑슈의 <정신분석의 새로운 기반>(인간사랑)도 김종주의 번역으로 나왔다. 라플랑슈 역시 라캉 정신분석학 사전(<정신분석의 언어>이던가?)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정신분석의이다(*이 사전은 작년 2005에 <정신분석사전>으로 번역돼 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번역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떨어진다(누가 확인해 주었으면)...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버마스의 신간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나남)도 번역돼 나왔다. 우생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비교적 얇은 책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그의 주저들은 언제 (재)번역돼 나오는 것인지 나는 그게 더 궁금하다. 이전에 언급했던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의 경우도 마찬가지. 한국해석학회에서 열심히 학회지도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일은 빼먹고 있다. 번역을 안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설마 번역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알다시피, 하버마스의 주저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올해 번역서가 나왔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딜타이의 <체험, 표현, 이해>(책세상)도 이한우의 번역으로 나왔다. 얇은 책이지만, 해석학 입문서로서 요긴할 듯싶다. 부록으로 해석학에 대한 국내문헌 해제가 붙어 있다. 역자는 하이데거를 전공하고 가다머 연구서 등을 번역했으며 현재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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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이 드디어(!) 번역돼 나왔다. 메를로-퐁티 연구자가 몇 명 되기 때문에, 그리고 철학아카데미 같은 데선 강의도 계속 열리고 있기 때문에, 예감은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뜻밖이다. 조광제에 의하면 영역본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데, 국역본은 어느 정도 기대에 부응할지 궁금하다(*그에 따르면 국역본도 오역이 적지 않다). 먼저 읽으시는 분이 있다면 소감을 적어주시길 바란다. 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이정우의 서평은 개략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어서 정확한 '맛'의 감을 잡기가 어렵다. 번역서의 경우는 우리말 번역서를 대상으로 서평을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서평자들이 원서의 의의와 가치를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 역시나 감을 못잡은 경우들이다(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그리고 사서는 읽지 않을 책 한권. <분별없는 열정: 20세기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미토)이란 책이 번역돼 나왔는데, 소칼의 <지적 사기>가 주로 잘나가는 철학자들의 논리와 개념의 남용을 문제삼은 데 비해 <열정>은 그들의 위험한 역사/정치의식을 비판한단다. 하이데거, 슈미트, 벤야민, 코제브, 푸코, 데리다 등 6명이 비판의 표적인데, 고작 250쪽 정도의 분량을 가지고 이들과 대적하고자 하는 오만 혹은 만용도 가상하지만, 동아일보의 서평대로라면, "마르크스주의에 호의를 보인다는 이유로 나치 협력자와 동일시"하는 빈곤한 논리로는 그만한 분량도 벅차지 않았을까 싶다. 대중의 지식인 혐오증에 편승해서 책이나 팔아보려는 심사가 아니라면 별로 의미없어 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이걸 동아일보는 톱으로 다루면서, "'20세기 폭력' 그 이면엔 지식인들이..."라는 폭로성 타이틀까지 붙여놨다. 물론 내용은 '아니면 말고'이다. 원래 의심스러웠던 기자들의 양식이 한번 더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사실 <전체주의의 기원>의 저자 한나 아렌트 역시 하이데거의 의심스러운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지 않지만, 그녀의 사상이 얼마나 하이데거에게 빚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인간의 조건>(1958)은 명백히 <존재와 시간>(1927)을 의식하고 씌어진, 그와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씌어진 책이다(그 대결은 장관이다!).

 

 

 



끝으로, 미셀 투르니에 연구서가 (내가 알기엔) 국내에서 최초로 나왔다. 이용주의 <소설과 신화>(동문선)이 그것이다. 나로선 당장에 읽을 짬이 없지만, 투르니에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될 듯하다. 물론 책값은 비싸다...

2003.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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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 0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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