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각 일간지 서평담당자의 책상에는 200-300권의 신간이 올라온다고 한다. 그 중에서 지면에 단평이라도 오르는 책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코 모레티가 문학사의 비유로 든 '도살장'의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름하여 '도서 도살장'이라고나 할까? '최근에 나온 책들'이란 걸 연재(?)하면서, 나도 덩달아 그 도살업자 대열에 끼게 된 것 같아 우쭐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우쭐하다는 것은, 내가 평가/판단의 주체이기 때문이다(권력은 그렇게 영혼을 잠식한다!).

 

 

 



하여간에 책들은 쏟아져나온다. 출판평론가라면 지난주에 두어 일간지 프런트에 오른 이태원의 <현산어보를 찾아서>(청어람미디어) 같은 책에 눈길을 주어 마땅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현산어보>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를 다시 번역하고 그것을 오늘의 관점에서 보완하고 있는 책이라는데, 몇몇 서평을 읽은 감으로는 '올해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한 30대 고교 생물교사가 그 저자라는 것도 놀랍고, 7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는 그 노력도 경탄스럽다. 물론 그런 저자를 발굴하고 책으로 만들어낸 기획력도 치하할 만하다. 5권짜리 중 3권이 먼저 출간되었고, 2권은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 어찌됐든 장서용으로 꽂아둘 만하다(*책은 2003년 11월에 완간되었다). 하지만 이 물고기책들을 사들고 가는 건 나에겐 아직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돈벼락을 맞기 전까지는...

 

 

 

 

두어 주쯤 됐지만,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울력)이다.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건,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1998)이란 책에서인데, 거기서 소개된 프랑스 사상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이름이었다(국내에 번역된 책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바로 그 클라스트르의 이름을 일간지에 신간소개도 나기 전에 교보의 신간코너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반갑고 신기했다. 물론 바로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나는 가급적 인터넷 할인서점을 이용한다), 곧바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 진중권이 <폭력과 상스러움>이라고 패러디한 책이다)과 같이 읽을 책의 목록에 올렸다. 나에게 클라스트르는 지라르의 짝패인데,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는 읽어본 다음에 말하도록 하겠다(<폭력의 고고학>은 현재 주문중이다).(*책은 바로 샀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클라스트르의 책으론 작년에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마저 출간됐다. 이건 구입했던가? 대신에 <폭력과 상스러움>을 다 읽은 기억이 있다.)

  

 

 



<폭력의 고고학>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언급되었을 책은 <카프카의 편지>(솔출판사)이다. 990쪽의 만만찮은 분량인데(*2004년에 후속으로나온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더 두껍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언제나 번역되나 고대하던 참이었다. 올해 나온 편지로는 서중식의 <옥중서한>(야간비행)과 쌍벽을 이룰 만하다. 그 책도 831쪽짜리이다.

 

 

 

 

카프카의 편지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문학과지성사, 1999) 덕분이다(*국역본은 3종이 나와 있다). 언젠가 서평에서도 썼지만, 그 편지들에는 카프카 문학의 비밀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아니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의 편지들을 찾았는데, 영역본으로는 두꺼운 펭귄북이 있었다. 하지만, 펭귄북을 제본한다는 게 얼마나 속쓰린 일인가 하는 건 아는 사람은 안다! 그래서, 다 읽을 수도 없고, 제본할 수도 없이 망설이다가 그냥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책이 나온 것.

책을 자세히 뒤적거리진 못했는데, 카프카는 약혼녀인 펠리체 바우어 말고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들도 포함돼 있는지 모르겠다. 빠져 있다면 그마저 번역돼야 할 테고, 더불어 그의 방대한 일기들도 번역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카프카 전집이 언제 완간될지는 모르겠지만(한국카프카학회원들도 모를 것이다) 완간의 그날까지 다들 좀더 노력해주었으면...(사실 아직 괴테 전집도 다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이 마이클 루스의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청년정신)이다. 내가 '발견'이라고 한 건 책이 아니라 저자이다. 마이클 루스는 저명한 생물철학자로서 나도 그의 원서 몇 권을 갖고 있다(나는 생물학도 좋아하고 철학도 좋아한다). 때문에 그의 책이라면 일단 사서 읽을 만한 준비가 돼 있는 터였는데, 우연찮게 <다윈주의자...>를 발견한 것. 주문을 해놓고 아직 만지지도 못한 책이지만, 기다려지는 책이다. 참고로 생물철학 입문서로는 데이비드 헐의 <생명과학철학>(민음사, 1994)가 있고, 한스 요나스의 <생명의 원리>(아카넷, 2001)도 '철학적 생물학을 위한 접근'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루스의 책으론 2003년에 <생물학의 철학적 문제들>이 더 출간됐다. 엘리엇 소버의 <생물학의 철학>도 2004년에 나온 이 분야의 책으로 소장할 만하다.) 

