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다리텍스트'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며칠 묵혔다. 이미 대여섯 권의 책에 관한 대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내정돼 있지만, 따로 짬을 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시작은 해놓아야겠기에 몇 자 적기로 한다. 사실 곁다리텍스트란 말을 상기하게 된 건 최근에 나온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민음사)에 붙여진 수잔 손택의 서문에서 '범소설(parafiction)'란 단어를 발견한 덕분이다.

 

 

  

 

"나는 이 책을 지난 한 세기의 소설과 범소설(parafiction)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에 포함시키고 싶다"라고 그녀는 치프킨의 소설에 대해 적었는데, 거기서 'parafiction'을 '범소설'이라고 옮긴 게 눈에 띈 것이다. 'para'란 접두어는 (against란 뜻도 갖고 있지만) beside란 뜻을 갖고 있으며 'parafiction'은 정격소설에는 포함하기 곤란하지만 소설이란 말의 외연을 최대한 확장시킬 때 포함될 수 있는 가장자리 소설을 뜻한다. 치프킨의 소설이 그렇게 분류된 건 그것이 역자의 지적대로 "소설과 다큐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곁다리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paratext'를 가리키며 그것은 텍스트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시킬 때 포함될 수 있는 가장자리 텍스트들을 가리킨다. 그걸 '곁다리텍스트'라고 최초로 옮긴 이는 내가 알기에 비평가 김현이었다. 그 번역어를 나는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에 실린 맨마지막 글 '서문과 독자'에서 처음 보았다. 몽테뉴의 <수상록>, 루소의 <고백>,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등장하는 네 개의 서문/서시를 분석하고 있는 그 글에서 김현이 '곁다리텍스트'란 말로 지칭한 것은 '서문'이지만 그 말이 반드시 서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은 비평가 스스로가 미리 밝혀놓고 있다. 그의 논변을 따라가 본다.

 

 

 

 

(1) "어디까지를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그런 질문도 질문일 수 있나 하는 회의가 곧 생겨날지 모른다. 텍스트란 어떤 제목 밑에 딸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중성적 명칭이다. 텍스트는 모든 쟝르적 구분과 양적 구분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는 매우 자명한 개념처럼 보인다."(*텍스트의 개념은 자명해 보인다.)

(2) "그러나 그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텍스트를 이루는 요소들이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제목과 필자의 이름, 그 다음 책 뒷표지나 앞날개에 붙어 있는, 물론 없을 수도 있는 요약문들과 필자 소개문들; 맨 첫 페이지나 맨 마지막 페이지에 붙어 있는, 이것 또한 없을 수도 있는 인용문들; 띠지에 씌인 글들. 이런 것들은 텍스트에 속하는가, 안 속하는가? 어디까지를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우스꽝스러운 질문도, 그 문제에 허심탄회하게 접근하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하지만 텍스트의 개념/경계를 확정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3) "텍스트와 관련된 모든 것은 다 텍스트이다라고 동어반복적으로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우선 제목과 필자의 이름에 대해 그것을 텍스트라고 분명히 말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 다음의 것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문제에 대한 비교적 합리적인 접근은 제라르 쥬네트라는 프랑스의 한 비평가에 의해 행해졌는데, 그는 텍스트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곁다리텍스(paratexte)라고 부르기를 제안하고 있다."(*쥬네트는 텍스트와 곁다리텍스트를 구분하자고 제안한다.)

(4) "곁다리텍스트란 엄격한 의미에서 텍스트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아니 텍스트라고 부르기는 좀 거북하지만, 텍스트에 붙어 텍스트가 되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곁다리텍스트 중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서문이다. 서문, 혹은 서시는 텍스트 전체의 구조를 암시하거나 텍스트 생성의 비밀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서문은 텍스트와 그것을 쓴 사람 사이의 가교이다. 그것은 사람과 텍스트에 다 같이 관련을 맺고 있다. 서문 연구는 텍스트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부분이지만, 그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서문학이라고 불러야 할 서문 연구는 서문이 곁다리텍스트이지만 텍스트 못하지 않는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313-4쪽, 강조는 나의 것)

다시 김현의 정의를 반복하자면, "텍스트라고 부르기는 좀 거북하지만, 텍스트에 붙어 텍스트가 되고 있는 텍스트들"을 우리는 '곁다리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가령, 치프킨의 소설 텍스트에 에피그라프로 붙어 있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한 구절이 그런 곁다리텍스트의 또다른 사례이다: "당신의 터무니없는 말은 얼마나 건방지고 뻔뻔스러운가. 그런데,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토록 겁을 먹고 있으니!"

'곁다리텍스트'란 카테고리는 바로 그런 곁다리들, '덧붙어 딸린 것들'을 위한 자리이다. 그런 것들이 생색내는 자리이다. 실상은 이러한 류의 페이퍼 같은 하이퍼텍스트가 곧 파라텍스트가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책으로 묶기에는 거북하지만,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그런. 나는 그런 텍스트들에 애착을 느낀다...

06.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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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3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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