 

 

 



김동춘 외 3인의 인터뷰 <인텔리겐차>(푸른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돼 있어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대담이나 인터뷰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지식인들에게 접근하는 가장 유용한 통로는 사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출판계에서 이런 인터뷰 기획이 많아지고 있는 건 작년에 나온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덕분이다. 그 책의 (기획의) 성공 때문에 이러한 유사 기획이 탄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우리는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소통할 필요가 있다. 지식과 교양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극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종영의 <내면성의 형식들>(새물결)이 출간됐다. 그의 전작 2권(<지배와 그 양식들>,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도 사두고는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이론적 기획을 성실하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그와 함께 두 권의 주석서도 기록해 두고 싶다. 하나는 이진경의 <노마디즘1,2>((휴머니스트). 전체 1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혹은 <천의 고원>) 주석서이다. 사실 <천 개의 고원>도 방대하지만, 이 주석서는 한술 더 뜬다. 아마 영미나 프랑스에도 이만한 주석서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천 개의 고원>은 커녕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도 읽지 못했지만(후자가 전자보다 어렵다), 때문에 당분간은 <노마디즘>과 대면할 시간이 없을 터이지만, 두꺼운 책들은 하여간에 나를 즐겁게 한다(!?) 다만, 다른 고전들의 주석서들은 왜 그리 굼뜬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건 <노마디즘>이 지난주 한겨레와 조선일보 서평에서 모두 1면에 올랐다는 사실. 한겨레의 것은 고명섭 기자가 썼고, 조선일보의 것은 들뢰즈 전공자인 서동욱씨가 썼다. 그런데, 과연 조선일보는 들뢰즈를 지지하는 것인지?(조선일보의 얄팍한 지식인-대중주의가 읽히는 대목인데) 문제는 '아무생각없이' 그런 지면에 서평을 쓰고 하는 행태이다. 들뢰즈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이종영의 말대로 파시스트라면 그랬겠지.) 그런데, 왜 들뢰즈 연구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고민없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가? 부르디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르디외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 그런데, 부르디외 전공자라는 한 교수는 조선일보에 칼럼까지 연재하곤 했다. 분명 사상은 유행과 구별되어야 한다. 체 게바라 티를 입고 다닌다고 체게바라주의자 혹은 혁명가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들뢰즈를 들먹이고 다닌다고 들뢰즈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노마드가 되는 것도 아니다(노마디스트는 될지 모르겠다). 유능한 연구자가 생각없이 행동하는 것은 보기에 거슬린다.

 

 

 



또 한권의 주석서는 김동식 교수의 <로티-철학과 자연의 거울>(울산대출판부)이다. 소리소문없이 나온 이 책을 나는 구내서점에서 구입했는데(인터넷서점에도 없다), 현재 미국의 가장 흥미로운 철학자인 리차드 로티의 출세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쉽게 소개한 책이다. 그 책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까치글방, 1998)로 이미 번역돼 있다(우리말로 어색하게 '그리고'가 제목에 들어간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의성을 피하려고 한 거 같은데, 생각이 얕다.).

물론 두툼한 책이고 초보자가 읽기엔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까지는 교양서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이번 주석서를 참고서삼아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번 도전해 보시기를 권한다. 김동식 교수의 <로티와 신실용주의>(철학과현실사, 1994)가 분량은 좀 많지만(532쪽) 로티 철학 전반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이다.(*로티 입문서로는 2003년에 나온 이유선 교수의 <리처드 로티>도 추천할 만하다.)

 

 

 



끝으로, 존 롤즈. 알마전에 <정의론>의 저자 존 롤즈 하버드대 교수가 타계했다. 철학에 조금이라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1971년에 처음 출간된 그의 <정의론>은 미국 분석철학에 일대 방향전환를 가져왔다고 평가를 받을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 책은 일찌감치(1979년)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고전답게 거의 읽히지 않는 책이다. 나도 원서는 갖고 있지만, 번역서 구입은 미루다가 아직도 사지 못했다. 그 사이에 4,000원하던 책값은(내가 대학 1학년때) 지금 19,000원으로까지 뛰었다. 어쨌든 조만간 <정의론>(서광사)과 <공정으로서의 정의>(서광사)를 구입할 예정이다(*<정의론>만 구입한 것 같다).

다행히도 롤즈의 다른 주저들인 <정치적 자유주의>(동명사, 1999)와 <만민법>(이끌리오, 2000)가 모두 번역돼 있고, 단행본 연구서도 하나 나와 있다. 때문에 롤즈는 기다릴 필요없이 그냥 읽기 '시작'하면 된다. 롤즈와 관련한 연구서로 스테판 뮬홀 등이 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1)이 권할 만하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쟁의 중심에 존 롤즈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저자인 뮬홀은 하이데거와 스탠리 카벨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이다.(*롤즈에 관한 연구서들은 기억에 두세 권쯤 된다. 엄수균의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그 중 한 권이다.) 



하여간에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끝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라캉의 <에크리> 새 영역본이 출가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역자는 예고된 대로 브루스 핑크이고, 지난 11월에 선을 보였다(*핑크는 <에크리>의 선역본과 완역본을 잇따라 선보였다. 몇달 전에 구한 두툼한 영역본이 지금은 서가에 꽂혀 있다). 인터넷 교보를 통해서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주문을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쉐리단의 번역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계속 유예되고 있는 <에크리>의 국역본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라캉의 재탄생'은 제비 몇 마리가 떠들어댄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론 풍문만이 늘어갈 뿐이다. 라캉의 '실체'와 맞대면하는 것이 최선이다. 라캉주의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물론 분발해야 할 사람들이 어디 라캉주의자들 뿐이랴!)...

2002. 12. 10.

 

 

 

 

P.S. 저명한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도 이맘때 출간된 책이지만, 다른 분들의 소개가 있어서 생략했었다. 탈식민주의와 바바의 입문서로서는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가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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